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야. 강석현.”“뭐.”“더블데이트 어때? 찜질방 데이트 가즈아!”석현이 가자미 눈으로 준호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은 왜 또 헛소리인가 싶어서.“미쳤냐? 첫 데이트부터 개망신당할 일 있냐?”“왜? 어색할 텐데 잘 됐지 뭐.”그런가..? 하긴, 어색하긴 할 거야.게다가 어디를 가야 할지 내내 고민 중이었는데... 찜질방 괜찮네. 나쁘지 않네. 영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찜질방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궁금해요.”“이거 봐! 강 이사! 같이 가자고!”눈동자를 굴리던 석현이 결국 OK 사인을 내렸다.“좋아. 대신, 삐약이 앞에서 놀리지 마라. 망신 주지 마라.”“당연하지.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인데.”“믿는다.”“기 팍팍 살려줄게. 기대해.”사무실로 돌아온 석현은 사내 메신저로 세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데려가면 놀랄까 봐. 그래도 의사 정도는 묻는 게 예의니까.- 홍세화 씨. 퇴근하고 찜질방 데이트 어때요?- 찜질방이요? 갑자기요?- 네. 몸도 지지고, 맛있는 것도 먹고. - 음, 좋아요.- 혹시.. 더블데이트도 괜찮은가요?빠르게 오던 답장이 일순 멈췄다.아씨, 불편한가? 첫 데이트부터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손가락이 책상 위를 하염없이 두드리던 중,- 누구랑요?- 신준호랑 유영 비서요.- 아, 두 분이 사귀신다는 이야긴 들었어요. - 불편하면 둘이 갑시다.- 아니에요. 퇴근하고 봬요.오예! 고민은 끝났다. 첫 데이트 장소는 찜질방이다.거기서 먹는 식혜랑 계란이 또 죽여주지. 라면이랑 미역국도 최고지.세상 신나고 설레긴 했지만 유난히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걸 넘어 꼭 멈춰버린 것 같은 날. 비소로 6시가 되었을 때,-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정리하고 내려와요.- 네.세화는 두리번두리번 눈치를 보며 석현의 차에 올라탔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준호의 차가 그 뒤를 따랐다. “영아, 안 불편하겠어? 홍세화 사원이랑 같이 씻어야 되잖아.”“음.. 창피하긴 한데..
세화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이러다 회사에 소문이 퍼지는 건 정말 한순간 일 텐데. 아직 안면 인식 장애에 대해 팀원들한테 털어놓지도 못했는데.“진짜입니다. 진짜로 걸린 겁니다.”“네..”“내가 왜 싫습니까?”“안 싫습니다.”“그럼 왜 자꾸 한숨만 쉽니까?”“죄송합니다.”싫지 않다는 대답은 마음에 쏙 드는데, 말투가 왜 이렇게 딱딱하냐고.사람 불안하게! 무섭게!“지금은 2026년입니다.”“압니다.”“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입니까? 사내 연애한다고 누가 안 잡아먹습니다!”켁, 커피가 목구멍에 걸린 세화가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석현은 개의치 않았다.“우리 회사 슬로건이 뭡니까?”“기... 술은 차갑게... 방향은... 따뜻하게..”“그러니까, 사랑이 있어야 더 따뜻하지 않겠습니까.”신준호, 미안하다. 이러라고 만든 슬로건이 아닌데, 뜻이야 갖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이사님.”“네.”“그럼 해요, 사내 연애.”?석현의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전개야? 나 지금 꿈꾸는 거야? 아직 꿈에서 안 깨어난 거야?“방금 뭐라고 했습니까?”“겪어봐야 알죠. 만나 보면 분명해지겠죠.”“왜 고백을 그쪽이 합니까!”“고백보단 제안에 가깝습니다.”응..? 연애를 이렇게 시작하는 커플이 있던가?자존심은 긁히는데 또 속은 들뜨고, 막상 웃음은 나는데 참아야겠고. 일단은 머리를 굴려 세화의 말을 이해해해보려 애를 썼다.“그러니까 연애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자, 그 뜻입니까?”“네. 시작을 해야 결론이 나니까요.”“흠, 난 연역법을 좋아합니다.”연역법,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구조. 즉, 사랑하는 사람은 연애를 한다. 고로, 우리는 연애를 한다. 논리적으로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사랑이 연애로 귀결된다는 명제는 어디에도 없다.짝사랑, 금지된 사랑, 스스로 접어버려야 하는 감정들을 무시한 논리니까. 하지만 석현에게 그런 누락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전제를 밀어붙일 자신이 있었
“아... 어떡해요.. 부모님이랑 친한 분인데..”세화의 중얼거림에, 쫄래쫄래 그 뒤를 따르던 석현의 걸음이 빨라졌다. “미안합니다.”“시장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요? 병아리라뇨.. 하.. 병아리라뇨!”“지금은 꼭 화난 병아리 같습니다.”“하지 마세요!”이힛, 소문? 겁나게 빨리 났으면 좋겠다.서울 바닥에 이렇게나 앙증맞은 인간 병아리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홍 삐약씨!”“하아...”세화는 고개를 푹 숙이며 걸으면서도, 끝끝내 주차장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가세요.”“홍 삐약 사원. 내일 아침에도 내 방으로 오세요.”“싫어요.”“지금 상사한테 대드는 겁니까?”아... 할 말 없게 이럴 땐 또 상사래. 지위를 악용한 치사한 이사님 같으니라고.“만약 안 오면, 직접 마케팅 부서로 찾아가 삐약삐약 거릴 겁니다.”