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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화. 약속할 수 없는 것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8 15:57:26

시우가 손을 달라고 했다.

서경은 저녁 내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외출복을 갈아입고,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면 다음에는 손을 만져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TV 소리를 줄였고, 서경은 소파의 같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그냥 잘래요.”

말을 하고 나서야 거절했다는 걸 알았다.

시우가 그녀를 보았다.

“왜. 많이 아파?”

“조금요.”

“그럴 때 풀어줘야지.”

그가 손을 뻗었다. 서경은 피하지 않으려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시우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 그녀의 어깨가 먼저 움츠러들었다.

시우가 멈췄다.

짧은 침묵 뒤에 그가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엄마를 보니까…….”

어머니를 핑계로 쓰는 게 싫었다. 하지만 오늘 정말 어머니를 보며 울고 싶었다. 거짓말을 만들어내기보다 그 감정 하나를 붙잡았다.

“많이 나이 드신 것 같아서요.”

시우가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서경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품에 안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이 풀렸다. 그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알면서도 몸은 익숙한 자리에 기대고 있었다.

“너 혼자 감당하게 안 해. 내가 있잖아.”

그의 셔츠는 익숙한 세제 냄새가 났다. 서경은 그 냄새 속에서 잠들고, 아픈 날에는 울었다. 오늘은 어깨에 닿은 이마를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몰랐다.

시우가 등을 쓸어내렸다. 서경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그의 품 안에서, 그가 다시 손을 잡지 못하게.

“고마워요.”

버릇처럼 나온 말을 삼킬 수 없었다. 대신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믿는다고, 예전처럼 말하지 않았다.

***

새벽이 되어 서경은 작은방으로 옮겨 앉았다. 시우는 서재에서 일을 하다 잠들었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보낼 사진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권태주의 명함을 책상에 놓았다.

한 줄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후원 관련 서류에서 확인할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한서경입니다.]

보낸 메일을 다시 열어보았다. 파일은 붙이지 않았다. 김채린의 목소리도 이름도 쓰지 않았다. 아직 누구를 믿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답이 와 있었다.

[오늘 오전 중 직접 통화할 수 있습니다. 편한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서경은 10시라고 썼다. 시우가 출근한 뒤, 다른 직원들이 집에 오기 전이었다.

태주는 약속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한서경 씨?”

“네.”

“지금 말씀하셔도 됩니까?”

서경은 문을 보았다. 자기 방 문이었다. 잠그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문제 있는 후원이라고 말씀드린 거요. 학생들 얘기만은 아니었어요.”

태주가 말을 끊지 않았다. 서경은 500만 원의 수령 확인서부터 설명했다. 그 돈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어제 카페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일에 나오는 목소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는 문장이 끊겼다.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태주의 대답에 서경이 휴대전화를 더 세게 쥐었다.

“시우 씨도 도와준다고 했어요.”

말이 거칠게 나갔다. 서경은 곧바로 사과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태주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지 않았다.

“내 말을 먼저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변호사에게 확인하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요.”

서경은 숨을 골랐다.

“시우 씨가 대표님을 싫어하니까요. 지금 제가 아는 건 그것뿐이라서.”

전화기 너머에서 태주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하성 본사 1층에 외부 상담실이 있습니다. 오실 수 있는 시간으로 잡지요.”

서경은 그날 오후 경매 자료를 가져다주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세라의 담당자가 하성 심의용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그녀가 업무상 방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후에 제가 직접 서류를 전달해도 된다고 할게요.”

“그 때문에 위험해지는 건 아닙니까?”

“아직은 아니에요.”

전화를 끊고 시우가 정해둔 오후 일정을 열었다. 하성에 직접 갈 수 있는 시간에 표시했다.

***

상담실 문에는 작은 유리창이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갔다. 태주는 상석에 앉지 않고 그녀가 고른 자리 맞은편으로 왔다.

서경은 휴대전화를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우선 들어주세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태주가 펜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문장 뒤에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경은 그가 전화기를 가져갈 줄 알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어디로 가라고 할 줄 알았다.

태주는 음량을 내린 뒤 휴대전화를 그녀 쪽으로 돌려놓았다. 펜이 눌렀던 종이에는 작은 홈이 남았다.

“강시우의 목소리라고 판단하시는군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알겠습니다.”

태주는 사진도 확인했다. 지급 날짜와 관리번호를 따로 적었다.

“이걸로 시우 씨를 잡을 수 있나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원래 녹음과 지급 내역, 당시 상황을 함께 확인해야 할 겁니다.”

