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에 도착해서도 영이는 잠만 잤다. 내내 잤다.준호는 그런 영이를 깨우긴커녕, 어쩐 일로 노트북 앞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검색한 단어는, - 프로포즈 추천 / 감동적인 프로포즈 / 프로포즈 장소 대여 / 프로포즈 선물해봤어야 알지. 해봤어야. 그래도 조만간 영이의 손에 반지가 끼워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이 귀에 걸렸다. 동생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이 모든 과정을 겪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잿빛이었던 세상이 이토록 환해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여보~ 자기야~”“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혼잣말로 다가올 미래의 애칭을 연습하며 키득거렸다. 그조차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월요일 아침,똑똑.노크 소리가 들리고, 세화가 석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노란색 니트는 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병아리 새끼냐고. 아오.“안녕하세요 이사님.”“앉아요.”따뜻한 커피를 내려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세화는 희고 작은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감사합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세화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왜 부르신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화가 나신 것 같진 않는데, 그날도 분명 괜찮았는데.아무래도 중요한 사실을 속이고 입사했다는 사실에 눈동자는 갈 길을 잃었고, 목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갔다.“혹시.. 왜 보자고 하신 건지..”석현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 보였다.“전 이 시계를 가장 좋아합니다.”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스퀘어 모양 글라스에 가죽 스트랩 색상이 반반 달랐다. 블루와 그레이 조합, 조금은 튀는 스타일. 세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시, 시계는 왜....”“사원증도 맸습니다.”그제야 깨달았다.나를 위한 배려구나. 강석현 이사님은 좋은 사람이구나.“감사합니다. 이사님.”“궁금한 게 있는데.”“네. 말씀하세요.”“혹시, 선천적인 겁니까. 후천적인 겁니까.”“아, 처음부터요.”석현은 그 덤덤하고 짧은 대답에 멈칫했다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은 초 저녁의 수영장, 두 사람은 분위기를 만끽하며 서로를 품었다. “오빠, 아르기닌 그만 먹어.”“안 돼.”“힘들단 말이야. 요즘은 전보다 더한 것 같아.”우리 영이가 행복한 투정을 부리는구나? 미안한데, 그런 투정은 통하지 않아. “영아.”“응?”“오빠는 전생에 현묵이 아니라 짐승이었다니까.”“....”“본능에 충실한 짐승.”“하아....”영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맞다. 애교를 부릴 땐 영락없는 대형견인데, 본능에 충실할 때만큼은 정말로 사나워진다. 문제는 그 사나움에 자신 역시 물들고 있다는 것.호되게 당한 영이가 결심했다. 다음번의 주도권은 내가 갖겠노라고.***샤워를 마치고 나온 영이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인을 마신 탓에 알싸하게 취한 기분. 딱 기분 좋은 정도. “영아. 괜찮아?”준호는 득달같이 달려가 뺨부터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감이 꽤 뜨끈했다.“안 되겠다. 물 좀 마시고 자.”“괜찮아. 근데 오빠.”“응.”“얼른 자자.”피곤하구나. 오늘은 좀 피곤할 만해.이곳저곳 돌아다니기 바빴으니까. 여행은 늘 피곤한 법이니까. 아무런 의심 없이 침실로 향한 준호는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침대 앞에서 가운을 벗어낸 영이의 몸에는 세상 야릇한 속옷이 걸쳐져 있었다.그건, 영이가 한참을 고민하며 작접 고른 속옷이었고 실로 영이 답지 않았다. 세상 농염한 보라색 브래지어는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한 젖가슴을 위태롭게 받치고 있었고, 팬티는 입은 건지 만 건지 헷갈릴 정도로 천이 작았다.“영... 영.. 아. 그거 설마 T팬티야...?”“오빠, 지금부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준호의 가슴을 밀치고 침대에 눕힌 영이는, 자신있게 올라타서는 아랫도리를 비벼댔다.순식간에 뜨거워진 성기가 구멍 아래에 짓눌려 꺼떡거렸다.“너... 갑자기 왜....”“주도권은 나눠 갖는 거야.”결국 영이의 결심은 현실이 됐고, 처음으로 신준호가
“평일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오빠랑 놀고. 매일이 행복해.”행복을 표현하는 영이의 말에, 준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근데, 회사는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녀? 아직도 재미있어?”“응. 오빠도 계속 볼 수 있잖아.”역시나 출근의 이유는 나 때문이었어! 다 나 때문이야! 준호는 영이가 이뻐죽겠다는 듯 볼을 부비고 손가락을 쪼물딱거리며 난리 법석을 피웠다. 영이 역시 싫지 않은지, 웃음을 흘렸다. “나, 월요병이 뭔지 이제 좀 알 것 같아.”“풉, 왜?”“벌써 토요일이 후딱 지나갔잖아.”“힘들면 회사 일 안 해도 돼. 오빠는 영이가 늘 편했으면 좋겠어.”“혼자 있으면 뭐해. 이제 혼자 있기 싫어.”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보냈던 영이는, 사실 준호가 퇴근하길 기다리던 시간조차 힘들었었다.