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C-04요? 계속 같은 사람입니다.”
윤 비서의 대답은 짧았다.
서경은 전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정산표를 넘겼다. 오전에는 시우가 출근했고, 오후에는 윤 비서가 서류를 가지러 올 예정이었다. 그 전에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수령인 이름이 붙어 있어서요. 번호가 바뀐 건가 했어요.”
“담당 직원이 바뀌면서 원본 첨부를 했나 봅니다. 금액만 맞춰놓으시면 됩니다.”
“과거 자료도 다 같은 번호로 찾으면 되죠?”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멎었다.
“대표님께서 과거 자료까지 정리하라고 하셨습니까?”
서경은 펼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얼른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혼나지 않으려면, 언제나 그렇게 대답하는 게 빨랐다.
“후원 사례집에 쓸 자료를 골라두래요. 제 치료비도 같이 들어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건 대표님이 선별해서 주실 겁니다. 우선 지난 분기만 정리해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통화가 끝나자 서경은 기록하던 펜을 내려놓았다. 계속 같은 사람. 잘못 끼워진 서류라는 기대가 하나 사라졌다.
서경은 블루 펍을 검색했다. 확인서의 번호가 가게 번호와 같았다. 지도에는 차로 갈 수 있는 거리가 떴다.
기사를 데리고 가면 시우에게도 전해진다. 채린에게 먼저 전화하면, 그 여자가 시우에게 알릴지도 몰랐다.
서경은 지도를 닫았다. 지갑 안의 태주 명함도 그대로 두었다. 시우와 같은 식탁에 앉았던 남자에게 맡기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먼저 어머니의 요양병원에 전화했다. 내일 오후 2시 면회를 확인하고, 진료 설명을 자신이 직접 들을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가 요즘 직접 들은 게 별로 없어서요.”
직원은 왜 몰랐느냐고 묻지 않았다. 조금 일찍 오면 담당 간호사와 연결해보겠다고 했다.
서경은 내일 가져갈 옷을 꺼냈다. 서랍 안쪽에서 오래된 악보집이 함께 딸려 나왔다.
마지막으로 연습하던 날의 표시가 남아 있었다. 활이 두 번 바닥에 떨어졌고, 세 번째로 주우려 할 때 시우가 케이스에 넣었다.
너 자신을 그만 괴롭혀.
그 말을 고마워했었다. 그만해도 된다는 허락이 필요해서. 서경은 동그라미 쳐진 마디를 엄지로 덮고 책을 넣었다.
오후 3시, 윤 비서가 도착했다.
그는 봉투를 받아 바로 서류 수를 세었다. 서경은 맞은편에서 빈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관리번호 순서로 정리하셨네요.”
“날짜순하고 번호순 중에 보시기 편한 걸로 했어요.”
“수령 확인서는요?”
“해당 번호 뒤에 붙였어요.”
윤 비서가 그 장을 펼쳤다. 김채린의 이름을 확인하자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서경은 그 멈춤을 보았다.
“틀린 거 있어요?”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윤 비서가 봉투를 닫는 동안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서경은 찻잔을 내려놓는 손으로 화면을 덮었다. 손바닥 밑에 김채린의 서명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나가자마자 현관문에 등을 붙였다. 문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통화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책상에는 봉투를 놓았던 자국만 남았다. 확인서를 돌려달라고 해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서경은 방문을 닫고 가게 번호를 눌렀다. 통화 버튼에서 손을 떼자 취소할 시간이 지나갔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블루 펍입니다. 예약이세요?”
낮고 조금 쉰 목소리였다. 오래전과 달랐지만 문장 끝에서 올라가는 억양은 남아 있었다.
“김채린 씨인가요?”
“누구신데요?”
“매달 받으시는 생활지원금 때문에요.”
대답이 끊겼다. 서경은 책상 밑에서 발바닥을 바닥에 눌렀다.
“무슨 생활지원금.”
“500만 원이요.”
“윤 비서예요? 담당자가 또 바뀌었어?”