“제가 올라가겠습니다...”“옳지.”등을 홱 돌려 자리를 떠나는 모습도 귀여움 투성이었다. 석현은 룰루랄라 차에 올라타 봉투 두 개를 조수석에 올려두고는, 세화가 사라진 방향을 끝까지 바라보았다.“아오, 귀여워! 귀여워 죽겠다니까!”***다음날 아침, 유독 출근 시간이 빨랐던 석현은 세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향이 좋은 커피를 골랐다. “아침엔 룽고가 굿이지.”똑똑.드디어 왔구나, 노크소리가 이토록 반가운 소리였다니!“네!”문이 열리고,“홍 삐약..! 아...”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젠장, 왜 우리 삐약이가 아니고 멀대 같은 신준호가 떡하니 서 있는 거냐고. 저 새끼는 왜 안 하던 노크를 하고 지랄이냐고.석현은 실망했고, 준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번졌다.“홍 삐약?”“뭐,”“홍세화 사원 애칭이냐? 삐약? 설마 병아리냐?”“그런 거 아니거든.”“와.. 시골 장닭같이 생긴 놈이 진짜 웃기지도 않네?”그만둘까? 지금이 딱 퇴사 적기인가?아무래도 이 짜증 나는 놀림은 끝이 없을 것 같은데.억울해 죽겠는 건, 아직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화는 보란 듯이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드디어 불편했던 식사가 끝났다는 사실이 어찌나 후련하던지.“이사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뭡니까, 꽈배기 집 안 알려줍니까?”“나가셔서 우측 골목으로 쭉 직진하세요.”석현의 표정이 이내 시무룩해졌다.끄응.... 너무해. 후식까지 같이 먹음 좋잖아. 왜 말로만 알려주는데. “시장이 너무 복잡합니다.”“바로 보일 거예요. OO 꽈배기, 노란 간판이에요.”“....”“죄송해요, 곧 손님 몰릴 시간이라서요.”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던 어머니가 세화의 목에 걸린 앞치마를 벗겨냈다.“모시고 다녀와, 하나도 안 바쁘니까!”“엄마!”“얼른!”이제야 석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사장님, 전 오늘부터 여기 단골입니다. 지독한 단골이 되어버릴랍니다. “갑시다!”“아..”등 떠밀려 가게 밖을 나선 세화는 시장 길이 익숙하다는 듯 앞장서 걸었다. 총총총, 작은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석현은 뒤를 따르며 그 뒷모습을 보고 히죽거렸다.손에 들린 만두 봉투가 리듬감 있게 흔들렸다.“홍세화 씨!”“네?”“같이 좀 갑시다!”애석하게도 꽈배기 집은 멀지 않았고, 세화는 정확하게 노란 간판 앞에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나 안 기다려 줘? 왜? 뭐가 그렇게 급한데? 가게도 안 바쁘시다던데? “주차장은 어떻게 갑니까? 길이 영 헷갈리네.”“가끔 오시는 시장이라면서요.”“길치라니까요.”확실하다. 이사님은 절대로 길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징징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장님! 꽈배기 10개 포장이요!”석현이 주문을 마치자 마자 세화의 목소리가 무서우리만큼 낮게 가라앉았다.“이사님.”“네.”“저한테 관심 있으세요?”컥, 뭐야..? 왜 또 당돌해졌어..? 이러지 마. 이러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예?”“그런 게 아니라면, 여기까지만요.”“...”“회사에 소문이라도 나면 저 진짜 못 다녀요. 아직 수습 기간도 안 끝났는데 괜한
“그럼 안 됩니까?”“네.”어쭈, 이거 봐라? 또 면접 때의 패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네.“뭐라고요?”“다른 직원들과 동등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부담 갖지 않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억울해 미치겠네. 안면 인식 장애 때문이 아니라니까. 아.. 이 답답한 병아리 같으니라고.“집은 어디입니까? 시장 근처?”“네? 네..”“회사까진 지하철로 여섯 정거장 정도 되겠네요.”“네.”“흠, 내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도 주워줬는데.”바닥? 종이? 헉!무언가가 떠오른 세화가 고개를 돌려 석현을 바라보았다. 면접 날, 웬 친절한 아저씨가 종이도 주워주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웃었었는데.. 그 아저씨가 정말 이사님이었다고? “설마 면접날이요? 그때 그.. 지하철역 출구에서요?”“아저씨는 너무했습니다.”“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사님.”어떡해... 젊은 기업인으로 유명한 신준호 대표님 친구면, 이사님도 스물아홉이란 소리인데. 그땐 그냥 아저씨인 줄 알았지 뭐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바르르 떨렸고, 발까지 동동 굴렀다 석현은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얼큰이가 맛있습니까, 멸치가 맛있습니까.”“네...?”“칼국수요.”“저.. 저는... 멸치를 더 좋아합니다.”“그럼 오늘은 멸치로 먹어야겠네.”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식당 문을 열자, 석현을 알아본 부모님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어..? 세화 회사 이사님 아니신가요?”“또 뵙겠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요.”“어서 앉으세요! 어서요!”세화가 물병과 컵을 쟁반 위에 올리자, 어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속삭였다.“엄마가 할게. 어여 이사님 챙겨드려.”“으응..”영 불편하고 민망했던 세화는 작은 손으로 수저를 세팅하고 손끝만 바라보았다.석현이 턱을 매만지며 메뉴판을 쓰윽 훑었다.“사장님! 멸치 칼국수 2인분이랑, 김치만두 하나, 고기만두 하나요. 아, 그리고 만두는 2인분씩 포장해 주세요.”만두다. 그날처럼 또 만두다
