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예은아, 왜?”
“또 뭐 말하려고?”
이다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황예은은 문을 닫자마자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딸깍.
“이다정.”
예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기사 뭐야.”
그 말에 이다정의 펜 끝이 잠깐 멈췄다.
“아침에 봤는데.”
예은은 일부러 천천히 말을 끌었다.
“너무 잘생겼는데?”
이다정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거 말하려고 들어왔어?”
“지금 회사야.”
그러자 예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 이전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이다정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우리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사이 아니야?”
이다정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가늘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고?”
“응.”
예은은 아주 당당했다.
“왜냐면.”
그녀가 다정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 표정이 이상했거든.”
이다정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무슨 표정.”
“기사 얘기 나왔을 때 표정.”
그 순간, 이다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흘렀다.
아침의 장면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차 문을 열어주던 손.
흰 장갑 위로 보이던 단정한 손목.
필요한 말만 꺼내는 목소리.
룸미러 속에서 끝내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던 눈.
이다정은 짧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대리기사였어.”
“였어?”
예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운전기사.”
“와.”
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 드라마네.”
이다정은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서 펜이 굴러갔다.
이유 없이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그만해.”
그러자 예은이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조금 더 조용해진 목소리였다.
“근데.”
“너 요즘.”
잠깐 멈췄다.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이다정의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무슨 소리야.”
“그냥 느낌.”
예은은 웃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네 주변에 사람이 늘어난 느낌.”
이다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진동이 책상 위에서 미묘하게 떨렸다.
이다정의 시선이 천천히 화면으로 내려갔다.
[김다온]
— 점심 식사는 밖에서 하십니까?
짧은 문장이었다.
필요한 말만 남긴 딱 그 사람 같은 메시지.
이다정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답장을 쓸까. 말까.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깐 멈췄다.
결국 아무것도 누르지 않은 채
천천히 잠금 화면을 껐다.
그 짧은 동작을
황예은은 놓치지 않았다.
“…설마.”
“그 기사?”
이다정은 대답 대신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펜 끝이 종이 위를 긁었다.
사각, 사각.
하지만 글자는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서류가 아니라 아침에 본 운전석의 뒷모습이었다.
이다정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 남자의 존재가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오늘 밥 뭐 먹을래?”
예은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제 술 마셔서.”
“해장해야 되는데 국밥집 가자.”
이다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답은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다시 휴대폰으로 향했다.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
짧고 단정한 문장.
괜히 신경을 긁었다.
점심 식사까지 보고해야 하는 기사라니.
이다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해.
그런데도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점심시간, 회사 정문 앞.
검은 세단이 조용히 서 있었다.
이다정과 황예은이 나란히 뒷좌석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
둔탁하게 울렸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 더 조용해졌다.
김다온은 백미러로 두 사람을 한 번 확인했다.
짧은 확인이었다.
곧바로 시선을 도로로 돌렸다.
엔진이 낮게 울렸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국밥집이 회사에서 꽤 멀지 않나?”
예은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거기가 제일 낫지.”
이다정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차는 몇 블록을 지나 익숙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교차로 하나를 앞두고 김다온이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브레이크가 아주 부드럽게 잡혔다.
“이쪽은 공사 중입니다.”
차가 자연스럽게 우회로로 빠졌다.
이다정의 시선이 백미러 너머 운전석으로 향했다.
“저기요.”
김다온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기사님.”
“원래 이렇게 간섭하세요?”
예은이 흘끗 다정을 봤다.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아, 간섭은 아니고.”
예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다정이 길에 민감해서.”
이다정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김다온이 짧게 말했다.
“간섭 아닙니다.”
“그럼요?”
“판단입니다.”
단정한 어조였다.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
이다정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기사님이요?”
“네.”
예은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와, 말투 봐.”
“다정아, 이 사람 되게 진지한데?”
이다정은 무시하고 말했다.
“공사 표지 못 봤는데요.”
김다온의 시선은 여전히 도로에 고정돼 있었다.
“공사 구간은
보통 표지보다 먼저 위험해집니다.”
