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여전히 가슴팍에도 닿지도 않는 키, 연갈색의 눈동자와 길게 내려온 속눈썹, 밤인데도 도드라지는 새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까지.
AI도, 수치도 필요 없는 날것 그대로의 확신이었다.
“영아.”
“누구... 세요?”숨이 목구멍에서 걸려버렸다. 역시나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십 년이란 세월은 준호의 체격을, 인상을, 표정을 참 많이도 바꿔놓았다.
“나야. 신준호. 준호 오빠.”
그 이름을 듣자마자 영이의 얼굴이 굳더니, 곧바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보면 안 될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눈동자가 보란 듯이 흔들렸다.
“유영! 영아!”
“가, 가세요...” “무슨 소리야.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걱정 했는....”순간,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던 영이가 검지 하나를 들어 자신의 코 끝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너무도 익숙한, 기억 속에 여전히 또렷한 제스처였다.
“누가 보고 있어요. 들어오시면 안 돼요.”
그제야 보였다. 대문 위, 처마 아래. 불빛이 깜빡이는 카메라로 보이는 것들.
영이는 마치 문 밖의 상황과, 아니 준호와 멀어지려는 듯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문틈은 여전히 반만 열려 있었다.
“괜찮아. 잠깐만. 잠깐만 들어갈게.”
“안 돼요! 여긴 말 해서도 안 되고, 나가서도 안 되는 집이에요.”말 해서도 안 되고, 나가서도 안 되는 집?
세상에 그딴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이가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이상함과 부자연스러움 투성이었다.
당연히 분노부터 차올랐지만,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누가 또 있어? 혼자 있는 게 아니야?”
“아니요.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그냥 제발, 제발 좀 가 주세요.”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대문을 활짝 열고 정원으로 발을 들이려 했다.
그 순간 영이가 다급히 달려와, 그 작은 몸뚱어리로 준호를 밀쳐냈다.
“안 돼요...!”
그러고는 준호의 옷깃을 붙잡고, 가로등도 없는 숲속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낑낑거리며 걷는 모습, 숨이 차올라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이 여전히 열네 살의 아이 같았다.
나뭇가지가 팔을 스쳤고, 마른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마저 답답했다.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건데? 왜 이렇게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건데?
“영아, 잠깐만.” “...” “영아!”영이가 그제야 멈춰 섰다.
가장 어두운 지점, 집도 길도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 다다르고 나서야 잡고 있던 옷깃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얼른 가세요.”
“얘기 좀 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은 어떤지. 응?” “싫어요. 안 돼요.”어깨라도 붙잡아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작고 가늘었다.
혹시 카메라 때문에 그런 건가?
단순히 경비 목적으로 설치했다기엔 실로 과했다.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카메라가 걱정돼서 그런 거면, 내가, 오빠가 다 해결……”
“아니요. 저는.... 저는요... 오빠가 싫어요.”생각보다 상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좋을 리가 없지. 미워하고 싫어하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사과하러 왔어. 그래서 사는 내내 너만 찾아다녔어.
“미안해, 오빠가 너무 늦었지.”
영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눈물은 꼭 구해달라는 외침처럼 보였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자꾸만 다른 방향을 향했다.
“다신 오지 마세요...”
찬 바람이 불었다. 영이의 새하얀 원피스 자락이 펄럭였다.
흰 자락이 꼭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같이 느껴지던 찰나, 영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빠 동생이래요. 근데 보람이처럼... 어여쁜 동생은 아니랬어요.”
“....뭐, 뭐라고?” “오빠랑 만나면요, 오빠를 불행하게 한댔어요. 그러니까 가요. 오빠 싫어요, 오빠 미워요...!”준호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귀에 꽂힌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튕겨 나왔다.
영이가 내 동생이라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내 동생이라면, 그 긴 세월을 그렇게 무심하게 가둬뒀을 리 없잖아.
