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운전석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전화 끊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아니라, 그가 말했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제가 운전하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 위치 말해주십시오, 기사님.”
숨이 거칠었다.
“돈은… 부르는 대로 다 드리겠습니다.”
이다정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거래가 아니라 부탁이었다. 잠시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무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차를 내리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뭐라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당신 지금 누구한테 훈계하는 겁니까.
그 차는 당장 세워요. 내 딸을—”
“지금 차를 세우면.”
남자가 말을 끊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아버지 말을 중간에 자른 건.
“뒤 차량과의 거리가 사라집니다.”
짧고 정확했다.
“지금 속도와 차선이 그나마 가장 안전합니다.”
이다정은 운전석을 올려다봤다. 남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시선은 전방. 손은 핸들을 정확히 잡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문가 흉내 내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신 신원부터—”
“확인하셔도 됩니다.”
짧은 대답.
“다만 그 전에,
따님을 집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차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이다정은 깨달았다.
이 남자는 돈 때문도 아니고, 명령 때문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이다정을 자신의 책임 안에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낮은 목소리.
“하지만 한 가지라도 틀리면—”
“그땐.”
남자가 숨을 한번 고르며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때였다.
차체가 갑자기 옆으로 크게 흔들렸다.
“—!”
안전벨트가 이다정의 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차가 갓길 쪽으로 밀리듯 멈춰 섰다.
남자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정확한 손놀림으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겼다.
시동은 끄지 않았다. 뒤쪽 차량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비 속에서 남자 하나가 뛰어내렸다.
손에는 흉기.
이다정의 숨이 멎었다. 그 순간.
운전석의 남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약간 돌렸다.
차 안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정확히 이다정을 향했다.
차분하게 말했다.
“다정 씨.”
그리고 아주 짧게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문 잠그고, 고개 숙이세요.
무슨 소리가 나도 나오지 마십시오.”
이다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또각 울렸다.
그다음은 차 밖의 일.
빗소리 사이로, 짧은 마찰음. 거친 숨.
그리고 생각보다 빠른 정적.
이다정은 손잡이를 붙든 채, 숨을 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운전석 문이 다시 열렸다.
김다온이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셔츠 소매에 빗물이 조금 묻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다시 도로로 올렸다.
“…끝난 건가요?”
이다정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네.”
짧은 대답.
그는 병원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내비게이션을 켜지도 않았다.
“경찰은요?”
“이미 오고 있습니다.”
이다정은 더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이 밤이 설명으로 변해버릴 것 같아서.
응급실 앞에 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김다온은 시동을 끄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오늘 일은—
잊으셔야 합니다.”
이다정은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기사님은요?”
잠시의 정적.
“저는.”
그는 백미러로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딱, 한 번.
“대리기사일 뿐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응급실의 흰 불빛 아래에서 이다정은 담요를 덮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몸에는 큰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손끝의 떨림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정아!”
아버지였다, 이다정은 고개를 들었다.
늘 단정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은 처음 보는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몸은 괜찮아?”
그는 다가와 딸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다.
“네, 아빠.”
이다정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훑어보았다.
병실 밖, 복도, 창문 이미 경호 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제야 이다정은 알았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낮게 말했다.
“오늘 네 차를 들이받은 놈,
이미 잡혔다.”
이다정의 눈이 커졌다.
“잡혔다고요?”
“흉기 소지.
그리고— 목적은 너였다.”
그 말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왜요…?”
이다정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버지의 것과 사업가의 것이 겹쳐졌다.
“회사 일이다.”
이다정은 그제야 이해했다.
자신이 ‘딸’이기 이전에 이름 있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걸.
“그럼… 오늘 운전해주신 분은요?”
이다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리기사 말이냐.”
“네.”
“아직 신원 확인 중이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낮게 덧붙였다.
“정상적인 대리기사는 아니다.”
이다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안도보다 먼저 드는 감정이었다.
“그 사람—”
이다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정아.
오늘 밤 일은 여기까지다.”
그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는 내가 붙인 기사만 타.
알겠지?”
이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비 오는 밤, 아무 설명 없이 운전대를 잡고
흉기를 든 남자를 가볍게 제압하던
이름 모를 대리기사.
