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이다정은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저택 앞마당에서 엔진이 조용히 걸리는 소리였다.
낮게, 그러나 단정하게 이어지는 진동.
익숙한 소리가 아니었다.
이다정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머릿속에 어젯밤의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다.
빗속, 차 안 그리고— 그 남자.
이다정은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조금 젖히자 아침 햇빛이 방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그 아래, 저택 앞마당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어제의 남자.
김다온이었다.
오늘의 그는 어제와 달랐다.
젖은 셔츠도, 어둠도 없었다.
대신 잘 맞는 검은 수트.
손에는 얇은 가죽 장갑.
자세는 지나치게 단정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집에 속해 있던 사람처럼.
이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창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차 문을 닫던 김다온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정확하게 마주쳤다.
짧은 정적.
아침 공기만이 조용히 흘렀다.
이다정은 순간 숨을 멈췄다.
이 남자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김다온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각도.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던 사람처럼.
그 인사는 짧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이다정은 커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정말이네.
그날 밤의 대리기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뒤.
현관 앞.
이다정이 계단을 내려왔을 때 그 남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문 옆에 서 있는 모습은 움직임 하나 없이 고요했다.
발걸음을 멈춘 건 오히려 이다정 쪽이었다.
김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운전기사 김다온입니다.”
이다정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어젯밤과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어젯밤의 그는 위험한 상황 속에 서 있던 사람이었고,
지금의 그는 선을 긋고 서 있는 사람이었다.
“아… 네.”
이다정이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괜히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고쳐 쥐었다.
김다온은 말없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다정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뒷좌석에 앉았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다정은 안전벨트를 맸다.
평소와 같은 자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공간이 조금 달라 보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 때문이었다.
김다온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사이드미러.
룸미러.
차례로 확인했다.
각도가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손가락 끝으로 아주 미세하게 조정했다.
이다정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날 밤과 똑같았다.
조용하지만 정확한 움직임.
마치 모든 상황을 미리 계산해 두는 사람처럼.
“출발하겠습니다.”
짧은 안내.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스치는 소리만이
차 안을 채웠다.
이다정은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시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문득 백미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운전석의 남자가 있었다.
김다온은 앞만 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색함은 말보다 침묵 속에서 자랐다.
몇 번이나 말을 걸까 고민했지만 이다정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다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전 외의 것은 전부 선 밖에 두는 사람처럼 보였다.
차가 회사 건물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이다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사님.”
김다온의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네.”
너무 빠른 반응이었다.
이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다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저번에 일은.”
그 순간.
룸미러 속에서 김다온의 시선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살짝 비켜가는 각도였다.
그리고 말했다.
“업무 외적인 질문은
답변드리기 어렵습니다.”
선명한 선 긋기였다.
이다정은 잠시 그 말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래.
이 사람, 정말 선을 긋는구나.
차가 정문 앞에 멈췄다.
김다온이 시동을 끄며 말했다.
“퇴근 시간은
평소와 동일하십니까.”
“네.”
“퇴근하실 때
제 번호로 연락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다정은 그를 올려다봤다.
“아, 번호는—”
김다온은 이미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흰 종이.
김다온.
번호 하나.
그것뿐이었다.
이다정은 명함을 받아 들었다.
종이가 생각보다 따뜻했다.
아마—
그의 손 때문이겠지.
“알겠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내리며 이다정은 문득 깨달았다.
어색한 침묵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서로 너무 많은 걸 의식하고 있어서라는 걸.
이다정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김다온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그 말은 차 안에만 조용히 남았다.