숨이 막혔다. 반박할 말은커녕 떠올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영이는 이미 어두운 숲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곧이어 들려온 대문이 닫히는 소리,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는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꼭 관계를 봉인하는 소리 같았다.
“하, 별 그지같은 말을 다 들어보네.”
사실이 아니라 확신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도 미워 죽겠는 부모님인데, 더더욱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니,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일들이 이제야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부모님의 침실에서는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준호 때문에 걱정이에요. 한동안 지하실은 쳐다도 안 보더니, 갑자기 또 왜 저러는지...”“사내자식이 쓸데없이 마음이 약해.”“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너무 불안하다고요.”“불안?”“생각해 봐요. 다른 사람 미래는 다 보면서, 우리 준호 미래만 안 보인다잖아요. 그것도 소름이 끼친다고요.”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영이의 능력은 틀림없었다. 그간 영이가 보고, 느끼고, 전해온 수많은 이들의 미래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왜 아들의 미래만 보이지 않는 걸까. 그 역시도 그 부분이 가장 의문이긴 했다. “지금이라도 지하실 출입 금지 시켜요. 네?” “이랬다가 저랬다가. 규칙이 변하면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그럼 어떡해요? 이제 와서 어떡하냐고요!”“영이도 많이 컸고, 혼자 지낼 곳을 좀 알아봐야겠어.”숙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이런 말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드디어 이 집에서 내보낸다고? 드디어 그 꼴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벌써부터 해방감이 몰려들었다.“정말요? 정말이에요?”“어디 조용한 데 두고, 요긴하게 써먹어야지.”“참나, 무슨 신당이라도 차려줄 심산이에요?”“수준 낮은 무당들이랑은 급이 달라. 급이.”“하긴, 그 덕에 엄마 수술 시기는 딱 좋긴 했어요.”영이의 말을 들은 숙경은 일이 터지기 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조금만 더 늦었으면 뇌혈관이 터졌을 거라는 충격적인 소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그날 이후 딱 한 달. 한 달 뒤에 영이가 사라졌다. 아직 제대로 용서받지도 못했는데, 고작 복숭아 젤리만 사다 준 게 다였는데. 아무런 예고도, 인사도 없이 그렇게 영이를 떠나보냈다.처음엔 화가 났다. 그다음엔 자책했다. 마지막엔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집안에서 대화는커녕 가족들과 마주 앉아 식사조차 하질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왔다. 지하실 문은 그날 이후
노트를 펼쳐둔 채, 영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꺼지라고 한 것도, 소름 끼친다고 한 것도. 오빠가 다 미안해.”너무 늦은 사과였다. 이제 와서 하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턱 막혀버릴 것 같았다.“앞으로는 자주 올게. 사과도 갖다 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마.”손가락이 꿈틀하고 움직였다.그 작은 반응 하나도 곱절에 곱절을 더한 것처럼 마음이 미어졌다.***아침 해가 떠오르고, 보람이의 목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엄마! 아빠! 오빠 미쳤나 봐!”그 소리에 잠에서 깬 준호는 곧바로 손을 뻗어 영이의 이마부터 짚어보았다.다행히 열은 내려가 있었고, 숨결도 고르게 안정돼 있었다. “열 내렸네. 다행이다.”평온은 잠시였다.아침 식사를 가지고 지하실을 내려왔던 보람이는 영이의 침대 옆에 웅크려 잠이 든 준호를 보고야 말았고, 그 사실은 이미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으니까. “신준호.”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단단했다. 준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어깨가 뻐근했다. 밤새도록 불편한 자세로 곁을 지켰다는 증거였다.“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열이 심해서요. 밤새 떨어지질 않아서요.”“그래서 간호를 했다? 신태호의 아들 신준호가?”어머니 역시 황급히 들이닥쳤다. “준호야! 너 제정신이니? 누가 너더러 간호 따위나 하라고 했어?”“언제는 도와주라면서요.”“이게 지금 도움이야? 어머, 저 물수건 좀 봐...”숙경은 베개 옆에 높인 물수건을 홱 채가듯 들어 올렸고, 태호의 시선은 준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지 마라. 경고다.”“예. 그러시겠죠.”“나가.”준호는 지하실을 나가며 다시 한번 영이를 바라보았다.이 난리 통에도 잠이 든 듯 보였지만, 그래도 열은 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로 발걸음을 뗐다. 계단을 올라오자 보람이가 소파에 앉아 준호를 노려보았다.“정신 나갔지? 열네 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 아니야?”“입
