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영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영아! 아 아니, 유 비서!”“네.”생각해보니까 잘된 일 아닌가? 강석현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면, 누구보다 축복해 줄 일이지.“강석현 이 자식, 아무래도 홍세화 사원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도 엄~청.”“아까도 그럼 그래서...”“응. 웃기는 놈이네 진짜? 와...”다행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던 미안한 감정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잠깐 봤던 홍세화 사원은 작은 인형처럼 너무너무 앙증맞고 예뻤고 말이다.“다행이에요. 두 분이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암만 봐도 홍 사원이 아까운데.”“강 이사님도 빠지는 데 없어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셨잖아요. 게다가 능력은 좀 좋아요? 날고 기는 TF팀 리더신데요.”말이 끝나는 순간, 준호의 얼굴에 어둡고 칙칙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 비서?”“아..”헉, 큰일이다. 저 질투쟁이 앞에서 길고 긴 칭찬이 나와버렸다. 전생의 본인도 질투하는 남자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물론 대표님이 더 잘생기셨죠.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그래?”“네. 거짓 없는 진실임이 확실합니다.”“넓은 아량으로 믿어주겠어.”위기를 넘기고 나니, 멈칫. 잠깐만, 오빠도 이상하잖아? 왜 홍세화 사원이 더 아까워?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요상한 기분은 뭐고?“근데요 대표님.”“응.”“왜 홍세화 사원이 아깝다는 말을 하신 거예요? 그것도 강 이사님 친구시면서?”헉.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꽂혀버렸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물론 홍 사원이 아담하고, 새하얗고, 얼굴도 예쁘장하긴 했지만, 나만의 포켓걸은 유영이라고. 너뿐이라고. “장난이지. 장난.”“대표님 눈에도 예뻤나 보네요. 사람 보는 눈이 다 거기서 거기죠 뭐.”“아니야!”“네. 그러시겠죠.”아.... 이놈의 주둥아리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가지고. 괜한 말을 내뱉어서 영이만 또 삐쳤잖아.“유 비서.”“....”“어허, 유 비서!”“?
무언가가 떠오른 석현은 곧바로 준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벌컥!문이 열리고, “대표님! 좌랑스러운 넥솨이드의 신준호 대표님!”평소와 다른 시끄러운 등장에 준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뭐래.”“제가 말입니다! 주말에 엄청난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습니다!”“유 비서, 쟤 왜 저래?”영이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고, 석현은 준호의 코앞까지 다가와 말을 이었다.“혹시, 안면 인식 장애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아, 말투 뭐냐고. 하던 대로 하라고.”“들어보셨습니까?”“뭐? 안면 뭐시기가 어쩌고 어째?”“아오! 안면 인식 장애!”음.. 그러니까 말이지.. 주말에 다큐 멘터리를 봤는데, 그 주제가 안면 인식 장애였다고? 어쩌라고? 이 새끼가 또 이상하게 구네?“사람 얼굴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어. 내가 그걸 보면서 말이야. 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겨서. 넌 회사의 리더고, 수많은 직원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있잖아.”“뭔데. 말이 길다?”석현은 준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애써 무시한 채, 긴 숨을 내쉬었다.“오해하지 말고 들어.”“어.”“만~약에, 우리 회사에 안면 인식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입사를 했어. 넌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그럼 어떡할 거야? 자를 거야?”준호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정에 석현은 잔뜩 긴장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야! 홍세화 씨 안면 인식 장애래?”헉..! 어떻게 알았지? 신준호.. 너 혹시 천재야? 신 내림 받았어? 아니.. 벌써 들키면 안 되는데.. 이거 이거 큰일인데. “아니거든?”“맞잖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에서 파악 끝났어.”신준호가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지? 석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아닌 척 연기를 시전했다.“아닌데! 오해인데!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냐고! 자를 거냐고!”“우리 회사 슬로건이 뭐냐?”“기술은 차갑게! 방향은 따뜻하게!”“근데.”으응? 근데라니? 이해가 안 되는데? 슬로건은 왜 묻고 지랄인데?“돌려 말