아버지는 이미 그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엔 우연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다정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는 길지 않았다.[말해라.]“아버지.”이다정은 창밖을 보며 곧장 물었다.“앨리스 밀러 알아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그 침묵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이다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칠 년 전.”“다온 씨가 구하려다 실패했다는 사람.”한 박자.“그 사람 넘겨받은 국내 의뢰인 코드가 ‘태준’이었어요.”김다온의 시선이 백미러를 통해 잠깐 움직였다.서하진도 조수석에서 아무 말 없이 통화를 들었다.창업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살아 있더냐.]이다정의 손가락이 굳었다.부정이 아니었다.“살아 있어요.”짧은 대답.“리치몬드가 잡고 있어요.”다시 침묵.이번에는 조금 달랐다.놀람보다 오래 묻어둔 것이 다시 올라오는 침묵이었다.이다정이 물었다.“아버지가 시작한 일이에요?”[그건 아니다.]대답은 바로 나왔다.[하지만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은 맞다.]김다온이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이다정은 말없이 기다렸다.[처음 리치몬드를 쓴 건 오래전이다.]창업주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해외 사업이 커지던 시절이었다. 전쟁 지역도 있었고, 정부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나라들도 있었어.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통화가 끝난 뒤에도 회의실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리치몬드는 김다온을 요구했다.국내 자금줄이 끊겼고, 민건우도 잡혔다. 남은 위험은 김다온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하지만 이다정이 신경 쓰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상대는 김다온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거래 조건을 꺼내지 않았다.그건 아직 보여주지 않은 패가 있다는 뜻이었다.이다정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보안실로 가요.”정유리가 노트북을 챙겼다.“여기서 하면 안 돼?”“기자들 장비가 너무 많아요.”이다정은 유리벽 너머를 바라봤다.회의가 끝났는데도 기자들은 떠나지 않았다. 재단 사무국 직원과 수사관들도 계속 드나들고 있었다.“저쪽은 다온 씨 전화번호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었어요.”김다온이 낮게 말했다.“대표님 판단이 맞습니다.”
오전 여덟 시 오십삼 분.송하재단 본관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검은 차량이 입구로 들어설 때마다 카메라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전략실 불법 사찰, 창업주 건강정보 유출, 의료법인 차명 자금, 대표 권한 박탈 문건까지. 밤사이 터진 기사만 열두 건이었다.재단은 평소처럼 조용한 얼굴을 유지할 수 없었다.이다정이 탄 차량이 정문 앞에 멈췄다.김다온이 먼저 내렸다.주변을 확인한 뒤 뒷문을 열었다. 이다정은 재킷 단추를 잠그며 차에서 내렸다.플래시가 쏟아졌다.“대표님, 민건우 자문위원과 재단이 관련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창업주 의결권이 이미 위임됐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김다온 경호팀장과의 사적 관계가 경영 판단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이다정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마지막 질문.밤새도록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반복된 문장이었다. 사적 관계. 감정적 판단. 불안정한 승계자.이다정은 질문한 기자를
민건우의 걸음이 서재 문턱에서 멈췄다.창업주 맞은편에 장성우가 앉아 있었다. 두 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고, 옆에는 압수된 휴대폰과 외장 메모리가 놓여 있었다.조금 전까지 전략실 회의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민건우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장성우가 먼저 웃었다.“기다리고 있었습니다.”민건우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장성우.테이블.창업주.그리고 닫힌 서재 문.“자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군.”목소리는 평온했다. 놀란 기색도,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장성우는 그 평온함을 오래 알고 있었다. 민건우는 문제가 생겼을 때 화내지 않는다. 상대가 아직 쓸모 있는지부터 계산한다.장성우가 낮게 말했다.“저도 제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그런가.”민건우가 안으로
철문 밖에서 차량 문이 동시에 열렸다.하나.둘.셋.짧게 끊기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 안으로 번졌다.이어지는 발소리.여럿이었다.서두르지 않는다.서로의 간격도 일정했다.김다온은 철문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오른손에는 권총.왼손은 뒤로 뻗어 있었다.이다정의 앞을 막는 손이었다.“몇 명이에요.”“확인되는 인원은 열둘입니다.”낮고 차분한 대답.이다정은 김다온의 등 뒤에서 철문을 바라봤다.“나갈 수 있어요?”“예.”“이길 수 있냐고 물은 거예요.”