아니라는 말에 안도는 했지만, 그럼 내가 영이한테 한 행동은? 그동안 괜히 잘 해줬다. 괜히 정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혼자만의 규칙은 마치 스스로를 지키는 행동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지켜진 건 영이의 고독이었다.영이는 지독한 고독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찾아와 미래를 묻는 이들을 마주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김혁도 의원은 늘 빈손이 아니었다. 사리사욕은 채우면서도 지하실에 갇힌 영이가 안쓰러웠는지, 빵이나 과자, 인기 있는 소설책을 사 오곤 했다.“그래서, 보좌관이 그런 통화를 했단 소리지?”“네. 의원님을 욕해요. 법인 카드 내역서를 복사해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어요.”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치우셔야겠습니다.”“믿을 인간이 이렇게 없어서 원.”“이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그저 필요에만 의한 존재. 영이는 그 모든 시간들을 견디며 배웠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같이 다르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한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문득문득, 어린 시절 준호와 대화를 놔두던 노트를 펼쳐보곤 했다. 연필로 쓴 글씨. 삐뚤어진 질문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오빠를 못 본 지 몇 개월이 지난 걸까. 6개월? 10개월? 아니면 1년? 한 번도 날짜를 센 적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그러다 오늘은 애태우던 마음이 정리가 됐다. “오빠는 이제 내가 미운 거야... 소름이 끼칠 만큼.”***며칠 뒤 저녁, 보람이의 목소리가 집 안을 갈랐다.“엄마! 유영 쟤 이상해!”주방에서 접시를 놓던 소리가 잠시 멈췄다.“뭐가 또.”“침대에 누워서 대답도 안 해. 땀이 엄청 나!”“내버려둬.”접시 소리는 다시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준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땀이 난다고?”“어.”“엄마.”“내버려두라니까?
준호가 웃었다. 영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딱딱하게 성 붙이는 걸 싫어하는구나.아, 성이라는 게 없던가? 상관없지 뭐.“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게. 영아.” 영이도 웃었다. 입꼬리가 아니라 눈이 먼저 풀렸다. 그 작은 반응이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이 아이는 이름 하나에도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너무도 조심스러워, 열두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문밖을 나서보는 아이.그동안 나는 뭘 했던가. 꽃향기 하나 맡게 해주지 못한 내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뿌듯해할 자격이 있을까.생각보다 기분이 별로였다. 웃음은 났지만 오래가지 않았다.***그날 밤, 가족들이 귀가하자마자 준호는 보람이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신보람, 제정신이냐?”“또 뭐?”“두 번 다신 영이 손에 장난질하지 마. 못돼 처먹어가지고.”잔뜩 날이 선 말에 보람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코앞까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왜? 이제 나 말고, 걔 오빠 노릇이라도 하게?”“안돼?”“근데 이상하지 않아? 가족도 아닌데 저렇게 키워주는 이유 말이야.”“개소리하지 말고,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보람이의 웃음은 아이답지 않은, 너무도 께름칙한 웃음이었다.“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유영 쟤. 아무래도 아빠 딸 같아.” “...뭐?”“잘 생각해 봐. 그러니까 엄마는 쟤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떨지.”“소설을 쓰세요. 소설을.”아무렇지 않은 척 방으로 돌아왔지만, 그 말이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었다. 맞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처음부터 영이를 싫어했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늘 표정이, 분위기가 먼저 변했다. 혹시나 보람이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딸이라면..?더는 챙겨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다. 한참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고등학생. 보람이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준호의 마음에 또렷하게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찾아왔고, 지하실에 내려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지하실에 영이