서경의 입이 말랐다. 윤 비서의 이름이 채린의 입에서 나왔다. 불과 조금 전까지 자기 집에 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수령 확인서에 연락처가 있어서 전화했어요.”
“이번 달에도 서명해서 보냈잖아요. 더 뭘 확인해요?”
“왜 받는 돈인지요.”
“뭐?”
서경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 한서경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의자가 끌렸다. 채린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장난하지 마.”
“내 이름 잊지는 않았네.”
“너 지금 누구하고 같이 있어?”
서경의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반가움도 미안함도 아닌 첫 질문이었다.
“혼자야.”
“강시우가 시켰어? 나 시험하는 거야?”
“왜 시우 씨가 널 시험해야 하는데?”
채린이 욕을 낮게 내뱉었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누군가 가게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너 이 번호 누구한테 받았어.”
“네가 서명한 종이에서 봤어. 채린아, 만나서 얘기해.”
“싫어.”
“나도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그런데 이건 들어야겠어.”
채린은 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것이 서경에게 남은 유일한 단서였다.
“내일 어머니 병원에 가. 병원 옆 카페로 와. 네 가게에는 안 갈 거야.”
“내가 거길 왜 가.”
“안 오면 시우 씨한테 직접 물을 수밖에 없어.”
말을 끝낸 서경의 손이 떨렸다.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채린에게는 그 말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긴 침묵 뒤에 채린이 물었다.
“몇 시.”
“오후 3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 그 새끼한테.”
전화가 끊겼다.
서경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귀에는 아직 채린이 시우를 부르던 말이 남아 있었다.
그 새끼.
서경은 내일 면회 때 가져갈 가방에 회색 카디건을 넣었다. 지갑 안의 명함이 빠지지 않았는지도 확인했다.
지갑을 닫으려는데 채린에게 메시지가 왔다.
[혼자 와. 강시우한테 말하면 안 나가.]
서경은 오후 3시를 달력에 적으려다 멈췄다. 시우도 보는 일정표였다.
병원 면회만 남겨두고, 채린의 메시지는 알림에서 지웠다. 내일 한 시간을 숨길 수 있어야 했다.
***
다음날, 어머니는 짧게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뒤에도 잘랐어?”
“응. 뒤에도.”
“너무 짧다.”
“금방 자라. 엄마 목에 안 닿고 시원하잖아.”
서경은 어머니 옷깃에서 잘린 머리카락을 떼었다. 어머니가 거울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너는 왜 그래.”
“내가 왜?”
“뭘 안 먹었어.”
콩쿠르를 마치고 나오면 어머니는 결과보다 그것부터 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배가 고파져 냉면 한 그릇을 다 먹었었다.
서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은 물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울 것 같았다.
“끝나고 먹을 거야.”
“나 끝났어. 가서 먹어.”
어머니가 등을 밀었다. 밀어내는 손에는 힘이 거의 없었다. 서경은 그 손을 잡고 잠깐 앉아 있었다.
진료에 관해 들을 말은 따로 적어왔다. 꾸준히 살펴야 할 것들, 다음 진료 때 확인할 내용들. 간호사는 보호자 연락처도 다시 확인했다. 서경은 직원에게 자기 번호로 먼저 전화해달라고 부탁했다.
시우의 이름을 지우지는 않았다. 아직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 다음에는 내가 더 오래 있을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서경은 문밖에서 기사를 만났다. 근처 카페에서 학교 친구를 만나겠다고 하자 기사는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정도면 되실까요?”
“네. 말씀드린 4시에 여기서 뵐게요.”
처음으로 미리 약속한 일처럼 말했다. 기사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서경은 돌아서서 천천히 걸었다. 뛰고 싶었지만 뛰지 않았다.
***
오후 3시, 김채린은 카페에 먼저 와 있었다.
서경이 문을 열자 채린은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았다. 닳은 구두 끝이 테이블 밑에서 돌아갔다. 도망갈지 남을지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혼자 왔네.”
채린이 먼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서경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같이 올 사람이 있어야 해?”
