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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다시 켜는 이유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08:02:54

민지는 악기 없이 왔다.

서경은 먼저 케이스를 찾지 않았다. 쉬기로 한 수업 다음 주였다. 아이가 오늘은 듣기만 하겠다고 했고, 보호자와도 그렇게 정해두었다.

준우가 보면대 아래에서 파일을 꺼냈다.

“너 이거 놓고 갔어.”

“알아.”

민지가 받았다.

“알면 가져가지.”

준우는 덧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민지는 그 말이 오히려 편했는지 파일을 열었다. 친구는 언제까지 위로해야 하는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냥 두고 간 물건을 돌려주었다.

다른 아이들 합주가 시작됐다. 민지는 뒤에서 듣다가 자기 파트가 늦게 들어온다고 중얼거렸다. 준우가 돌아보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서경은 수업이 끝난 뒤 아이에게 따로 앉겠느냐고 물었다.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 보고 싶어요. 한 번은요.”

서경은 화면을 켰다. 민지가 그 말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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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구원자는 내 상처를 너무 잘 알고있다   103화. 다시 켜는 이유

    민지는 악기 없이 왔다.서경은 먼저 케이스를 찾지 않았다. 쉬기로 한 수업 다음 주였다. 아이가 오늘은 듣기만 하겠다고 했고, 보호자와도 그렇게 정해두었다.준우가 보면대 아래에서 파일을 꺼냈다.“너 이거 놓고 갔어.”“알아.”민지가 받았다.“알면 가져가지.”준우는 덧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민지는 그 말이 오히려 편했는지 파일을 열었다. 친구는 언제까지 위로해야 하는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냥 두고 간 물건을 돌려주었다.다른 아이들 합주가 시작됐다. 민지는 뒤에서 듣다가 자기 파트가 늦게 들어온다고 중얼거렸다. 준우가 돌아보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서경은 수업이 끝난 뒤 아이에게 따로 앉겠느냐고 물었다.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영상 보고 싶어요. 한 번은요.”서경은 화면을 켰다. 민지가 그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저도 그거 싫었어요. 무조건 잘했다고 하는 거.”영상이 시작됐다. 민지는 첫 음부터 미간을 좁혔다. 서경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화면을 멈췄다.“여기서 제가 너무 빨랐네요.”“어떤 생각 했어?”“앞사람이 되게 잘해서요. 저도 힘 있게 해야 할 것 같았어요.”민지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연습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민지가 화면을 조금 뒤로 돌렸다. 자기 앞에서 연주한 아이의 잔향까지 들어 있었다. 그 짧은 소리를 듣고 다시 자기 영상으로 돌아왔다.“저 사람은 세게 해도 되는데 저는 왜 안 돼요?”“세게 한 게 문제였을까? 네가 어디까지 밀고 갔는지 들어봐.”민지는 음량을 낮추려던 손을 멈췄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부분을 그대로 들어야 했다. 활이 현을 누르는 소리가 선율보다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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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지는 자기 이름을 세 번 찾았다.위에서 아래로 한 번, 아래에서 위로 한 번. 마지막에는 성을 빼고 이름만 보았다. 벽에 붙은 결과표의 글자는 그대로였다.없었다.2029년 봄, 청소년 콩쿠르의 예선 결과였다. 민지는 다이어리에 미리 적어둔 본선 날짜를 만졌다.옆에서 지아가 작은 소리를 냈다.같이 대기실을 썼던 아이였다. 보호자가 다가와 축하했고, 지아는 민지를 보다가 웃음을 조금 거두었다. 그 배려가 더 싫었다.“축하해.”민지가 먼저 말했다.지아가 고맙다고 답했다. 더 이야기하려는 표정이었지만 민지는 가방을 들어 메었다. 케이스 손잡이가 손바닥에 깊게 닿았다.지아는 다음 일정을 적은 종이를 받으러 갔다. 민지는 자기 가방에서 접어놓은 다이어리를 만졌다. 같은 날짜에 같은 곡을 켤 거라고 적어둔 칸이었다.직원이 이름을 확인하고 지아에게 종이를 건넸다. 민지는 한 발 다가갔다가 멈췄다. 자기 이름을 말해도 받을 것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서로 어디서 연습할지 물어보던 친구였는데, 이제는 한 사람에게만 다음 안내가 있었다.민지는 케이스를 든 손을 바꾸었다. 손바닥에는 오래 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습한 시간은 명단에 없었다. 지아도 그만큼 연습했을 것이었다.민지는 서경이 다가오자 입꼬리를 올렸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웃고 싶지 않았다.서경은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일단 나가자.”그녀가 말했다.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으면서도 한 번 돌아보았다. 명단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았다.***대기실에는 아직 떠들썩한 사람들이 있었다.통과한 아이는 다음 일정표를 받고, 떨어진 아이는 악기를 넣었다. 어떤 부모는 위로했고 어떤 부모는 연주 중 무엇을 틀렸는지 벌써 설명하고 있었다. 민지는 자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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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말, 정 변호사에게 연락이 왔다.올해 초 항소심에서도 유지된 시우와 강몽구의 무기징역형이, 상고 기각으로 확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서경은 하은이의 옷을 접다 손을 멈췄다. 필요한 서류는 따로 받기로 했다. 반환과 배상의 집행은 별도로 이어졌다.그녀는 전화를 끊고 태주에게 알렸다.그는 그날 저녁 일찍 돌아왔다. 