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경의 이름이 또 맨 앞에 있었다.
피해 회복 및 예술 지원 통합 기금 참여 제안.
태산의 새로운 대응 창구가 보낸 문서였다. 기존 후원 사업을 이어가면서 관련 피해도 구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확인될 자산을 어떻게 처분할지 정하지 않은 채, 기금의 취지와 대표로 참여할 사람부터 적어두었다.
서경은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제가 여기에 동의한 적 없어요.”
“발표 전 참여 요청입니다. 거절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정 변호사가 이름 옆에 표시했다.
그날 공동 면담에는 태산에 맡긴 거래 대금을 돌려받지 못한 회사의 담당자도 왔다.
그 여자는 기금 제안의 제목을 보고 웃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돌려줄 돈이 있는데 기부부터 한다는 겁니까?”
서경은 말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과 너무 가까운 말이어
법원 복도에서 시우를 본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호송 중인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서경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오래된 버릇이 먼저 나왔다.시우의 입술이 움직였다.서경아.소리까지 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제 코트 단추를 보았다. 하나가 다른 구멍에 끼워져 있었다. 아침에 서둘러 입은 탓이었다.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 앞에서 황급히 고쳐 입고 싶지는 않았다.태주가 가까이 다가왔다. 서경은 괜찮다고 먼저 말하지 않았다.“잠깐만 서 있을게요.”그가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손바닥 안의 물병이 차가웠다.시우가 지나간 뒤에야 단추를 풀어 제대로 끼웠다. 왼손으로 하느라 조금 오래 걸렸다. 태주는 문을 가리지 않는 쪽에 서서 기다렸다.법정 안에서 증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서경은 물병을 그에게 건넸다.“가지고 있어줘요.”그리고 자기 이름에 대답하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는 데서부터 목소리가 떨렸다.서경은 증인석의 마이크를 조금 가까이 당겼다. 선서를 마치고 앉자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자기 손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검사는 먼저 아버지의 일에 관해 물었다.마지막 만남과 사망 소식, 시우의 지원을 답했다. 날짜 하나는 메시지를 다시 보겠다고 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장을 증인이 직접 보셨습니까?”“아니요.”“장만석 씨가 진술한 일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몰
사진은 가장 잘 나온 것들만 모여 있었다.병실에서 꽃을 받은 날, 새 옷을 입고 외출한 날, 시우의 넥타이를 고쳐주던 날. 서경은 마지막 사진 앞에서 잠깐 멈췄다. 그 넥타이 색이 기억났다. 자기가 골랐다고 말했지만 매장으로 갈 때부터 시우가 정해놓았던 색이었다.그렇다고 사진 속 모든 웃음이 거짓은 아니었다.정 변호사가 물었다.“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기억납니까?”“병원은 기억나요. 날짜는 따로 봐야겠어요.”“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요?”서경은 잠깐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춥고 무서웠다. 이불을 더 덮었는데도 떨렸고, 시우의 손이 어깨에 닿자 울음이 멎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자기가 춥다고 말했는지, 누가 먼저 담요를 가져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추웠던 건 기억해요. 말했는지는 모르겠어요.”정 변호사는 그 답을 고치지 않았다.“그대로 답하십시오. 빈 기억을 채우려고 하지는 마시고요.”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만 이길 것 같은 두려움이 목에 걸렸다.그녀는 사진을 다시 보았다.“도움을 받았던 건 맞아요.”“그걸 인정하면 시우 씨가…….”말을 끝내지 못한 서경은 메모의 ‘한 번도’를 지웠다. 정 변호사는 기다렸다.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서경은 꽃을 좋아했던 열여덟의 자기를 떠올렸다. 그래도 지운 한 번도를 되살리지 않았다.병원에 남은 자료는 사진보다 밋밋했다.진료 일정과 재활을 다시 상의하기로 한 기록, 예약을 바꾼 박 실장의 연락.
