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지?”
“8... 88% 입니다!”놀라움이 담긴 말과 함께, 스크린 화면에는 단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
좌측 상단을 보아하니, 회사 소유의 드론이 어젯밤 11시경. 찰나에 찍은 사진 같았다.
가로등 하나에 의존한 여자는 무언가를 품 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고 품 안에 끌어안은 건 얇은 책인지 종이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준호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88%.
그 수치는 우연으로 넘길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지만, 화면 속의 여자는 분명, 분명히 영이 같았다.
닮았다는 판단을 하기도 이전에, 온몸의 솜털이 먼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유영. 영아...”
넋을 잃은 듯한 준호의 모습에 팀원들은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석현이 대신해서 물었다.
“위치는.”
“수락산 고도 400미터 반경, 주택으로 보이는 건물 하나가 유일합니다.”모두의 시선이 지도에 고정됐다.
초록으로 뒤덮인 화면, 산의 능선, 그 아래 찍힌 점 하나는 누가 봐도 고립된 좌표였다.
“단독?”
“예. 근데 이상합니다.” “뭐가.” “등기상 소유주가 5년 전에 이민을 간 걸로 나타납니다. 근데 전입, 전출 내역이 없습니다.”준호가 곧바로 재킷을 집어 들었다.
“다들 퇴근해.”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던 순간, 석현이 유일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대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88%면 충분해.”나름 직원들 앞이라 신경 쓴 존댓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부터는 오직 친구로서 전할 대화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리고 너, 지금 그 손으로 운전대를 잡겠다고?”
이제야 내려다본 손은 마치 자신 것이 아닌 것처럼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걸 자각한 순간 떨림은 더 심해졌다. 꼭 심장이 손끝으로 쏠린 것처럼 맥이 튀었다.
“젠장.”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차 키 내놔.” “강석현.” “지금 네 행동이 음주 운전이랑 뭐가 달라? 그렇게 싫으면 기사라도 부르던가.” 결국 두 사람이 나란히 회의실을 나섰다.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준호는 한번 더 지도를 떠올렸다.
산, 집, 사라진 소유주. 그리고 표정 없는 얼굴.
웃지도, 울지도 않는 기억 속에서 언제나 같은 온도로 남아 있던 얼굴.
석현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혹시 아니어도 실망하지 마. 다시 찾으면 돼.”
“아니, 이번엔 맞아. 영이가 확실해.”그렇게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멀어질수록 준호의 머릿속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이번엔 틀릴 리가 없었다. 아니, 틀리면 안 됐다.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정작 마주했을 때 건넬 첫마디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토록 준비해온 사과부터? 아니면 말없이 꼭 안아줘야 하는 건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 위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되겠는데.”
석현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차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딱 여기까지였다.
고도 400미터. 그리 높지도 않은 목적지는 지금 이곳에서 걷는다면 딱 5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런데 그 5분이 지금까지의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밤공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산 특유의 냄새, 젖은 흙과 잎사귀, 그리고 쓸쓸하게 한 방향을 향해 나있는 좁은 흙길 하나.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니.”
“이상하지.” “많이.”산길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누군가 미리 설치한듯한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주택의 지붕이 보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주택.
다행히 불은 켜져 있었다. 그 불빛 하나를 보았을 뿐인데,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제 대문까지 정확히 다섯 걸음이 남았다.
문 너머에는 88% 확률로 살아있는 과거가 존재하고 있겠지.
석현이 준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근처 좀 살펴보고 있을게. 다행히 신호는 터지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고맙다.”손바닥에 밴 식은땀을 바지에 닦아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 딩동.
- 딩동, 딩동.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쪽이 밝아지더니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누군가 대문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작고 가벼웠다. 꼭 기억 속의 그 아이처럼.
- 딸깍.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 영이가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영이였다.