두 사람은 아이가 잠든 뒤 거실에 앉았다. 태주는 누나의 사진을 꺼내놓지 않았다. 서경도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억지로 찾지 않았다.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태주가 물었다.“조금 걸을 수 있겠습니까?”서경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잠깐 맡기고 집 앞을 걸었다. 늦은 봄의 바람이 뺨에 닿았다. 태주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끝났다는 말을 기대했는데.”그가 말했다.“누나가 없다는 건 그대로군요.”서경은 그의 손을 더 잡았다.“그래도 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이제 제가 대답 안 해도 돼요.”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을 샀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려고 고른 것은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면 아침에 먹을 것이 필요했다.돌아오는 길에 서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이를 맡아준 사람이 보낸 사진이었다. 하은이가 작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서경은 정 변호사와의 통화 기록을 닫고 사진을 태주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우유 봉투를 나누어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여름이 되기 전 서경은 악보실에 갔다.짧은 합주 시간을 잡고 대여 악기의 기간도 연장했다. 서경은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먼저 턱에 대보았다.첫 합주에서 유진은 너무 천천히 들어왔다. 서경이 활을 내렸다.“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돼요.”그가 건반 위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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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기관은 다음 해 상반기 수업을 소연과 다른 교사들에게 나누었다. 서경의 복귀는 몸 상태를 보고 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계약서를 보내고 봄 수업 시간을 비웠다.집에서도 방 하나를 비웠다.서경은 자기 악보 책상을 옮기려고 했다. 아기가 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미 서랍을 꺼낸 뒤였다. 태주가 문 앞에 섰다.“왜 이 방부터 비웁니까?”“여기가 밝으니까요.”“제 방도 밝습니다.”태주는 자기 서재의 의자 둘을 먼저 끌어냈다. 문턱에 걸리자 의자를 돌렸다. 서경은 꺼내놓은 악보 서랍을 다시 밀어 넣었다.“저것도 옮기려고요?”“네. 내 책도 거실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그가 빈 벽을 짚어 아기 침대의 폭을 재보았다. 서경도 들어가 둘이 쓰는 수납장을 열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물건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번에는 함께 비울 물건을 골랐다.아기 침대가 들어온 날, 태주는 설명서를 잘못 접어놓고 한동안 같은 그림만 보았다. 서경이 옆에서 넘겨주었다.“똑같은 부품 세 번 찾고 있어요.”“누가 책을 이렇게 접어놨습니까.”“아버님이요.”태주가 그녀를 보았다. 서경은 웃다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 호칭을 농담으로 먼저 말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두 사람은 이름 후보를 읽었다. 짧게 부르기 좋은 이름을 고르다가 하은에서 멈췄다. 서경이 몇 번 불러보고, 태주도 따라 불렀다.“권하은.”그가 말했다.서경은 완성된 침대를 보았다. 침대 옆에는 내일 보낼 수업 자료와 태주의 업무 수첩이 나란히 있었다.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내일부터 말고 오늘 하나 해요. 태주 씨 맡을 거.”그는 설명서를 들었다가 웃었다.“일단 이 나사부터 다시 끼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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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은 진료실에서 나오며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태주가 바닥에서 주워 건넸다. 화면은 깨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고도 받아 든 전화기를 한동안 켜지 못했다. 가방에는 병원에서 받은 안내문과 작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2027년 9월의 아침 햇살이 복도 끝으로 들어왔다.“태주 씨.”그녀가 불렀다.“네.”“진짜 아기가 있대요.”같이 들어가서 같은 말을 듣고 나온 사람에게 다시 말했다. 태주는 웃다가 입술을 눌렀다.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들었습니다.”그가 대답했다.“그런데 아직도 다시 듣고 싶습니다.”서경도 웃었다. 태주가 팔을 벌리자 그녀는 가까이 안겼다. 병원 복도라 오래 붙어 있지는 못했다. 떨어지고 나서도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차 안에서 태주는 사진을 앞에 두고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어디인지 아까 설명을 들었는데도 다시 물었다. 서경은 자기도 정확히 가리킬 자신이 없다며 웃었다.“우리 둘 다 모르네요.”“배워야겠습니다.”그가 말했다.서경은 웃다가 창밖을 보았다. 기쁜 마음이 가슴에 꽉 찼는데 그 옆에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가을에 준비 중인 국내 연주와 수업, 이제 조금 늘어난 악보 정리 일. 무엇부터 놓아야 할까.태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회의에 늦는다고 짧게 답했다. 서경은 그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저 무서워요.”그녀가 말했다.태주의 표정이 굳었다.“어디 아픕니까?”“아니요. 그냥…… 좋아하는 일들이 이제 막 생겼는데, 또 못 하게 될까 봐요.”서경은 사진 봉투에서 손을 뺐다.“방금 그런 생각부터 해서 미안해요.”“이렇게 말하면