이다정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결혼식 날 아침.이다정은 화가 나 있었다.“안 돼요.”정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왜.”“신부가 결혼식 시작 삼십 분 전에 신랑 보러 내려가는 게 어디 있어.”“보고 오면 되잖아.”“안 돼.”“내 결혼식인데.”“그래서 더 안 돼.”이다정은 드레스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팔짱을 꼈다.황예은은 옆에서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냥 좀 참아.”“뭘.”“삼십 분.”“왜 참아야 하는데.”정유리가 이마를 짚었다.“진짜 둘이 똑같아.”이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다온 씨도 이래?”“아까부터 네 상태 세 번 물었어.”황예은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밥 먹었냐.”둘.“긴장하냐.”셋.“힐 높은 거 신었는데 넘어질 가능성 없냐.”이다정의 표정이 풀렸다.“진짜?”정유리가 한숨을 쉬었다.“그걸 좋아하네.”“귀엽
비가 왔다.많이 오는 비는 아니었다.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할 정도로 잔잔한 봄비였다.이다정은 대표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봤다.퇴근 시간은 이미 지났다.오늘 마지막 회의도 끝났다.남은 일정도 없다.문제는 김다온이었다.연락이 없다.평소라면 늦어도 한 시간 전에는 일정이 끝났는지 확인했을 사람이다. 아무리 바빠도 저녁 약속이 있으면 먼저 연락했다.그런데 오늘은 오후 네 시 이후로 메시지 하나가 전부였다.[저녁에 뵙겠습니다.]끝.시간도 없었다.장소도 없었다.이다정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뭐 하자는 거야.”반지를 샀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본인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의미 없었다.숨길 거면 더 잘 숨겼어야 한다.아버지가 메시지까지 보냈고.새집도 계약했고.결혼할 생각이라고 이미 말했다.남은 건 하나뿐이다.청혼.문제는 언제냐는 건데.이다정은 며칠째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 있었다.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대표실 문이 열렸다.“아직 계셨어?”황예은이었다.이다정이 돌아봤다.“왜.”“왜긴.”예은이 벽시계를 가리켰다.“여덟 시 반인데.”“알아.”“오늘 약속 있다며.”이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그걸 어떻게 알아.”황예은의 입이 멈췄다.
다음 날 저녁 일곱 시.김다온은 본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혼자였다.정확히는 혼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이다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말하면 분명 따라올 테니까.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혼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현관문이 열렸다.오래 본 비서가 김다온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기다리고 계십니다.”“예.”김다온은 안으로 들어갔다.이 집에 처음 왔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그때는 경호 동선을 먼저 봤다.출입구.계단.사각.창문.지금도 습관처럼 눈은 움직였다.그런데 오늘은 그게 먼저 들어오지 않았다.거실.식탁.가족사진.이다정이 어릴 때 찍힌 사진 하나.그게 먼저 보였다.비서가 서재 문 앞에서 멈췄다.“들어가시면 됩니다.”김다온이 문을 열었다.이태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차 두 잔.그리고 서류 하나.김다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 서류로 향했다.이태준이 말했다.“앉게.”김다온은 맞은편에 앉았다.침묵이 먼저 흘렀다.이태준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집 샀다며.”김다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빠르다.역시.“예.”“공동 명의.”“예.”“내 딸이 먼저
토요일 오전 열 시.이다정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건물을 올려다봤다.“여기예요?”“첫 번째입니다.”김다온이 답했다.첫 번째.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이다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몇 개 봤어요?”“오늘은 세 곳입니다.”“아니.”한 박자.“나한테 보여주기 전에.”김다온이 잠깐 멈췄다.그 침묵이 수상했다.“몇 개 봤냐고요.”“…열두 곳 정도.”이다정의 눈이 커졌다.“열두 개?”“예.”“혼자?”“예.”“언제?”“시간 날 때마다.”“시간이 있었어요?”김다온은 대답하지 않았다.좋아.없었네.없는데 만들었네.이다정은 팔짱을 꼈다.“김 총괄님.”“네.”“나 몰래 집 열두 개 보러 다닌 거예요?”“몰래는 아닙니다.”“나한테 말 안 했잖아요.”“결정한 게 없으니까요.”틀린 말은 아니다.그런데 묘하게 얄밉다.“그리고.”이다정이 건물을 다시 올려다봤다.