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시계만 바라봤던 나날들. 지금은 오빠와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가장 좋았다. 회사에서 ‘유 비서’로 불린다는 것. 어엿한 월급 통장이 있다는 것. 모든 게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상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회사 정리하고 은퇴하면 이렇게 여행이나 다니자.”“아주 나중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하겠지?”“당연하지. 그때도 오빠는 영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을 거야.”“안 지키기만 해.”“약속.”미래는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끝까지 사랑할 거란 약속만큼은 자신 있었다. 정해진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유영이라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유영이라서.“맞다. 중장님은 괜찮으실까?”“좋은 이야기만 하자, 우리.”여행 중,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유전자센터 오기훈 원장은 검사 결과 조작에 대해 신태호의 지시였다고 진술해 버렸고, 그로 인해 조사를 받게 됐다고.하지만 소송을 취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잘못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한다는 게 준호의 생각이었다.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한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사내 교육 기간이 끝나면, 팀원분들께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제 와 본인 입으로 직접 고백하겠다?홍세화, 넌 그 순간 타깃이 될 거야. 뛰어난 스펙에 얼굴까지 예쁜데. 물어뜯지 못해 안달일 텐데. “꼭 그래야겠습니까.”“네..?”“굳이 약점을 고백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그래야 당당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사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안면 인식 장애가 퇴사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고요.”아.. 뜯어말리고 싶은데 어떡하지. 신준호 이 자식이 확 잘라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난 못된 친구를 사귀지 않았어. “임원들은 사원증을 착용하지 않습니다.”“아.....”“하지만 앞으론 빠짐없이 착용할 겁니다.”세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현을 바라보았다. 석현이 멈칫했다.눈 한번 되게 크네. 눈동자엔 렌즈를 낀 건가? 왜 저렇게 커? “이사님, 혹시 저 때문에..”“홍세화 씨.”“네.”“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내 방으로 오세요.”“네..?”“그럼 그날 봅시다.”석현이 자리를 떠나고, 세화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까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두려웠는데. 곧바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의 손부터 붙잡았다.“엄마, 놀랐지? 회사 이사님인데, 솔직하게 다 말씀드렸어.”“뭐라셔? 응...?”“좋은 분이셔. 나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얼마나 고생하면서 준비했는데... 엄마는 또 무슨 일이 생기나 해서..”“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포기 안 해.”석현의 시장 구경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차에 올라타 한동안 시동을 걸지 못했다. 핸드폰으로 안면인식 장애를 검색하기 바빴으니까. 선천적인가? 아니면 머리를 다쳤던 적이 있었던 건가? 치료는.. 불가능 한 건가. 그래도 생글생글, 참 밝게도 자랐네. 부모님도 인상은 참 좋아 보이시던데.맞다. 그럼 앞으로는... 내가 강석현이라는 걸 뭘로
모르는 척보다, 자꾸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뭐가 그렇게 죄송합니까?”“죄송.. 아... 죄송합니다.”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가게를 나서던 순간, 세화가 황급히 뒤따라 나왔다.“이사님..”“네.”이번엔 먼저 불러놓고는 입술만 깨무는 모습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가게 안, 부모님의 표정도 이질적이었다.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이럴만한 일이 아닌데?“말씀하세요.”“저는... 안면 인식 장애가 있습니다.”?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야. 안면 인식 장애면, 사람 얼굴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잖아. 언젠가 다큐에서 본 적이 있다. 눈, 코, 입, 귀. 개별 부위 인식은 가능하지만, 전체적인 조합이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목소리나 옷차림 같은 다른 정보로 사람을 식별한다고.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되는 장애.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게 안, 부모님을 향해 물었다.“잠시 홍세화 씨와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네?.. 네..”