집에 도착해서도 영이는 잠만 잤다. 내내 잤다.준호는 그런 영이를 깨우긴커녕, 어쩐 일로 노트북 앞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검색한 단어는, - 프로포즈 추천 / 감동적인 프로포즈 / 프로포즈 장소 대여 / 프로포즈 선물해봤어야 알지. 해봤어야. 그래도 조만간 영이의 손에 반지가 끼워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이 귀에 걸렸다. 동생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이 모든 과정을 겪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잿빛이었던 세상이 이토록 환해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여보~ 자기야~”“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혼잣말로 다가올 미래의 애칭을 연습하며 키득거렸다. 그조차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월요일 아침,똑똑.노크 소리가 들리고, 세화가 석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노란색 니트는 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병아리 새끼냐고. 아오.“안녕하세요 이사님.”“앉아요.”따뜻한 커피를 내려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세화는 희고 작은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감사합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세화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왜 부르신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화가 나신 것 같진 않는데, 그날도 분명 괜찮았는데.아무래도 중요한 사실을 속이고 입사했다는 사실에 눈동자는 갈 길을 잃었고, 목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갔다.“혹시.. 왜 보자고 하신 건지..”석현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 보였다.“전 이 시계를 가장 좋아합니다.”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스퀘어 모양 글라스에 가죽 스트랩 색상이 반반 달랐다. 블루와 그레이 조합, 조금은 튀는 스타일. 세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시, 시계는 왜....”“사원증도 맸습니다.”그제야 깨달았다.나를 위한 배려구나. 강석현 이사님은 좋은 사람이구나.“감사합니다. 이사님.”“궁금한 게 있는데.”“네. 말씀하세요.”“혹시, 선천적인 겁니까. 후천적인 겁니까.”“아, 처음부터요.”석현은 그 덤덤하고 짧은 대답에 멈칫했다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은 초 저녁의 수영장, 두 사람은 분위기를 만끽하며 서로를 품었다. “오빠, 아르기닌 그만 먹어.”“안 돼.”“힘들단 말이야. 요즘은 전보다 더한 것 같아.”우리 영이가 행복한 투정을 부리는구나? 미안한데, 그런 투정은 통하지 않아. “영아.”“응?”“오빠는 전생에 현묵이 아니라 짐승이었다니까.”“....”“본능에 충실한 짐승.”“하아....”영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맞다. 애교를 부릴 땐 영락없는 대형견인데, 본능에 충실할 때만큼은 정말로 사나워진다. 문제는 그 사나움에 자신 역시 물들고 있다는 것.호되게 당한 영이가 결심했다. 다음번의 주도권은 내가 갖겠노라고.***샤워를 마치고 나온 영이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인을 마신 탓에 알싸하게 취한 기분. 딱 기분 좋은 정도. “영아. 괜찮아?”준호는 득달같이 달려가 뺨부터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감이 꽤 뜨끈했다.“안 되겠다. 물 좀 마시고 자.”“괜찮아. 근데 오빠.”“응.”“얼른 자자.”피곤하구나. 오늘은 좀 피곤할 만해.이곳저곳 돌아다니기 바빴으니까. 여행은 늘 피곤한 법이니까. 아무런 의심 없이 침실로 향한 준호는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침대 앞에서 가운을 벗어낸 영이의 몸에는 세상 야릇한 속옷이 걸쳐져 있었다.그건, 영이가 한참을 고민하며 작접 고른 속옷이었고 실로 영이 답지 않았다. 세상 농염한 보라색 브래지어는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한 젖가슴을 위태롭게 받치고 있었고, 팬티는 입은 건지 만 건지 헷갈릴 정도로 천이 작았다.“영... 영.. 아. 그거 설마 T팬티야...?”“오빠, 지금부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준호의 가슴을 밀치고 침대에 눕힌 영이는, 자신있게 올라타서는 아랫도리를 비벼댔다.순식간에 뜨거워진 성기가 구멍 아래에 짓눌려 꺼떡거렸다.“너... 갑자기 왜....”“주도권은 나눠 갖는 거야.”결국 영이의 결심은 현실이 됐고, 처음으로 신준호가
“평일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오빠랑 놀고. 매일이 행복해.”행복을 표현하는 영이의 말에, 준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근데, 회사는 왜 그렇게 열심히 다녀? 아직도 재미있어?”“응. 오빠도 계속 볼 수 있잖아.”역시나 출근의 이유는 나 때문이었어! 다 나 때문이야! 준호는 영이가 이뻐죽겠다는 듯 볼을 부비고 손가락을 쪼물딱거리며 난리 법석을 피웠다. 영이 역시 싫지 않은지, 웃음을 흘렸다. “나, 월요병이 뭔지 이제 좀 알 것 같아.”“풉, 왜?”“벌써 토요일이 후딱 지나갔잖아.”“힘들면 회사 일 안 해도 돼. 오빠는 영이가 늘 편했으면 좋겠어.”“혼자 있으면 뭐해. 이제 혼자 있기 싫어.”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보냈던 영이는, 사실 준호가 퇴근하길 기다리던 시간조차 힘들었었다.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시계만 바라봤던 나날들. 지금은 오빠와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가장 좋았다. 회사에서 ‘유 비서’로 불린다는 것. 어엿한 월급 통장이 있다는 것. 모든 게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상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회사 정리하고 은퇴하면 이렇게 여행이나 다니자.”“아주 나중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하겠지?”“당연하지. 그때도 오빠는 영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을 거야.”“안 지키기만 해.”“약속.”미래는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끝까지 사랑할 거란 약속만큼은 자신 있었다. 정해진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유영이라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유영이라서.“맞다. 중장님은 괜찮으실까?”“좋은 이야기만 하자, 우리.”여행 중,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유전자센터 오기훈 원장은 검사 결과 조작에 대해 신태호의 지시였다고 진술해 버렸고, 그로 인해 조사를 받게 됐다고.