아침 일곱 시 십이 분.이다정은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를 확인했다.비어 있었다.이불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고, 베개에도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또다.이다정은 한동안 천장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김다온.”대답 없다.“다온 씨.”역시 없다.이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같이 살기 시작한 지 넉 달.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김다온은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생활 패턴이 무너지지 않는다.새벽 두 시에 들어와도 아침 여섯 시면 일어난다.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도 운동한다.그리고 자기가 먼저 일어났다는 이유로 이불까지 정리한다.처음에는 좋았다.두 달쯤 지나니까 조금 얄미워졌다.이다정은 침대에서 내려왔다.거실로 나가자 주방 쪽에서 칼질 소리가 들렸다.탁.탁.탁.좋아.있네.김다온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도마 앞에 서 있었다.아침부터 지나치게 멀쩡했다.계란.채소.구운 빵.커피까지.이다정은 주방 입구에 기대서 한동안 그 모습을 봤다.김다온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일어나셨습니까.”“어떻게 알았어요.”“발소리 들렸습니다.”“나 맨발인데.”“그래도 들립니다.”이다정이 입술을 삐죽였다.“재미없어.”김다온이 그제야 돌아봤다
오전 아홉 시.그룹 본사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방송 차량이 도로 한쪽을 가득 메웠고, 현관 앞에는 기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전날 밤부터 터진 기사만으로도 시장이 뒤집혔다.송하재단 불법 자금.창업주 건강정보 유출.대표 권한 박탈 시나리오.민건우의 의결권 위조.그리고 해외 비공식 승인망.리치몬드.그 이름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이다정이 탄 차량이 본사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운전석에는 김다온이 있었다.전날 공식적으로 그룹 보안전략실 총괄책임자가 된 사람.더 이상 전속 기사가 아니었다.그런데도 오늘 운전은 직접 하겠다고 했다.이다정이 뒷좌석에서 말했다.“김 총괄님.”“네.”“직급 올라갔는데 아직도 운전해요?”김다온은 전방을 보며 대답했다.“오늘까지만입니다.”“왜 오늘까지인데요.”“제가 시작한 일이니까요.”이다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처음 만났던 날도 이 자리였다.운전석과 뒷좌석.그때는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위험한 사람인지.쓸 수 있는 사람인지.아버지는 그렇게 판단했다.이다정도 비슷했다.운전을 잘하는 남자.싸움을 지나치게 잘하는 남자.자기 일 이상으로 선을 넘지 않는 남자.‘운전과 안전까지만.’그렇게 시작했다.참 멀리도 왔다.차가 멈췄다.김다
비는 길게 내리고 있었다.밤공기를 적시는 빗방울이 건물 입구 캐노피를 두드렸다.톡, 톡, 톡. 일정한 박자가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다정은 그 아래 서 있었다.검은 원피스 자락이 무릎에 붙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손에는 휴대폰. 화면에는 대리 호출 앱이 켜진 채였다.술이 꽤 올랐다.머리는 살짝 어지러웠지만, 정신이 아주 흐린 건 아니었다.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왜 이렇게 오래 걸려?’입술을 살짝 깨물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대기 중.주변에는 이미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똑똑.“올라오시면 됩니다.”문 너머로 들린 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김다온은 짧게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네, 비서님. 알겠습니다.”문을 열자, 넓은 회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과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이다정의 아버지, 이회장이었다.그는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마치 김다온이 들어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문 닫게.”김다온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찰칵—이회장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손에는 태블릿 하나가 들려 있었다.“출근 첫날은 어땠나.”“무사히 마쳤습니다
“예은아, 왜?”“또 뭐 말하려고?”이다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황예은은 문을 닫자마자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딸깍.“이다정.”예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기사 뭐야.”그 말에 이다정의 펜 끝이 잠깐 멈췄다.“아침에 봤는데.”예은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끌었다.“너무 잘생겼는데?”이다정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거 말하려고 들어왔어?”“지금 회사야.”그러자 예은이 어깨를 으쓱했다.“회사 이전에—”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이다정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우리 초등학교 때부터
보고서는 얇았다.이상할 정도로.이다정의 아버지, 이회장은서류를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종이 몇 장.운전 경력 몇 줄.그리고—길게 비어 있는 공백.“이게 전부인가.”낮은 목소리였다.하지만 회의실 안 공기가 동시에 조여들었다.“네, 회장님.”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주민등록, 병역, 면허 기록까지는 정상입니다.하지만 그 이상은… 추적이 어렵습니다.”이회장은 서류 맨 위를 다시 보았다.김다온.스물아홉.최근 1년, 무직.“대리기사로 등록된 건 언제지.”“3개월 전입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