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034화. 나는 아무것도 못 받았어“우리 이제 옛날 얘기 좀 하자.”그 말이 떨어진 뒤에도 한태겸은 움직이지 않았다.거실 불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컵도, 술도, 먹다 남은 것도.핑계 삼아 손댈 게 하나도 없었다.나는 소파 끝에 앉아 있었고, 태겸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거리는 충분했다.일어나려면 일어날 수 있었다.현관도 보였다.문은 잠겨 있었지만 비밀번호는 내가 알고 있었다.태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피하고 싶었다.“뭐부터.”내가 먼저 물었다.태겸은 잠깐 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몸이 순간 굳었다.그런데 그는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책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얇은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다시 돌아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봉투가 밀리며 마른 소리를 냈다.“이게 뭐야.”“봐.”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네가 설명해.”“싫으면 안 봐도 돼.”그 말이 오늘따라 더 거슬렸다.“보여주려고 꺼냈으면 보여줘.”태겸이 봉투를 열었다.종이 몇 장이 나왔다.맨 위에 찍힌 학교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식었다.기억보다 먼저 몸이 알아봤다.교표.행정 문서 특유의 회색 글씨.
033화. 우리 이제 옛날 얘기하자나는 한숨을 쉬었다.“그렇게 바로 듣지 말라고.”“그건 아직 어렵네.”결국 웃음이 나왔다.짧게.태겸도 따라 웃었다.배달 도착 알림이 울렸다.긴장이 조금 풀렸다.* * *밥을 먹고 나서 나는 설거지를 했다.이번에는 태겸이 말리지 않았다.대신 옆에서 닦았다.아침이랑 똑같았다.접시가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마지막 컵을 씻어 건넸다.태겸이 받아서 위쪽 선반에 넣었다.“오늘 방 봤어?”그가 물었다.“응.”“어때.”“더 걸린대.”“얼마나.”“길면 이 주.”태겸의 손이 선반 앞에서 멈췄다.“괜찮아?”질문이 짧았다.나는 물기를 털었다.“뭐가.”“여기 더 있어야 하잖아.”그 말에서 이상하게 가슴이 한번 내려앉았다.더 있어야 한다.부담스럽냐는 뜻인가.나는 얼굴을 굳혔다.“싫으면 나가면 돼.”태겸이 바로 나를 봤다.“그 뜻이 아니야.”“그럼.”“네가 괜찮냐고.”“나?”“응.”태겸은 컵을 내려놓았다.“기간 늘어난 게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032화. 여기가 편해누가 뭘 크게 해줘서가 아니라,다음 끼니를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그게 더 이상했다.* * *오후 다섯 시쯤 공사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이안 씨.”“네.”“잠깐 여기 보실래요?”내 방 앞이었다.비닐이 걷혀 있었다.천장 일부가 뜯겨 있었다.안쪽 목재가 검게 젖어 있었다.“생각보다 심하네요.”담당자가 말했다.“원래 일주일 정도라고 했죠?”“네. 근데 이건 좀 더 봐야겠습니다.”“얼마나요.”“열흘?”나는 가만히 있었다.“길면 이 주까지 갈 수도 있어요.”이 주.내가 생각한 것보다 길었다.“그렇게 오래요?”“건조가 제일 문제라서요.”담당자는 미안한 얼굴이었다.“숙소 괜찮으세요?”나는 바로 대답했다.“네.”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그게 이상했다.며칠 전에는 같은 질문에 입부터 거짓말이 나왔는데.지금은 아니었다.“괜찮아요.”말하고 나니 정말 조금 괜찮아졌다.* * *저녁 일곱 시 반.태겸 집으로 돌아왔다.비밀번호를 눌렀다.삐삐삐.잠금이 풀렸다.문을 열었다.집 안은 어두웠다.“한태겸?”대답이 없었다.아직 안 왔나.나는 신발을 벗었다.문을 닫았다.자동으로 잠겼다.이번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주방으로 갔다.냉장고를 열었다.물.계란.김치.맥주.생수.별거 없었다.저녁은 뭐 먹지.생각하다가 내가 왜 고민하는지 멈칫했다.태겸 오면 같이 먹기로 했다.나는 냉장고를 닫았다.소파에 앉았다.휴대폰을 확인했다.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회의 좀 길어져.][아홉 시 전에는 갈게.]나는 답장을 썼다.[밥은.]보내고 나서 웃음이 났다.또 이러고 있다.바로 답이 왔다.[같이 먹자며.]나는 화면을 봤다.[그러니까 굶지 말라고.][알겠어.][먹지 마.]쓰다가 멈췄다.먹지 마?굶지 말라고 해놓고.문장을 지웠다.[늦으면 먼저 뭐라도 먹어.]보냈다.잠깐 뒤.[너도.]나는 휴대폰을 내려놨다.거실이 조용했다
031화. 우리 이제 옛날 얘기 좀 하자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잠깐 어디인지 몰랐다.성당 방 천장은 오래돼서 군데군데 색이 달랐고, 빗소리가 심한 날이면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여긴 아니었다.깨끗한 흰 천장.얇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문밖에서 아주 작게 들리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그리고,한태겸에 집.그제야 기억이 돌아왔다.나는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문은 잠그지 않았다.밤중에 몇 번 깼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문손잡이를 확인하지 않았다.그게 제일 이상했다.휴대폰을 봤다.일곱 시 십이 분.메시지는 없었다.같은 집에 있으니까 당연했다.그 당연한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대충 묶었다.