복도를 빠져나온 시각은 새벽 한 시를 넘긴 뒤였다.회사 건물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다. 비어 있는 사무실 사이로 전략실 층의 조명만 유난히 밝게 남아 있었다.이다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민건우가 내일 열 시에 나온다고 했죠.”“예.”김다온이 바로 답했다.“송하재단 비공개 이사회.”“그전에 우릴 칠 거고요.”“가능성이 높습니다.”이다정이 피식 웃었다.가능성.김다온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건, 사실상 온다는 뜻이었다.“그럼 민건우를 만나러 갈 필요 없겠네요.”김다온의 시선이 움직였다.“무슨 말씀이십니까.”“열 시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잖아요.”이다정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민건우가 아침에 들고 나올 패부터 전부 없애요.”대표실 안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서류로 가득했다. 전략실에서 가져온 단말기와 저장장치가 회의용 테이블 위에 놓였다.정유리는 들어오자마자 노트북 세 대를 펼쳤다. 서하진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창가에 섰다.이다정은 테이블 상석에 앉았다.김다온은 옆에 섰다.한 발 뒤가 아니었다.“장성우가 민건우한테 마지막으로 보고하기로 한 시간부터 확인해요.”정유리의 손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정기 보고는 새벽 두 시.”화면 하나가 열렸다.“직접 통화는 안 해. 장성우 계정에서 파일을 올리면 외부에서 가져가는 방식이야.”이다정이 시계를 확인했다.한 시 십칠 분.“사십삼 분 남았네요.”정유리가 고개를 들었다.“가짜 보고 올리게?”“아뇨.”이다정이 장성우의 계정 기록을 바라봤다.가짜는 들킬 수 있다.민건우는 오랫동안 아버지 옆에 붙어 있던 사람이었다. 장성우의 문장과 습관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다면 가짜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장성우가 원래 올리려던 보고를 보내요.”대표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정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대로?”“마지막 한 줄만 바꾸고.”이다정이 말했다.“정리안 2차 노출. 대상 통제 실패.”한 박자 쉬었다.“긴급 직접 지시 요청
“예은아, 왜?”“또 뭐 말하려고?”이다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황예은은 문을 닫자마자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딸깍.“이다정.”예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기사 뭐야.”그 말에 이다정의 펜 끝이 잠깐 멈췄다.“아침에 봤는데.”예은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끌었다.“너무 잘생겼는데?”이다정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거 말하려고 들어왔어?”“지금 회사야.”그러자 예은이 어깨를 으쓱했다.“회사 이전에—”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이다정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우리 초등학교 때부터
똑똑.“올라오시면 됩니다.”문 너머로 들린 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김다온은 짧게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네, 비서님. 알겠습니다.”문을 열자, 넓은 회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심과 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이다정의 아버지, 이회장이었다.그는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마치 김다온이 들어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문 닫게.”김다온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찰칵—이회장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손에는 태블릿 하나가 들려 있었다.“출근 첫날은 어땠나.”“무사히 마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다정은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저택 앞마당에서 엔진이 조용히 걸리는 소리였다.낮게, 그러나 단정하게 이어지는 진동.익숙한 소리가 아니었다.이다정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머릿속에 어젯밤의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다.빗속, 차 안 그리고— 그 남자.이다정은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커튼을 조금 젖히자 아침 햇빛이 방 안으로 부드럽게 흘러들었다.그 아래, 저택 앞마당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어제의 남자.김다온이었다.오늘의 그는 어제와 달
보고서는 얇았다.이상할 정도로.이다정의 아버지, 이회장은서류를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종이 몇 장.운전 경력 몇 줄.그리고—길게 비어 있는 공백.“이게 전부인가.”낮은 목소리였다.하지만 회의실 안 공기가 동시에 조여들었다.“네, 회장님.”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주민등록, 병역, 면허 기록까지는 정상입니다.하지만 그 이상은… 추적이 어렵습니다.”이회장은 서류 맨 위를 다시 보았다.김다온.스물아홉.최근 1년, 무직.“대리기사로 등록된 건 언제지.”“3개월 전입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