하지만 소송을 취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잘못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한다는 게 준호의 생각이었다.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한들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사내 교육 기간이 끝나면, 팀원분들께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제 와 본인 입으로 직접 고백하겠다?홍세화, 넌 그 순간 타깃이 될 거야. 뛰어난 스펙에 얼굴까지 예쁜데. 물어뜯지 못해 안달일 텐데. “꼭 그래야겠습니까.”“네..?”“굳이 약점을 고백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그래야 당당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사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안면 인식 장애가 퇴사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고요.”아.. 뜯어말리고 싶은데 어떡하지. 신준호 이 자식이 확 잘라버리는 거 아니야? 아니야. 난 못된 친구를 사귀지 않았어. “임원들은 사원증을 착용하지 않습니다.”“아.....”“하지만 앞으론 빠짐없이 착용할 겁니다.”세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현을 바라보았다. 석현이 멈칫했다.눈 한번 되게 크네. 눈동자엔 렌즈를 낀 건가? 왜 저렇게 커? “이사님, 혹시 저 때문에..”“홍세화 씨.”“네.”“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내 방으로 오세요.”“네..?”“그럼 그날 봅시다.”석현이 자리를 떠나고, 세화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당장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까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두려웠는데. 곧바로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의 손부터 붙잡았다.“엄마, 놀랐지? 회사 이사님인데, 솔직하게 다 말씀드렸어.”“뭐라셔? 응...?”“좋은 분이셔. 나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얼마나 고생하면서 준비했는데... 엄마는 또 무슨 일이 생기나 해서..”“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포기 안 해.”석현의 시장 구경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차에 올라타 한동안 시동을 걸지 못했다. 핸드폰으로 안면인식 장애를 검색하기 바빴으니까. 선천적인가? 아니면 머리를 다쳤던 적이 있었던 건가? 치료는.. 불가능 한 건가. 그래도 생글생글, 참 밝게도 자랐네. 부모님도 인상은 참 좋아 보이시던데.맞다. 그럼 앞으로는... 내가 강석현이라는 걸 뭘로
“유영! 영아...!” 정신없이 집안을 헤집었다. 열려 있던 방문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하실을 들락거린지 삼십여 분.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영아..!”얼마나 애타게 불렀는지, 목이 잔뜩 쉬어가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헐겁게 풀렸고, 거실 슬리퍼는 한쪽만이 위태롭게 발을 감쌌다. 그때였다.“신준호!”어머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집안을 갈랐다.숙경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들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은 소리가 없다기보단 억눌린 공간 같았다.벽과 바닥에 스며든 습기, 낮은 천장,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는 공기.먼지 쌓인 테이블 위, 아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담요 사이로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작았다. 모든 게 너무 작고 여려서 이런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되짚었다. 6개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정리하기에 가장 안전한 기간.그때,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형광등 불빛에
몇 시간 전, 하늘이 유독 흐렸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낮게 가라앉은 아침이었다.번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신태호’의 어깨엔 오늘도 반짝이는 은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1성 장군(將軍), 준장을 의미하는 별.그의 아내 ‘이숙경’이 견장 위를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손길엔 오래된 습관 같은 온도가 섞여 있었다.“여보,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오실 거죠?”“응.”숙경은 더 묻지 않겠다는 듯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익숙한 루틴이었다. 태호가 익숙한 듯 현관문을 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중, 침대 옆에 높인 협탁. 그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았다. 안에는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담긴 핸드폰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충전기는 연결되어 있었고, 화면은 어두웠다. 문제는 상자에 보란 듯이 채워진 자물쇠였다. 외부와의 소통을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버린 방식임이 분명했다.“아....”그래서 스마트워치를 채운 거였구나. 그저 수신되는 전화만 받게 하려고.전화가 오면 지시를 듣고, 그 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세상에서 완벽하게 고립시킨 거였다.준호는 다시 한번 영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