문을 열었다.거실은 조용했다.태겸은 주방에 있었다.셔츠 차림이 아니라 검은 반팔 티셔츠에 편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회사 밖에서 보는 모습이 아직 낯설었다.등이 넓었다.프라이팬을 들 때 팔이 움직이고, 티셔츠 소매가 조금 당겼다.딱 거기까지만 보고 시선을 돌렸다.“일어났어?”“응.”“잘 잤어?”“그럭저럭.”태겸이 접시를 하나 내밀었다.계란이랑 토스트.“먹어.”“네가 했어?”“응.”“요리하네.”“이 정도는.”나는 식탁에 앉았다.접시를 봤다.별거 없었다.그런데 성당에서는 아침을 이렇게 앉아서 먹는 날이 많지 않았다.대충 빵 하나.커피.남은 음식.누가 먼저 챙겨주지 않으면 그냥 넘기는 날도 있었다.“너는?”“같이 먹으려고.”태겸이 맞은편에 앉았다.“회사 안 가?”“오늘 반차.”나는 포크를 멈췄다.“왜.”“오전에 집에 있을 일이 있어서.”“뭔 일.”“택배.”“구라.”태겸이 웃었다.“나 때문에?”“조금.”나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하지 마.”“뭘.”“나 때문에 회사 일정 바꾸는 거.”“내 연차 내가 쓰는 건데.”“그래도.”“그럼 다음부터는 말하고 쓸게.”“그게 문제가 아니잖아.”태겸이 토스트를 한 입 먹었다.“싫어
030화. 문 닫아“닫아.”그가 잠깐 멈췄다.“괜찮아?”“응.”태겸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이번에는 잠금 소리가 나도 몸이 굳지 않았다.이상했다.문은 똑같이 잠겼는데.이번에는 내가 닫으라고 했다.* * *태겸은 바로 방을 보여줬다.작은 방이었다.침대.책상.옷장.새 침구.정말 빨아놓은 모양이었다.“여기 써.”“네가 원래 쓰던 방 아니야?”“손님방.”“손님이 와?”“거의 안 와.”“그럼 왜 있어.”“집에 방이 두 개니까.”나는 침대를 손으로 눌러봤다.깨끗했다.“화장실은 저쪽.”태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수건은 안쪽장.”“응.”“냉장고는 아무거나 먹어.”“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럼 그래.”“세탁기는?”“베란다.”“쓰는 법은.”“똑같아.”“비번은.”“와이파이?”“응.”태겸이 알려줬다.나는 휴대폰에 입력했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했다.며칠 전만 해도 성당 복도에서 밥 먹자고 하던 사이였다.지금은 그의 집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넣고 있었다.“그리고.”태겸이 말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내 방은 저기.”거실 건너편 문.“문 닫혀 있으면 노크해.”“당연하지.”“너도 닫아도 돼.”“알아.”“잠가도 되고.”“그 말 몇 번 하냐.”태겸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가방을 침대 옆에 놓았다.“한태겸.”“응.”“나 진짜 며칠만 있을 거야.”“알아.”“그리고 돈은.”“안 받아.”“그건 싫어.”“왜.”“신세 지는 거 싫어.”“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나는 경계했다.“뭘.”태겸은 잠깐 생각했다.“밥 같이 먹기.”“그게 뭔 대가야.”“내가 혼자 먹는 거 싫어해서.”거짓말 같았다.그런데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없어.”“진짜?”“응.”“청소라도 할게.”“하지 마.”“왜.”“손님한테 청소시키기 싫어.”“나 손님 아니잖아.”말이 먼저 나왔다.태겸이 멈췄다.나도 멈췄다.방 안이 조용해졌다.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그럼 뭐야?”
029화. 오늘 갈게가격은 내가 굳이 볼 필요 없었다.닫았다.채팅창을 열었다.[가는 중.]보냈다.[응.][몇 정거장 남았어?][여섯.][알겠어.]그게 끝이었다.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예전 같았으면 한태겸이 이렇게 차분한 게 더 불편했을 것이다.지금은 아니었다.오히려 그게 편했다.다가오지 않는 거리.내가 가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그게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갔다.나는 손잡이를 잡았다.열두 해 전에는 한태겸이 나를 보면 피했다.복도에서도.교실에서도.계단에서도.이제는 반대였다.내가 그 사람 집으로 가고 있었다.그 생각에 입 안이 썼다.복수하겠다는 말도 안 했고.용서했다는 말도 안 했고.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그런데 나는 가고 있었다.이게 제일 이해가 안 됐다.* * *역에서 내려 주소를 따라 걸었다.비는 오지 않았다.공기가 조금 축축했다.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정문 앞이야?]나는 주변을 봤다.[응.][거기 있어.][왜.]답은 없었다.몇 분 뒤,한태겸이 뛰지는 않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회사에서 막 온 모양이었다.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넥타이는 없었다.평소보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나를 보자 걸음이 느려졌다.“왔네.”“주소 보내놓고 왜 놀라.”“안 놀랐어.”“표정이 그런데.”태겸은 내 가방을 봤다.“그게 다야?”“응.”“진짜?”“왜. 거지 같아?”“아니.”그가 바로 대답했다.“가볍겠네.”손을 뻗으려다 멈췄다.“들어줄까?”나는 가방 손잡이를 내려다봤다.“됐어.”“알겠어.”태겸은 손을 내렸다.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나는 몇 걸음 걷다가 가방을 그쪽으로 밀었다.“아니.”태겸이 나를 봤다.“들어.”“괜찮아?”“무거워서가 아니라.”“그럼?”“그냥 들고 싶다며.”태겸은 잠깐 웃었다.“응.”이번에는 내가 손을 놓자 그가 가방을 받았다.가방 하나.그게 전부였다.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