“전화에서 그렇게 말했어도 못 믿지.”
서경은 출입문이 보이는 맞은편에 앉았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는 소리, 커피를 갈아내는 소리, 옆 테이블의 작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이런 곳에서 만나길 잘했다.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네가 쓴 거 맞지?”
채린은 화면을 보고 눈을 돌렸다.
“네.”
순간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채린도 그것이 우스웠는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내가 썼어. 돈 받은 것도 맞고.”
“왜 받는데?”
“생활비.”
“시우 씨가 네 생활비를 왜 줘?”
“나도 알아야 돼? 주면 받는 거지.”
서경은 휴대전화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 사람한테 물을게.”
“야.”
채린의 손이 테이블 위로 뻗어왔다. 서경이 뒤로 물러나자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두 사람은 잠깐 그 손을 보았다.
채린이 먼저 거두었다.
“건드릴 생각 없어. 앉아.”
서경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오래전에는 이 여자 앞에서 손을 감출 곳이 없었다. 지금은 테이블 아래로 제 손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받았어?”
“졸업할 무렵부터.”
“왜.”
“옛날 얘기 안 하는 조건으로.”
커피 기계가 멎었다. 갑자기 채린의 말이 주변에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았다.
“무슨 옛날 얘기.”
채린은 종이컵 가장자리를 뜯었다.
“너도 짐작하고 온 거잖아.”
“짐작 말고. 네가 말해.”
채린의 입가에 습관적인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그날 병원에서 나한테 무릎 꿇으라고 한 거 기억나지?”
서경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네 앞에서 뺨 때린 것도. 나 그 뒤로 귀에서 소리가 나서 한참 병원 다녔어.”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그러니까 나도 그 새끼가 무서웠다고.”
채린이 가방을 뒤졌다. 지갑과 영수증 뭉치 사이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눌렀다가 망설였다.
“들으면, 내가 줬다고 말하지 마.”
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속해. 나 진짜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약속하면 네가 했던 일이 없어져?”
채린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얘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런 약속 못 해.”
가방을 닫으려던 채린의 손이 멎었다. 그녀는 입구를 한번 본 뒤 휴대전화의 음량을 낮췄다.
“알아서 해. 대신 끝까지 들어.”
짧은 잡음이 흘렀다. 오래된 기기로 녹음한 듯 소리가 얇았다. 먼저 들린 것은 채린의 목소리였다.
—그림 다 탔어. 그래도 경찰에 신고한다는데?
서경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서 움츠러들었다.
잿가루가 복도 바닥에 묻어 있었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창문은 닫혀 있었고, 누군가 전화할 동안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팔을 잡았다. 서경은 당시의 구두보다 냄새를 먼저 기억했다. 젖은 교복과 타버린 물감 냄새.
곧 시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활을 잡을 수 있으면 걔는 계속 나갈 거야.