  • 나의 구원자는 내 상처를 너무 잘 알고있다   098화. 남편이라는 호칭

    그날 밤 두 사람이 돌아온 곳은 태주의 집이었다.서경의 책상과 의자는 이미 작은 방에 들어와 있었다. 월세방의 남은 짐은 다음 날 가져올 예정이었다.현관에 들어서자 태주가 신발을 벗다 멈췄다.“왜요?”“잘 들어가라는 말을 하려 했습니다.”서경이 웃었다. 그동안 문 앞에서 늘 하던 인사였다. 그녀는 그의 재킷을 벗겨 팔에 걸고 안으로 들어갔다.“같이 들어가요.”태주가 뒤따라왔다. 머리핀을 빼던 그녀가 손을 멈추자 그가 거울 앞에 섰다. 당기면 아프니 하나씩 빼달라는 부탁에 그는 핀을 찾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마지막 핀이 빠졌을 때 서경의 머리카락이 어깨로 내려왔다. 태주가 목덜미에 짧게 입술을 댔다. 그녀는 거울 속 그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꽃 장식도, 하객들의 시선도 없었다.“오늘은 안 돌아가죠?”그녀가 물었다.그는 대답 대신 다시 가까이 왔다. 서경이 웃으며 그의 셔츠 앞을 잡았다. 방 문은 두 사람이 함께 닫았다.다음 날 아침, 서경은 식탁에서 남편의 수첩을 보았다. 내일인 월요일에는 회의 시간이 빽빽했고, 자기 수업도 그날 오후에 있었다. 신혼이라고 세상이 멈추지는 않았다.태주가 커피를 놓았다.“오늘 짐은 몇 시에 가지러 갑니까?”“밥부터 먹고요.”그녀가 빈 의자를 당겼다. 그는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 좁지 않은 식탁에서 두 사람의 팔꿈치가 자꾸 닿았다.서경은 컵을 집다가 자기 반지를 보았다. 태주의 손에도 같은 빛이 있었다. 두 사람이 물건을 옮길 때마다 어제와 조금 다른 손이 움직였다.그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았다.“불편합니까?”“아뇨. 자꾸 보고 싶어서요.”태주는 컵을 내려놓고 손을 펴 보였다. 서경은 그 위에 손끝을 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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