노트를 펼쳐둔 채, 영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꺼지라고 한 것도, 소름 끼친다고 한 것도. 오빠가 다 미안해.”너무 늦은 사과였다. 이제 와서 하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턱 막혀버릴 것 같았다.“앞으로는 자주 올게. 사과도 갖다 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마.”손가락이 꿈틀하고 움직였다.그 작은 반응 하나도 곱절에 곱절을 더한 것처럼 마음이 미어졌다.***아침 해가 떠오르고, 보람이의 목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엄마! 아빠! 오빠 미쳤나 봐!”그 소리에 잠에서 깬 준호는 곧바로 손을 뻗어 영이의 이마부터 짚어보았다.다행히 열은 내려가 있었고, 숨결도 고르게 안정돼 있었다. “열 내렸네. 다행이다.”평온은 잠시였다.아침 식사를 가지고 지하실을 내려왔던 보람이는 영이의 침대 옆에 웅크려 잠이 든 준호를 보고야 말았고, 그 사실은 이미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으니까. “신준호.”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단단했다. 준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어깨가 뻐근했다. 밤새도록 불편한 자세로 곁을 지켰다는 증거였다.“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열이 심해서요. 밤새 떨어지질 않아서요.”“그래서 간호를 했다? 신태호의 아들 신준호가?”어머니 역시 황급히 들이닥쳤다. “준호야! 너 제정신이니? 누가 너더러 간호 따위나 하라고 했어?”“언제는 도와주라면서요.”“이게 지금 도움이야? 어머, 저 물수건 좀 봐...”숙경은 베개 옆에 높인 물수건을 홱 채가듯 들어 올렸고, 태호의 시선은 준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지 마라. 경고다.”“예. 그러시겠죠.”“나가.”준호는 지하실을 나가며 다시 한번 영이를 바라보았다.이 난리 통에도 잠이 든 듯 보였지만, 그래도 열은 내렸으니까. 그 사실 하나로 발걸음을 뗐다. 계단을 올라오자 보람이가 소파에 앉아 준호를 노려보았다.“정신 나갔지? 열네 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 아니야?”“입
아니라는 말에 안도는 했지만, 그럼 내가 영이한테 한 행동은? 그동안 괜히 잘 해줬다. 괜히 정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지하실에 내려가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혼자만의 규칙은 마치 스스로를 지키는 행동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지켜진 건 영이의 고독이었다.영이는 지독한 고독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찾아와 미래를 묻는 이들을 마주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김혁도 의원은 늘 빈손이 아니었다. 사리사욕은 채우면서도 지하실에 갇힌 영이가 안쓰러웠는지, 빵이나 과자, 인기 있는 소설책을 사 오곤 했다.“그래서, 보좌관이 그런 통화를 했단 소리지?”“네. 의원님을 욕해요. 법인 카드 내역서를 복사해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어요.”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치우셔야겠습니다.”“믿을 인간이 이렇게 없어서 원.”“이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그저 필요에만 의한 존재. 영이는 그 모든 시간들을 견디며 배웠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같이 다르다. 그리고 누군가를 위한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문득문득, 어린 시절 준호와 대화를 놔두던 노트를 펼쳐보곤 했다. 연필로 쓴 글씨. 삐뚤어진 질문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오빠를 못 본 지 몇 개월이 지난 걸까. 6개월? 10개월? 아니면 1년? 한 번도 날짜를 센 적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그러다 오늘은 애태우던 마음이 정리가 됐다. “오빠는 이제 내가 미운 거야... 소름이 끼칠 만큼.”***며칠 뒤 저녁, 보람이의 목소리가 집 안을 갈랐다.“엄마! 유영 쟤 이상해!”주방에서 접시를 놓던 소리가 잠시 멈췄다.“뭐가 또.”“침대에 누워서 대답도 안 해. 땀이 엄청 나!”“내버려둬.”접시 소리는 다시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준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땀이 난다고?”“어.”“엄마.”“내버려두라니까?