오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비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 진료 자료를 누가 정리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기억나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나누어 말했다. 시우가 가져다준 봉투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 일로 받았던 서류도 비슷한 종이봉투에 있었다는 말이 뒤따랐다.“엄마, 그건 다 버렸어?”“집에 있던 건 네가 가져갔을 텐데.”서경은 작은 상자를 보았다.“응. 찾아볼게. 모르면 나중에 같이 보자.”통화를 마치고 재단 전달지를 다시 펼쳤다. 위쪽에 인계 분류가 적혀 있었다.HD-16.태산이 보낸 관리계정 표지에서 보았던 번호였다. 한도진 관련 유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이어지는 지출을 묶고 있던 분류.그녀는 두 자료를 나란히 놓고 정 변호사에게 알렸다.“병원 연락 자료에 아버지 쪽 관리번호가 있어요.”“두 자료가 연결되는지 작성자를 확인하겠습니다.”은행 빚은 아니었다. 아버지 사후 지원을 맡던 사람들이 서경의 부상 때도 등장했다. 서경은 HD-16 아래에 박 실장의 이름을 적었다.해가 기울 무렵 태주에게 날짜와 담당자 부분을 공유했다. 파일을 보낸 뒤에도 서경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제가 다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오래전 일입니다.”“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 잘 기억하는 것처럼 말해요. 제가 뭐 때문에 울었고, 왜 그만뒀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까지.”서경은 창밖을 보았다.“제가 자꾸 거기다 제 기억을 맞췄나 봐요.”태주가 잠깐 침묵했다.&ld
회의가 끝나자 채린이 문 앞에서 따라왔다.정 변호사가 두 사람 곁에 멈췄다. 채린은 서경의 손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그날…… 그냥 겁만 주면 될 줄 알았어.”서경은 가방끈을 잡은 손을 바꾸었다.“겁만 줬는데 내 손은 왜 이래?”서경이 오른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채린의 시선이 내려갔다.“그 말로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채린이 대답하지 못했다.“오늘은 그 얘기 더 못 듣겠어.”서경은 먼저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손잡이를 잡고 멈췄다.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변호사가 옆에서 엘리베이터로 가자고 했다.괜찮다고 대답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 그럴게요.”밖에 나와 태주에게 녹음 앞뒤를 들었다고 알렸다. 그가 만나겠느냐고 물었다.“오늘은 먼저 좀 쉴게요. 나중에 제가 전화해도 돼요?”“네. 전화 올 때까지 일하고 있겠습니다.”서경은 전화를 마쳤다. 태주의 하루까지 멈추게 한 것은 아니어서, 조금 편해졌다.숙소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씻는다고 그 목소리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물을 끄고 수건을 고르는 동작은 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 가져온 진료 봉투를 놓았다. 그날 자신이 직접 보았던 것과, 시우가 나중에 설명한 것이 자꾸 뒤섞이고 있었다.그녀는 두 줄로 나누어 적었다.병원에서 시우를 보았다.시우는 늦게 알았다고 말했다.같은 기억으로 묶어두었던 두 문장 사이에 처음으로 빈 줄이 생겼다.서경은 그 빈 줄
채린은 종이 한 장을 구겨서 가져왔다.“여기 사인하래.”서경은 테이블 건너의 여자를 보았다. 지난번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안쓰러워할 여유는 없었다.채린이 펼친 종이에는 지원 종료에 따른 사실 확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2016년 학교에서 발생한 개인 간 다툼에 시우가 사후 지원을 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서경의 눈이 개인 간 다툼이라는 말에 멎었다.종이에는 손도, 자퇴도 없었다. 서경은 테이블 위에 펴지지 않는 약지를 올려놓았다.“이걸 쓰려고 했어?”“그러니까 안 쓰고 왔잖아.”채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곁에는 그녀가 따로 상담받은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정 변호사와 연락해 마련한 자리였다. 서경의 대리인과 채린의 대리인은 서로 다른 쪽에 앉았다.채린이 가방을 쥐었다.“내일이 돈 들어오는 날이야. 이거 정리 안 하면 더는 안 준대.”“그래서 녹음을 주겠다는 거야?”“나도 방법이 없으니까.”채린이 입술을 씹었다.“너한테 다 넘기면, 넌 그걸로 강시우 잡고 나는 혼자 남잖아. 먼저 약속해. 나한테 불리한 건 빼.”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채린은 서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날 문 앞을 막고 웃던 여자가 오늘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뭘 빼달라는 건데.”서경이 물었다.채린은 시선을 피했다.“내가 한 말. 쓸데없이 흥분해서 한 말도 있고.”“그럼 내가 들은 파일에서 네 말을 자른 거야?&