퇴근 시간 10분 전, 석현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지 않고 로비에 앉았다. 그리곤 다리를 꼰 채 발끝을 까딱였다.이유는?몰라!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정확히 6시가 되자, 직원들이 하나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뚫어지게 게이트를 바라보는 석현을 보고는 흠칫, 고개를 숙이며 퇴근하는 직원들은 늘어갔지만 이상하게 홍세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뭔데? 야근은 싫다며! 비전은 미래고 보상은 현재라며! 그럼 재깍재깍 칼퇴를 해야지, 왜 안 내려오는 거냐고!발끝을 까딱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제는 허벅지까지 덜덜 떠는 강석현 이사님. 그때, 마케팅 김민주 팀장이 게이트를 통과했다.“어? 이사님, 퇴근 안 하십니까?”“음, 오늘은 마케팅 부서가 좀 바쁜가 봅니다.”“네? 혹시 시키실 일이...”“퇴근이 늦네요.”? 민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아직 6시 20분인데, 설마.. 팀장이 칼퇴 한다고 돌려 까는 건가?어쩌라고? 업무는 끝났고, 난 이미 사무실을 나와버렸는걸. 당장 집에 가야겠는걸. “이..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김 팀장님!”“네.”“아, 아닙니다. 조심히 가세요.”거 참, 퇴근길에 되게 불편하게 구시네. 민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로비를 빠져나갔다. 석현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마케팅 부서였다.여전히 이유는 모르고, 그냥 그러고 싶을 뿐.띵!도착음 소리가 들리고, 유리문 너머로 홍세화의 모습이 보였다.사무실에 혼자 앉아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이고, 아침에는 싱그러운 병아리 같더니 지금은 엄청 지친 병아리 같네.벌컥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향하자 세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았다. 빠르게 석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는,“이사님, 안녕하세요.”오, 사원증이랑 시계 효과가 끝내주는군. 우리 병아리가 아주아주 눈썰미가 좋구먼. “퇴근 안 합니까?”“아직 일이 좀 남아서요. 이사님께서는 어쩐 일이세요?”“칼.. 칼국수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
묶는 걸 좋아한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준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듯 방 안을 헤집기 시작했고, 붙박이장 문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안에는 수많은 성인 용품들이 즐비했고, 종류와 수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영이는 입양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이 곳에 가둬지고, 끔찍한 시간을 견뎌가며 죽지 못해 살아온 것이다.그리고, 준호는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오빠, 준호 오빠....!”욕설이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차마 내뱉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실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중, 어둑한 숲길을 따라 석현이 다가왔다. 발걸음은 빨랐고, 목소리엔 걱정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벌써 만났어? 영이 씨는?”“석현아.”“뭔데 또!”준호가 고개를 들어 집 쪽을 바라봤다. “여기 있는 카메라, 전부 해킹 좀 해야겠다.”“지금?”“어. 일단 이 집이 먼저 눈을 잃어야 해. 그게 순서야.”석현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욕설을 삼켰다.당연히 그건 준호를 향한 게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산속에 가둬 둔,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딱 봐도 여섯 대는 될 것 같은데.”“사각지
여전히 가슴팍에도 닿지도 않는 키, 연갈색의 눈동자와 길게 내려온 속눈썹, 밤인데도 도드라지는 새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까지.AI도, 수치도 필요 없는 날것 그대로의 확신이었다.“영아.”“누구... 세요?”숨이 목구멍에서 걸려버렸다. 역시나 알아보지 못하는구나.십 년이란 세월은 준호의 체격을, 인상을, 표정을 참 많이도 바꿔놓았다. “나야. 신준호. 준호 오빠.”그 이름을 듣자마자 영이의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마치 보면 안 될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눈동자가 보란 듯이 흔들렸다.“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