준호가 웃었다. 영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딱딱하게 성 붙이는 걸 싫어하는구나.아, 성이라는 게 없던가? 상관없지 뭐.“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게. 영아.” 영이도 웃었다. 입꼬리가 아니라 눈이 먼저 풀렸다. 그 작은 반응이 준호의 가슴을 찔렀다.이 아이는 이름 하나에도 이렇게 조심스러운데. 너무도 조심스러워, 열두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문밖을 나서보는 아이.그동안 나는 뭘 했던가. 꽃향기 하나 맡게 해주지 못한 내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뿌듯해할 자격이 있을까.생각보다 기분이 별로였다. 웃음은 났지만 오래가지 않았다.***그날 밤, 가족들이 귀가하자마자 준호는 보람이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신보람, 제정신이냐?”“또 뭐?”“두 번 다신 영이 손에 장난질하지 마. 못돼 처먹어가지고.”잔뜩 날이 선 말에 보람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코앞까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왜? 이제 나 말고, 걔 오빠 노릇이라도 하게?”“안돼?”“근데 이상하지 않아? 가족도 아닌데 저렇게 키워주는 이유 말이야.”“개소리하지 말고,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보람이의 웃음은 아이답지 않은, 너무도 께름칙한 웃음이었다.“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유영 쟤. 아무래도 아빠 딸 같아.” “...뭐?”“잘 생각해 봐. 그러니까 엄마는 쟤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떨지.”“소설을 쓰세요. 소설을.”아무렇지 않은 척 방으로 돌아왔지만, 그 말이 머릿속을 자꾸만 헤집었다. 맞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처음부터 영이를 싫어했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늘 표정이, 분위기가 먼저 변했다. 혹시나 보람이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딸이라면..?더는 챙겨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다. 한참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고등학생. 보람이의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준호의 마음에 또렷하게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찾아왔고, 지하실에 내려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지하실에 영이
영이를 외면했던 시간이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엔 영이가 좋았다.지하실에 있는 비밀친구.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밀친구의 존재는 드러났지만, 갑갑한 지하실은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달라졌다.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아이, 다른 사람의 미래는 보지만 자신의 미래는 보지 못하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로 인해 어머니는 늘 힘들어하셨다. 부모님이 다투는 이유도 늘 그 아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오늘따라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나섰다. 아버지의 중장 진급을 축하한다며 친인척들이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 준호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따라나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늘도 영이 탓을 했다.“하여간 쓸데없는 기지배라니까. 우리 아들 아픈 것도 모르는 게.”“엄마, 왜 또 영이한테 그러세요.”“왜 너만 안 보이냐고 너만! 기분 나쁘고 께름칙해.”“됐어요. 그만 열 내시고 다녀오세요.”문이 닫히고 집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준호는 거리낌 없이 지하실로 향했다.사실 오늘은 영이를 데리고 바깥공기를 쐬게 해줄 요량이었다.“영아, 오빠랑 잠깐 나가자.”“안 돼요.”“아무도 없어. 정원에만 나갔다 오자. 딱 거기까지만.”영이의 손이 책 위에서 멈추던 순간, 평소와 다른 손가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을 넘어 살까지 덕지덕지 발린 색색의 매니큐어. 그 불쾌한 모습을 보자마자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신보람 짓이지.”“예쁘게 해준다고 했어요...”“네 눈에는 이게 예뻐 보여? 이 미친 기지배가 진짜.”보람이는 늘 그랬다. 어릴 때부터 영악했고, 영이의 위에서 군림했다. 눈치가 빤해 대놓고 괴롭히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못살게 굴었다. 머리카락을 잘라 놓은 적도, 베개 위에 껌을 붙여둔 적도 있었다. 열세 살인 아이에게 열다섯의 아이가 하는 못된 행동들. 심지어 누구 하나 그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 그게 가장 화가 나는 지