그날 오후, 윤상혁은 정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 태주도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상혁은 창가를 확인한 뒤 앉았다.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았다.“가져오신 건 뭡니까?”정 변호사가 물었다.“제가 서명하라고 받은 확인서입니다. 실제 보고 내용하고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그가 한 장을 꺼냈다. 서경은 책임자 이름과 날짜부터 읽었다. 단독 처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태주는 끝까지 읽고 테이블에 놓았다.“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자료도 있습니까?”“있습니다.”윤상혁은 가방을 열지 않았다.“하성에서 제 경력은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태산에서 이대로 잘리면 다른 곳에 같은 이야기를 흘릴 겁니다. 업계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하성 채용을 약속하는 자리는 아닙니다.”태주가 말했다.윤상혁의 입가가 굳었다.“그러면 왜 왔는지 모르겠군요. 자료만 달라는 얘기 아닙니까.”“무슨 일을 했는지부터 듣겠습니다.”“강 대표 밑에서 하라는 일 한 겁니다.”서경이 고개를 들었다.“제 병원도, 제가 직접 물어본 것도 보고했죠. 그것도 여기 넣어주세요.”“그건 일정 관리였습니다.”“제 질문은 일정 관리고, 비서님 질문은 재검토 요청이에요?”윤상혁의 입술이 멎었다.“그것까지 안 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서경은 확인서를 돌려주었다.“비서님이 억울해
서경은 악보실에서 첫 입금 알림을 받았다.20만 원.지난주 샘플 작업을 확인한 이문정이 정식으로 시범 묶음을 맡겼다. 10월 12일 월요일, 서경은 작업용 자리에 앉아 빌린 악보와 목록을 맞추고 있었다.한 장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려 맡는 양을 줄였다. 남은 40만 원은 일을 마쳐야 들어온다.서경은 은행 알림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보낸 사람은 이음악보실이었다. 오늘 끝낼 악보 옆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이문정이 파일 상자를 책상에 놓았다.“확인하셨으면 됐어요. 이건 다음 묶음인데 오늘 손대지 마세요. 지금 것 먼저 끝내고요.”서경은 습관적으로 상자를 끌어당기려다 멈췄다. 조금 더 하면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맡은 일에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 참이었다.“네. 금요일까지 중간 결과 보내드릴게요.”복도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민지와 준우가 담당 교사와 함께 대여 악보를 반납하러 왔다. 민지는 서경을 발견하고 문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선생님, 여기서 일하세요?”“조금씩 해보려고.”“이 악보도 선생님이 고르시는 거예요?”“아니. 누가 무엇을 빌렸는지 찾기 좋게 정리하는 중이야.”준우가 악보 끝에 붙은 집게를 떼었다.“이것도 반납할 뻔했네.”민지가 손을 내밀었다.“내 거야.”“알아. 그래서 뺐잖아.”서경이 웃었다. 책상 위의 목록은 조금 늦어지고 있었지만 이 정도 멈춤은 괜찮았다.민지가 수정된 대여
확인 절차가 끝난 뒤 유세라가 복도에서 서경을 불렀다.태주는 주최 측과 후원 집행 자료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정 변호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통화하고 있었다. 서경은 그들이 보이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만족해요?”유세라가 물었다.“당신 이름 빼달라는 건 들어줬잖아요. 왜 여기까지 하시는 거죠?”“그 물건을 제가 받았다고 쓰셨으니까요.”“그래서 잘못된 부분 고쳤다고요.”“다른 데 보낸 자료도 고쳐주세요.”유세라가 헛웃음을 지었다.“권태주가 뒤에 서 있으니 뭘 요구해도 들어줄 것 같나 보네.”“제 서명은 남기고, 제가 쓴 말만 지우셨잖아요.”서경은 가방을 열었다.“돌려놓으세요. 제 말도, 이 종이가 간 곳마다.”서경은 가방에서 원래 수령증 사본을 꺼냈다. 메모가 보이도록 펼치자 유세라가 눈을 피했다.“그건 태산에 전달해요.”“태산에도 보냈어요. 갤러리에서 사용한 곳은 관장님께 요청할게요.”유세라가 더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문을 닫기 직전 직원에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상혁 연락해요. 원본 받은 사람부터 와서 설명하라고 해.”서경은 펼쳤던 수령증을 파일에 넣었다. 유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닫힌 문 안에서 윤상혁이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밖으로 나오는 길에 운송업체 담당자가 짧게 인사했다.“아까 감사합니다.”“확인한 것만 말씀하신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