서경의 손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갔다.

당장 데려가서 수갑을 채워줄 수 있다는 말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신중한 대답을 들으니, 밖에 나와도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다시 그 집에 가야 해요?”

태주가 펜을 놓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목소리가 커졌다. 유리창 너머를 지나는 직원이 잠깐 이쪽을 보았다. 서경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십시오.”

태주의 말이 이번에는 빨랐다.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여기서도 작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물병 뚜껑을 열어 잔 옆에 놓았다. 서경은 물을 마시고도 전화기를 쥔 손을 놓지 못했다. 태주는 그 손에서 눈을 거두었다.

“나갈 방법부터 찾겠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하는 건 그 다음입니다.”

“어머니가 계세요. 병원비도 그 사람이 내고요. 제가 그냥 나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제 돈으로는 오래 못 버텨요.”

태주는 한동안 듣다가 빈 종이를 그녀 앞으로 돌렸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부터 적어봅시다.”

종이 위에는 어머니, 거처, 법률 상담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녀가 눈을 들자 태주가 펜을 내려놓았다.

“순서는 서경 씨가 정하십시오.”

서경은 어머니라는 글자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다음에는 법률 상담에 밑줄을 긋고 거처 앞에 나중이라고 작게 적었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알고 싶어요. 시우 씨가 해준다고 했던 것 말고요.”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독립해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정 변호사입니다. 서경 씨가 직접 의뢰하시면 됩니다.”

“대표님 말씀만 듣는 분 아니에요?”

태주의 입가가 처음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랬으면 소개 못 해드립니다. 내 말 안 들어서 곤란했던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서경도 아주 잠깐 웃을 뻔했다. 그러나 곧 휴대전화 화면에 시선이 돌아갔다.

“대표님은 왜 시우 씨를 조사하세요?”

태주가 창밖을 보았다. 사람을 피하는 시선이 아니라,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누나가 죽었습니다. 권혜진 검사. 2019년 교통사고였어요.”

그는 짧게 멈췄다.

“누나가 보던 사건에 태산이 등장합니다. 사고 뒤에 남은 자료만으로는 연결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시우 씨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의심합니다. 확신하고 싶은 마음과 입증할 수 있는 일은 다르더군요.”

테이블 위의 종이가 조명에 희게 보였다. 서경은 자기 손가락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이 남자도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럼 제 자료가 필요하겠네요.”

“필요합니다.”

태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지급 날짜를 적은 메모에 닿았다.

“다음 내부 회의에 이 자료를 올릴 생각이었습니다.”

서경의 몸이 굳었다.

“아직 드린다고 안 했어요.”

“압니다.”

태주가 메모를 뒤집었다.

“누나 일에 도움이 될까 봐 먼저 서둘렀습니다. 회의는 미루겠습니다. 공개 범위는 정 변호사와 정한 뒤 알려주십시오.”

서경은 뒤집힌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남자도 자료를 원했다. 다만 그녀의 대답 앞에서 손을 멈췄다.

서경은 태주가 내려놓은 펜을 보았다. 그가 직접 말한 약속을 종이 위에 적었다.

“파일은 변호사한테 먼저 보여줄게요.”

“그러십시오.”

“제 허락 없이 공개하지 마세요. 엄마한테도 아직 말씀드리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서경은 명함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상담실에서 나와 로비에 서자 기사에게 메시지가 왔다. 곧 도착한다는 말이었다.

태주는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따라 나왔다.

“오늘 다시 그 집에 돌아가는 건 서경 씨 혼자 정리할 일이 아닙니다. 변호사와 연락이 닿기 전이라도 위험하면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대표님이 바로 오실 수 있어요?”

태주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가겠습니다. 급하면 내 연락을 기다리지 말고 신고부터 하십시오.”

서경은 명함 가장자리를 만졌다.

“제가 자꾸 전화해도요?”

“받겠습니다.”

태주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갑 속 명함 두 장을 만졌다.

돌아갈 차는 여전히 시우가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내일 이야기할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서경은 차에 오르기 전 정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태주는 몇 걸음 떨어져 자기 차로 갔다.

전화가 연결되자 이름을 말했다. 예약을 잡아달라는 말 뒤에서 숨이 걸렸다.

“저를 다치게 한 사람이 제 치료비를 내고 있어요.”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은 차 옆에 시우가 보낸 기사가 서 있었다. 서경은 그쪽을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엄마 병원비도요. 그 집에서 나오려면, 뭘 먼저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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