영이를 외면했던 시간이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엔 영이가 좋았다.지하실에 있는 비밀친구.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밀친구의 존재는 드러났지만, 갑갑한 지하실은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달라졌다.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아이, 다른 사람의 미래는 보지만 자신의 미래는 보지 못하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로 인해 어머니는 늘 힘들어하셨다. 부모님이 다투는 이유도 늘 그 아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오늘따라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나섰다. 아버지의 중장 진급을 축하한다며 친인척들이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 준호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따라나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늘도 영이 탓을 했다.“하여간 쓸데없는 기지배라니까. 우리 아들 아픈 것도 모르는 게.”“엄마, 왜 또 영이한테 그러세요.”“왜 너만 안 보이냐고 너만! 기분 나쁘고 께름칙해.”“됐어요. 그만 열 내시고 다녀오세요.”문이 닫히고 집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준호는 거리낌 없이 지하실로 향했다.사실 오늘은 영이를 데리고 바깥공기를 쐬게 해줄 요량이었다.“영아, 오빠랑 잠깐 나가자.”“안 돼요.”“아무도 없어. 정원에만 나갔다 오자. 딱 거기까지만.”영이의 손이 책 위에서 멈추던 순간, 평소와 다른 손가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을 넘어 살까지 덕지덕지 발린 색색의 매니큐어. 그 불쾌한 모습을 보자마자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신보람 짓이지.”“예쁘게 해준다고 했어요...”“네 눈에는 이게 예뻐 보여? 이 미친 기지배가 진짜.”보람이는 늘 그랬다. 어릴 때부터 영악했고, 영이의 위에서 군림했다. 눈치가 빤해 대놓고 괴롭히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못살게 굴었다. 머리카락을 잘라 놓은 적도, 베개 위에 껌을 붙여둔 적도 있었다. 열세 살인 아이에게 열다섯의 아이가 하는 못된 행동들. 심지어 누구 하나 그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 그게 가장 화가 나는 지
숨이 걸렸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지금 당장 출발해도 최소 30분. 이 날씨에, 이 추위에 30분이나 밖에서 떨게 할 순 없었다. 경호원 새끼들은 뭘 하는 거지? 아니, 그 관리자 자식은 대체 뭘 하는 거지?생각이 엉키며 판단이 흐려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결국 핸드폰을 들었다.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그 아이 일이냐.”준호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신태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냈다.“네. 지금 영이가 테라스에 혼자 있어요. 아무래도 문이 열리질 않는 모양입니다.”귓가에 들리는 한숨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다 보고 있던 게야. 다 보고 있었어...”“빨리 영이부터요, 제발요……!”뚝, 전화가 끊겼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 문이 열렸다. 경호원은 바닥에 주저앉은 영이를 그대로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왜 안 부르셨습니까.”“설명하기 싫어서요.”“아시잖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죄송합니다…….”자꾸?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 소리야? 그때였다. CCTV 화면이 지직거리며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 접근 권한이 제한되었습니다.이제야 영이를 지켜보고 있던 걸 안 아버지가 손을 쓴 모양새였다.하지만 어림없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차단은 급했고, 그래서 허술했다. 접근 경로를 끊는 대신 로그를 지우는 데 집중한 흔적. 키보드 소리가 빨라질수록 한 줄, 두 줄. 경고 창이 깜빡였다.- 권한 복구 중…….급한 불은 껐지만, 지체하지 않았다.영이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걸 확인하고는, 그는 곧장 TF 팀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이 열리는 순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CCTV 해킹을 알아챘어. 지금부터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해.”“사용됐던 기록부터 전부 폐기하겠습니다.”“VPN부터 다시 따고, 나머지 인원은 이민 갔다는 소유주 연락처부터 확보해.”묵묵히 듣고 있던 석현이 키보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
“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신준호!”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