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네 피를 저 돌 위에 떨어뜨려라.”폭군의 서늘한 검날이 레일라의 하얀 손가락 끝을 지그시 눌러왔다.수백 명 귀족들이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단상을 주시하고 있었다.“왜 망설이느냐, 요망한 계집아!”유리 파편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황태후가 비명을 질렀다.“가짜라는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 떠는 꼴을 보아라!”“닥쳐라.”칼릭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황태후는 물러서지 않고 귀족들 쪽으로 감별석을 들어 보였다.“진짜 공녀라면 한 방울로 끝낼 일을 왜 못 하겠느냐!”“피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인정하겠소!”가면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레일라는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조금 전 칙령을 받들겠다며 무릎을 꿇었던 자리였다. 황제의 위협이 멎자 그들은 다시 조건을 붙였다.레일라는 칼릭스를 향해 턱을 들었다.“폐하께서 제 결백을 증명하길 원하십니까?”“원한다.”“손가락을 베면 제 말도 들어주시겠습니까?”“저들의 의심부터 잠재우면 된다.”“폐하께 남은 의심은요.”칼릭스가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가면을 쓴 제국 귀족 수백 명이 늘어서 있었다.가면 뒤로 번뜩이는 눈빛들은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오늘 그 계집에게 에스테르의 영지를 넘긴다더군.”“이미 칙령이 나왔소. 반환 명부에 서명하라고 사람이 찾아왔더이다.”“명을 받드는 것과 핏줄을 인정하는 것은 다르지. 침소 시녀를 황후로까지 세우겠다니.”“목소리를 낮추시오. 기병대가 듣겠소.”가면 뒤의 속삭임이 흑랑 기병대가 다가서자 끊겼다. 내주어야 할 땅과 다가올 국혼을 따지던 귀족들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뿌우우-!황실 황금 나팔 소리가 홀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제국의 태양이시자 룩센베르크의 지배자, 칼릭스 폰 룩센베르크 황제 폐하와 에스테르 공작위의 대권 계승자, 레일라 에스테르 공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육중한 황금문이 활짝 열렸다.칼릭스가 레일라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은 채 옥좌 단상에 올랐다.스릉-!칼릭스가 칼자루를 툭 치며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들으라, 제국의 귀족들이여.”칼릭스의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귀족들의 숨통을 틀어쥐었다.“오늘 밤 에스테르 가문의 명예를 모욕하는 자는, 이 자리
“간밤에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지?”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칼릭스의 질문은 방금 발렌에게 내린 명령보다 더 앞선 밤을 향해 있었다. 소매 안의 수정구가 손목에 닿았다.그가 팔을 풀고 앞으로 돌아서자 레일라는 주최권 패가 놓인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폐하.”“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뽑아 든 검으로 발치의 대리석을 툭 건드렸다.“밤에 통신을 나눈 자가 누구냐?”“연회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 사람입니다.”“짐을 위한 자?”칼릭스의 눈매가 잔인하게 찌푸려졌다.“감히 짐의 침실에서 외간 사내와 전음을 나누고도, 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대는 것이냐?”“둘러대는 것이 아닙니다.”레일라는 망설임 없이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열릴 피의 가면무도회, 그 연회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무도회의 안전이라?”“에스테르 가문의 옛 충복들을 통해 황도 외곽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불순 세력이라니? 대체 누구를 뜻하는 것이냐?”“황태후의 잔당들과 헤센 가문의 음모가 황궁 내부로 스며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잔당들이 감히 내 궁전을 넘본단 말이냐?”“그들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내 기병대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그래서 발렌 경을 불렀습니다. 본대가 나가면 들킬 테니 별동대만 보내달라고 했고요.”칼릭스가 탁자 위의 패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폐하께서 연회의 경호도 물어보라 하셨잖습니까. 제 손에 맡기신 일을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래서 짐보다 먼저 명을 내렸다?”“지금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발렌 경이 돌아오면 제가 들은 말이 맞았는지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정녕 그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제가 가져온 첩보부터 확인해 주십시오.”레일라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대신, 반지가 보이도록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발렌 경
- 공녀님! 지금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바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감별석이 황태후 쪽으로 넘어간 것은 확실한가요?”- 수장고에서 사라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내일 밤 연회에 들여오려 합니다.레일라는 잠든 칼릭스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돌에 피를 떨어뜨리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을 본 뒤 그가 무엇을 물을지가 두려웠다.“핏줄이 확인되면, 원수의 딸이 왜 정인 행세를 했느냐고 묻겠군요.”- 돌이 공녀님의 마음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물음을 황태후가 먼저 꺼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다면 감별석만 되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내일 밤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흑랑 기병대의 눈을 피해 탈출하셔야 합니다!