1월의 마지막 주말, 태주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서경은 카페 문 앞에서 그를 보고 잠깐 멈췄다. 지난번 집을 함께 보려던 날에는 빈자리만 몇 번이나 보았었다. 오늘 그가 먼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조금 과할 만큼 반가웠다.“얼마나 기다렸어요?”“차 한 잔 식을 정도요.”“그렇게까지 일찍 오실 필요는 없는데.”태주는 웃었다.“이번에는 기다리는 쪽을 해보고 싶었습니다.”서경은 그가 걸어둔 코트와 식은 차를 보았다. 오늘은 온다던 사람이 이미 와 있었다.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려다 옆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태주가 의자를 조금 당겨주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두 사람의 무릎이 가까워졌다. 아무것도 해결할 일이 없는 오후로 만들자고, 전날 서경이 먼저 말했다.그녀는 두꺼운 파일 대신 얇은 책을 꺼냈다. 음악도 법률도 아닌 짧은 여행 산문이었다. 갈 계획은 없었다. 표지의 바다 사진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어딘가 가고 싶습니까?”태주가 물었다.“그 말만 들으면 표부터 찾으실까 봐 대답하기 무서운데요.”그가 난처하게 웃었다. 서경은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놀린 거예요. 그냥 사진이 좋아서요.”그는 여행지의 좋은 호텔을 설명하지 않았다. 사진 속 난간이 생각보다 낮다고만 말했다. 서경은 물에 더 가까이 앉아보고 싶다고 답했다.서경은 책장을 더 넘기지 않고 그가 마시던 차를 보았다. 찻잔 가장자리에 식은 물기가 남아 있었다. 자기 때문에 일찍 왔다는 말을 그 잔이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저 들어오기 전에 잠깐 서 있었어요.”태주가 고개를
건물 아래 식당에서 태주는 수저를 떨어뜨렸다.손에서 미끄러졌을 뿐인데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컸다. 그는 주워놓고 새것을 받았다. 서경은 그의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았다.“오늘은 제가 물 따라드릴게요.”그녀가 왼손으로 작은 물병을 들었다. 태주가 괜찮다고 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서경은 반만 채웠다. 가득 따라주려고 애쓰지 않았다.그가 물을 마시다 고개를 숙였다.“들어가서 찾아오면 될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잠깐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알아요.”“가면 다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서경은 자기 수저를 놓고 그의 팔에 손을 댔다. 태주가 더 말하지 못하자 가까이 의자를 당겼다. 그의 어깨가 그녀 쪽으로 아주 조금 내려왔다.서경은 아프지 않은 쪽으로 팔을 놓고 몸을 돌렸다. 어깨에 닿은 그의 이마가 뜨거웠다. 태주는 식탁 아래에서 자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누나한테 미안합니다.”그가 말했다.서경은 괜찮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을 한 번 천천히 쓸었다. 국이 식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식사를 마칠 무렵 연락이 다시 왔다.외부 업체 책임자가 새 자료와 자신의 진술을 대조하는 조사에 응했다. 별장의 보관자 진술과 반출 지시 경위도 함께 확보됐다. 강몽구와 민경식은 자신들은 알지 못한 현장 실무라고 답하고 있었다.태주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아까와 달리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서경에게 남은 국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태주는 마지막 숟가락을 뜬 뒤 그릇을 놓았다. 추가 연락에 응할 수 있는 시간을 회신하고, 서경의 가방을 들었다. 오늘은 그녀를 숙소에
해가 바뀐 1월 6일 오전, 송기범은 문을 열기 전에 신분증을 확인했다.익숙한 직원의 얼굴이 아니라 낯선 수사관의 것이었다. 수사관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고 대상과 범위를 설명했다. 송기범은 자신이 받은 자료 이동 지시와 창고 위치를 알렸다.박 실장은 그보다 먼저 와 있었다.“송 선생님, 이분들께 뭘 말씀드린 겁니까?”그가 물었다.“제가 받은 일정입니다.”송기범이 답했다.박 실장은 더 다가오지 못했다. 수사관이 각자의 신분과 현장에 온 경위를 확인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상자들이 줄지어 드러났다. 서류철의 색이 다르다고 내용까지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상자 안에 오래된 지급 전표와 최근의 정산 출력물이 섞여 있었다.안쪽 작은 정리실 문틈에서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송기범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전에 박 실장과 함께 온 작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는 문으로 달려가려다 수사관의 제지에 멈췄다. 화재 신고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밖으로 이동했다.연기는 금세 창고 천장으로 번졌다. 송기범은 자기 책상 위의 인계 목록을 돌아보았다. 그것을 가져오려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팔을 잡았다.“밖으로 나오십시오.”그는 열쇠를 쥔 채 나왔다. 문밖에서 보니 자기가 아직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근무일에, 평소처럼 남겨둘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서경과 태주는 서울에 있었다.각자의 대리인과 사무실에 모여 현장 질문을 기다렸다. 서경은 제출한 목록의 자기 기억과 윤상혁의 설명을 표시해두었다.태주는 창가에 서 있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서경은 세 번째에 그를 불렀다.“여기 앉아요.”
서경의 이름이 또 맨 앞에 있었다.피해 회복 및 예술 지원 통합 기금 참여 제안.태산의 새로운 대응 창구가 보낸 문서였다. 기존 후원 사업을 이어가면서 관련 피해도 구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확인될 자산을 어떻게 처분할지 정하지 않은 채, 기금의 취지와 대표로 참여할 사람부터 적어두었다.서경은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렸다.“제가 여기에 동의한 적 없어요.”“발표 전 참여 요청입니다. 거절 답신을 보내겠습니다.”정 변호사가 이름 옆에 표시했다.그날 공동 면담에는 태산에 맡긴 거래 대금을 돌려받지 못한 회사의 담당자도 왔다.그 여자는 기금 제안의 제목을 보고 웃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돌려줄 돈이 있는데 기부부터 한다는 겁니까?”서경은 말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과 너무 가까운 말이어서였다.“저희는 잔금 지급을 맡긴 겁니다. 직원들한테 왜 대금이 안 들어갔는지 설명하고 있어요. 제가 왜 예술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여자가 출력물을 내려놓았다.“기사에는 좋은 일 한다고만 쓰였더군요.”서경은 손을 뗐다. 맨 앞의 자기 이름 뒤에 저 여자의 미지급 대금이 가려져 있었다.서경은 넓은 방을 얻을까 계산하던 사용표를 덮었다. 여자 앞에서 뒤로 숨기지는 않았다.“제 이름부터 빼달라고 하겠습니다.”서경이 참여 제안서의 자기 이름에 줄을 그었다.“이 돈이 저희 수업으로 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고요.”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청구서를 다시 폈다.***오후에는 태주와 따로 만났다.서경은 다음 달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