LOGIN“아니.”하성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왜 말 안 했어?”“전에 네가 알아냈잖아. 내 기억상실, 차경후가 손댄 거라고. 아직은 차경후가 왜 내 기억을 잃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당분간은 말하지 않으려고.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되면, 그때 말할게.”제나가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경후의 태도가 달라진 건, 제나가 기억을 잃은 뒤부터였다.경후는 제나가 기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나와 경후의 지난 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경후의 마음속 응어리는 아직 완전히 풀리
은주는 제나를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사실 나는... 줄곧 네 대역이었어.”은주는 늘 자존심이 강했다. 뻔히 알고 있는 일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그런 은주가 이제 와서 이 일을 인정한다는 건, 마음이 완전히 꺾였다는 뜻이었다.“사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경후가 막 Z국으로 돌아와서 나한테 다가오던 때였지. 같이 밥 먹으러 나갈 때마다 경후는 늘 내 옆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내 옆모습을 가만히 보곤 했어.”“경후가 나를 볼 때면 가끔 눈이 멀리 가 있었어. 마치 나를 지나... 다른 여자를 보는 것
흑암처럼 어두운 경후의 눈은 달빛 아래 깊은 우물처럼 속을 헤아리기 어려웠다.그는 제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얇은 입술을 열었다.“계속 당신을 도와주던 그 남자... 대체 누구야?”경후가 묻는 건 그 일이었다.제나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맹세할 수 있어. 나도 정말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심지어... 이름도 몰라.”“만난 적은 있어?”제나의 눈 밑으로 망설임이 스쳤다.지금은 모든 기억이 돌아왔지만, 그 정체 모를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단서도 없었다.제나는 지난번에 나타났던 남자가 정말 그 정체 모를
“네.”제나의 숨이 가볍게 멎었다.이어 고개를 들어 경후를 바라보았다.“진심이야?”경후의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설마 당신은 그냥 해 본 말이었어?”“아니.”제나는 경후를 올려다보며 망설이다가 물었다.“정말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아?”“뭐가?”제나는 입술을 열었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경후는 제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제나를 품에 끌어안고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냥 묻어두자.”경후의 목소리는 물처럼 맑고 서늘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경후는 제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얼마 전까지는 기억을 되찾는 일에 꽤 신경 썼잖아. 그런데 요즘은 병원에 가겠다는 말도 안 하더라... 이제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은 거야?”제나의 기색이 미세하게 변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경후가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런데 당신이 이미 혼자 몇 가지는 떠올린 것 같아.”제나의 마음이 서늘해졌다.경후는 제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제나와 눈을 맞춘 경후의 검은 눈동자는 먹물처럼 짙었고,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방금 당신이 말했지. 그 독은 당신이 먹인 게
지금 와서 떠올려 보니, 제나는 모든 일이 조금 허무했고 우습기까지 했다.“괜찮아?”경후의 목소리가 제나의 생각을 다시 끌어올렸다.“괜찮아.”제나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웠다.“그냥 갑자기 몇 가지 일이 떠올랐어.”“그래?”경후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뭐가 떠올랐는데?”제나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예전 일들이야.”그녀가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뒤 과거의 기억 몇 가지를 떠올렸다는 사실은... 경후도 알고 있었다.경후가 제나를 바라보았다.“예전의 어떤 일?”제나의 속눈썹이 조용히 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한 강한 힘.경후와 눈이 마주치자, 제나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조여와 숨이 막혔다. 제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대답해.”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남자의 숨결이 가까이서 스치며, 강한 존재감이 제나를 압박했다.‘낯선데... 이상하게 익숙해.'마치, 아주 오래전에도 이렇게 가까이 있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제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경후의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을 읽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왜? 두려워?”경후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뭐라
재준을 바라보는 경후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 “설령 내가 하제나랑 이혼한다 해도, 그쪽이 하제나랑 만날 만한 정도의 깡이 있을까? 몰락한 데다 이혼까지 한 여자를 유씨 가문에 들일 자신은?” 그렇게 말하며 경후는 비웃음이 섞인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쪽이 애초에 그럴 만한 강심장이었으면, 하제나랑 결혼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었겠지.”재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이 비웃음... 틀리지 않았어.’예전에 하씨 가문이 몰락한 후, 제나는 더 이상 유씨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이익을 최
경후는 소진의 반응을 무시하고 가볍게 문을 두드린 후 병실로 들어섰다.제나는 이미 일어나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세린은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팔과 다리의 상처에는 약이 발라져 있었지만 상태는 꽤 처참해 보였다.그러나 제나는 세린을 한번 힐끗 보고는 다시 무덤덤하게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제나의 무심한 태도에 경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당신, 할 말 없어?”제나는 차가운 침대에 몸을 기댄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무슨 말을...? 내가 할 말, 이미 다들 대신 해주신
무모한 소진이 앞장서서 세린 대신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세린 대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해주니, 세린은 언제나 이해심 많고 사려 깊은 사람인 척할 수 있었다.나쁜 짓은 전부 남이 대신 해주고, 좋은 이미지는 몽땅 세린이 가져가는 구조.사람을 찔러놓고도 피 한 방울 묻히기 싫고, 남의 남자를 탐하면서도 깨끗한 척 명분까지 챙기려는 거.‘세상에 그런 공짜가 리 없잖아?’‘윤세린, 설마 그렇게까지 멋대로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거야?’제나는 속으로 비웃었다.‘윤소진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폭탄이자, 결국 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