“도망칠 수는 없어요, 바론 경.”- 공녀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잊으셨습니까?”레일라는 검붉은 흑요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저를 감시하는 군사들이 붙어 있어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붙을 겁니다.”- 하오나 무도회에서는 공녀님이 설명하시기도 전에 황태후가 복수를 들먹일 것입니다!“그렇다면 도착하기 전에 가로채야죠.”- 가로채다니요? 암살대를 어찌 막는단 말씀입니까!“감별석의 이동 경로는 파악되었습니까?”- 서부 외곽의 버려진 풍차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황태후궁의 비밀 안전가옥이로군요.”- 예! 놈들은 그곳에 감별석을 숨겨두고 무도회 당일 들여올 계획입니다!“그렇다면 아직 황궁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겠네요.”- 하오나 저희 가문 잔당들만으로는 그림자 까마귀의 정예를 뚫기 어렵습니다!“우리가 직접 뚫을 필요는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칼릭스가 제게 쥐여준 칼을 쓸 겁니다.”레일라의 시선이 협탁 위의 주최권 패로 향했다.‘피의 가면무도회’ 최고 주최권 패, 그리고 검지의 흑요석 반지.“제국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면 돼요.”- 설마…… 황제의 친위대를 움직이시
칼릭스가 벽에서 뽑아낸 검을 틀었다. 날이 발렌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가 레일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발렌.”“폐, 폐하……!”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감히 짐의 정인을 붙들어 몸을 수색하려 했느냐?”“소, 송구하옵니다! 신은 다만 어의실 주변을 배회하는 자를……!”“그것이 네 혓바닥을 놀릴 이유가 된다 생각하느냐?”“살려주시옵소서! 국법에 따라 비상 경계령을 수행 중이었을 뿐입니다!”“짐의 말이 곧 국법이며, 내 정인의 발걸음이 곧 법도다.”칼릭스가 발렌의 이마를 장검 끝으로 지그시 짓눌렀다.“누가 네게 그따위 권한을 주었지? 헤센의 잔당이냐, 아니면 토옥의 황태후냐?”“아니옵니다! 오직 황실의 안위를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소매에 손을 대겠다고 했느냐. 다음에는 네 팔이 먼저 잘릴 것이다.”발렌이 이마를 바닥에 댔다. 레일라는 목덜미에서 흐른 피를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망각초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내 정인이 약을 찾으면 어의에게 전해라. 네 판단으로 붙들지 말고.”칼릭스가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가자, 레일라. 이런 버러지들과 섞여 있을 곳이 아니다.”“……예, 폐하.”레일라는 숨을 죽인 채 칼릭스의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겼다.***깊은 밤, 황제의 침전.무거운 황금문이 닫히자, 칼릭스는 레일라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손이 얼음장 같구나. 왜 이리 차가운 것이냐?”칼릭스가 레일라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며 입김을 불어넣었다.“침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발렌 때문에 아직 놀란 것이냐?”“……폐하.”“왜 짐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어의실로 향했지?”“그것은…….”“짐의 두통 때문에 탕약을 구하러 갔던 것이 아니더냐?”“……예?”레일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칼릭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레일라의 뺨을 쓸어내렸다.“어의
“북부 요새의 반란군 잔당 3,000명을 전원 효수하라.”황금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냉혹한 칙명.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단장들을 내려다보았다.“항복을 청하는 자들의 목숨을 구걸하러 왔느냐, 군단장?”“폐하, 북부 귀족 300가문이 무기를 버리고 자비를 청하고 있나이다!”“자비?”칼릭스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반역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다.”“폐하, 그들을 모두 베어내면 북부 국경의 방벽을 지탱할 영주들이……!”“입 닥쳐라! 짐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라 일렀을 텐데.”“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투항한 자들도 예외는 없다. 주모자의 목은 성벽에 걸고, 가담한 귀족들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하여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시켜라.”“존명! 황제 폐하의 영을 받들겠나이다!”붉은 망토를 두른 군단장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장막 뒤의 레일라는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만졌다. 간밤에 제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투항한 자들의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어의가 말한 정제 완료까지 이틀이었다. 레일라는 바닥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군단장들을 보았다. 약을 늦추려다 발각되면 자신뿐 아니라 조제실 사람들에게도 저 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무엇을 건드려도 남의 목숨과 닿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정오가 지나 정무가 잦아든 시각.레일라는 영지 문서를 살피러 가겠다고 말하고 침전을 나왔다. 어의실로 길을 바꾼 뒤에는 황제의 두통에 쓸 차를 구하러 왔다고 했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확인하고 물러섰다.반지가 모든 질문까지 막아주지는 않았다. 뒤에서 출입 시각을 적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못 들은 척 지하 조제실로 내려갔다. 어의들이 약재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틈에, 청동 약탕관 곁의 조제 일지를 펼쳤다.- 1차 배합: 정화초 추출액 완료.- 2차 배합: 빙령수 증류 완료.- 최종 단계: 이틀 뒤 정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