숨이 걸렸다. 손이 바르르 떨렸다.지금 당장 출발해도 최소 30분. 이 날씨에, 이 추위에 30분이나 밖에서 떨게 할 순 없었다. 경호원 새끼들은 뭘 하는 거지? 아니, 그 관리자 자식은 대체 뭘 하는 거지?생각이 엉키며 판단이 흐려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결국 핸드폰을 들었다.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그 아이 일이냐.”준호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신태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냈다.“네. 지금 영이가 테라스에 혼자 있어요. 아무래도 문이 열리질 않는 모양입니다.”귓가에 들리는 한숨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다 보고 있던 게야. 다 보고 있었어...”“빨리 영이부터요, 제발요……!”뚝, 전화가 끊겼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 문이 열렸다. 경호원은 바닥에 주저앉은 영이를 그대로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왜 안 부르셨습니까.”“설명하기 싫어서요.”“아시잖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죄송합니다…….”자꾸?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 소리야? 그때였다. CCTV 화면이 지직거리며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 접근 권한이 제한되었습니다.이제야 영이를 지켜보고 있던 걸 안 아버지가 손을 쓴 모양새였다.하지만 어림없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차단은 급했고, 그래서 허술했다. 접근 경로를 끊는 대신 로그를 지우는 데 집중한 흔적. 키보드 소리가 빨라질수록 한 줄, 두 줄. 경고 창이 깜빡였다.- 권한 복구 중…….급한 불은 껐지만, 지체하지 않았다.영이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걸 확인하고는, 그는 곧장 TF 팀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 문이 열리는 순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CCTV 해킹을 알아챘어. 지금부터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해.”“사용됐던 기록부터 전부 폐기하겠습니다.”“VPN부터 다시 따고, 나머지 인원은 이민 갔다는 소유주 연락처부터 확보해.”묵묵히 듣고 있던 석현이 키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호는 기가 막혔다.놀라지도 않는 영이의 태도는 물론 힘없이 화분을 놓아버린 그 손아귀는 이미 수없이 반복해 온 포기의 동작이었다.“마당 정도는 나가도 되잖아. 이 미친 새끼들아.”이번에는 영이의 발걸음이 서재로 향했다.책으로 가득한 공간, 책장에서 책 하나를 꺼내들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밥은 언제 먹어. 응? 배 안 고파?”당장 마이크를 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하지만 그건 영이가 싫어한다. 지금은 자신의 목소리조차 불편해한다.그래서 꾹 참고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책장이 몇 장 넘어갈 무렵, 손목에 걸린 스마트워치가 울렸다.눈살이 찌푸려졌다. 보나 마나 그 관리자라는 자식이겠지. “네.”“식사하셔야 합니다.”“네.”“지금요.”처음으로 저 개자식을 향해 고마운 감정이 들던 찰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영이가 터벅터벅 주방으로 향했다.그러고는 얼려둔 밥은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반찬 몇 가지를 꺼내 그릇 위에 담았다.계란말이, 콩자반, 김치. 그게 다였지만 뭐라도 먹는다는 사실 하나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따뜻하게 데워진 밥과 함께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드는 순간,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잘했어. 영아.”그리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네, 대표님.”“영이 식단 기록 파악해. 양, 시간, 패턴 전부 다.”“예. 바로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근데, 침실 CCTV는 접속이 불가능하던데. 뚫을까요?”미친, 그걸 왜 궁금해하고 지랄이야.“내가 막아둔 거야, 손 대지마.”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예상은 갔지만, 차마 볼 수가 없어 데이터를 저장해두곤 접근 권한은 막아두었다.만약, 저장된 파일 속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때는 정말 참지 못할것 같아서. 그것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아버지, 그 정도까지 바닥은 아니시잖아요. 아니셔야 할 겁니다.'그 사이, 영이는 느릿한 속도로 식사를 이어갔다. 밥 두 숟갈에 반찬 하나. 그리고 물 한 모금. 꼭 지시를 수행하는 모습 같았다.
- 똑, 똑. 현실로 정신을 되돌려 놓듯,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준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집무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 신태호가 들어섰다.오늘따라 시선이 어깨로 갔다. 견장 위에 반짝이는 별 세 개. 괜히 눈살이 찌푸려졌다.“자꾸 말없이 오시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니까요.”“군에서나 그렇지 뭐. 여기 커피가 꽤 맛있어.”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테이블 위엔 헤이즐넛 향이 가득한 커피 두 잔이 놓였고, 태호가 커피향을 음미하
“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신준호!”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