부모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석현은 세화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반대편 골목으로 향했다.“왜 고백합니까. 그것도 나한테.”“네..?”“난 넥사이드 임원입니다. 가장 몰라야 할 사람 중 하나라고요.”세화는 붙잡힌 손목을 조심스레 빼내고는, 발끝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언젠가는 들켜버릴 테니까요.”“부정 취업입니까? 왜 숨겼습니까?”“의학적으론 장애지만, 장애인 등록이 불가능한 유형입니다.”그래서 서류 첨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이력서에도 장애 여부를 기재하는 란은 없었지! 그래도 이건 아니.. 지? 아닌가? 그럴 수도 있나?“하지만... 자기소개서에라도 적을 걸. 면접을 볼 때라도 털어놓을걸. 내내 후회했어요. 내내 괴로웠어요. 그래서 입사 첫날, 팀장님께는 솔직하게 말씀드렸고요.”아, 마케팅 김민주 팀장은 알고 있었다? 근데도 아무런 보
주말 오후, 그들은 예정대로 춘천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영이가 준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오빠 덕분에, 늘 몰랐던 세상을 알게 돼.”“나야말로.”“고마워. 오빠.”“사랑해, 영아.”여전히 매 순간이 설렌다. 앞으로도 늘 설레고 싶었고. “내가 더.”“그럴 리가 없는데. 내 사랑이 더 큰데.”“그런 비교는 의미 없어.”오늘도 한 방 먹은 준호는 그저 실실 웃었다. 이미 ‘내가 더’라는 말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까. “가서 닭갈비도 먹고, 쇼핑도 하고, 남이섬도 가자.”“좋아.”***한편, 석현은 주말을 맞아 시장 구경에 나섰다. 도착하자마자 꽈배기 하나를 입에 물고 골목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구경만으로도 몇 시간은 보낼 수 있는 힐링의 장소. 세상에서 꽈배기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중, “어?”홍세화다. 분명 홍세화였다.칼국수 집 유리문 너머, 세화가 활짝 웃으며 서빙을 하고 있었다.“뭐지? 아르바이트?”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초봉이 적은 회사도 아닌데. 석현은 궁금증이 몰려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어서 오세요!”일 한번 되게 열심히 하네.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세화가 물과 물컵을 가져다주며 싱그럽게 물었다.“주문하시겠어요?”엥? 나를 못 알아보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굳이? 왜? “얼큰이 1인분이요.”“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나와요.”뭐냐고...! 왜 아는 척을 안 하냐고!“아빠! 얼큰이 하나!”주방 안을 빼꼼 바라보니, 부부로 보이는 두 분이 불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구나. 주말이라 도와드리러 온 거구나.착하네. 요즘 애들 같지 않네.팔짱을 끼고 칼국수를 기다렸다. 아니, 사실은 아는 척을 해주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한 칼국수와 반찬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맛있게 드세요!”그 말과 함께 세화는 자리를 떠났다. ?어
“뭐지?”“8... 88% 입니다!”놀라움이 담긴 말과 함께, 스크린 화면에는 단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좌측 상단을 보아하니, 회사 소유의 드론이 어젯밤 11시경. 찰나에 찍은 사진 같았다. 가로등 하나에 의존한 여자는 무언가를 품 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표정은 없었고 품 안에 끌어안은 건 얇은 책인지 종이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준호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88%.그 수치는 우연으로 넘길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지만, 화면 속의 여자는 분명
“누군지 물어봐도 되냐.” 넥사이드(Nexide)를 설립하고 딱 1년째 되던 날, 유일하게 믿는 친구이자 전무인 '강석현'이 처음으로 물었다. 솔직히 그동안 묻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전국 단위로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돌리며, 오직 한 사람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왜 이제서야 묻냐.”“중요한 사람인 건 충분히 알았고. 도대체 뭔데 이래.”잠시 숨을 고르던 준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죽겠는 사람.” “뭐...?”“넥사이드를 세운 유일한 이유.”그 말은 결코 농담이 아
- 똑, 똑. 현실로 정신을 되돌려 놓듯,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준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집무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 신태호가 들어섰다.오늘따라 시선이 어깨로 갔다. 견장 위에 반짝이는 별 세 개.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자꾸 말없이 오시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니까요.”“군에서나 그렇지 뭐. 여기 커피가 꽤 맛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테이블 위엔 헤이즐넛 향이 가득한 커피 두 잔이 놓였고, 태호가 커피향을 음미하
“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신준호!”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