차가 신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점심시간엔
차량 흐름도 불안정하고요.”
잠깐의 정적.
이다정은 팔짱을 꼈다.
“그럼 앞으로도
제 동선, 다 바꾸실 건가요?”
이번엔 예은도 말을 멈췄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 조용해졌다.
김다온은 한 박자 늦춰 말했다.
“필요하다면.”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다정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죠?”
김다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정합니다.”
예은의 눈이 커졌다.
“…오.”
차는 조용히 신호를 통과했다.
이다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하지 않았지만 생각은 분명했다.
이 사람, 기사 치고는 너무 선을 넘는다.
운전석에서 김다온은 아무 표정 없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사이드미러를 스쳤다.
아주 잠깐.
뒤쪽 차선에 붙어 있는 검은 SUV 한 대.
같은 차가 세 번째였다.
김다온의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역시.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선을 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것도.
밤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오히려 이상했다.차 안에는 엔진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도심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차선은 넓었고,가로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갔다.이다정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도황예은과 통화를 했고,기사 반응도 확인했다.한성은 부인에 들어갔다.시장 반응은 더 거칠어졌다.내부 유출자 색출 착수.좋았다.상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니까.그런데 이상하게도,가슴 한쪽은 계속 조용하지 않았다.이다정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운전석.김다온.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말이 없고,흔들림 없고,앞만 본다.그런데핸들을 잡은 손이 평소보다 더 단단했다.
이다정은 걸음을 옮겨 창가 앞으로 갔다.도시가 내려다보였다.익숙한 빌딩들.움직이는 차들.멀리서 번지는 간판 불빛.겉으론 평온했다.하지만 이제 곧흐름이 바뀐다.이다정이 돌아봤다.“예은아.”“응.”“시장에 풀 문구 정리해.”“감정 빼고.”“사실만.”“근데 읽는 사람은 열 받게.”예은이 웃었다.이번엔 진짜였다.“그건 내가 잘하지.”곧바로 자리에 앉았다.타자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탁탁탁탁.이다정은 이번엔 김다온을 봤다.“기사님.”“네.”“당신 쪽은.”짧게.“뭐 할 거예요.”김다온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아주 작게.하지만 이다정은 놓치지 않았다.“저쪽 반응선 보겠습니다.”“누가 먼저 움직이는지.”“누가 지우려 드는지.”“누가 도망가려는지.”이다정이 입꼬리를 올렸다.“좋네.”“그럼 난.”한 박자.“도망갈 구멍 없애면 되겠네요.”오후 세 시.첫 번째 문장이 시장에 풀렸다.익명 계정.전문 커뮤니
아침부터 전화가 쏟아졌다.진동.벨소리.메신저 알림.쉬지 않았다.이다정은 대표실 창가에 서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기사 제목은 거의 비슷했다.젊은 대표의 무리수.무리한 해외 계약.내부 반발 확산.사생활 논란 재점화.표현만 조금씩 달랐다.의도는 같았다.눌러 죽이기.이다정은 화면을 껐다.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책상 위에는 태블릿 두 대.출력된 자료 세 묶음.노트북 하나.황예은이 그 앞에 서 있었다.표정은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진짜 미친 듯이 뿌렸네.”이다정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서서 말했다.“반응은.”황예은이 바로 답했다.“초반은 저쪽이 먹었어.”“기사 먼저 뿌리고.”“여론 붙이고.”“대표 사생활이랑 계약 건 섞어서 끌고 갔어.”짧은 정적.그리고예은이 서류 한 장을 따로 꺼냈다.“근데.”“이건 우리가 먹을 수 있어.”이다정의 시선이 내려갔다.문서 상단.익숙한 회사명.한성.그 밑에는계열사 우회 투자 내역.차명 법인 연결 구조.비공개 접촉 로그.그리고외부 PR 대행비 지출 내역이 붙어 있었다.이다정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출처
객실 안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조금 전 주차장에서 들었던 소리가오히려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둔탁한 충격음.짧은 신음.그리고김다온의 침묵.이다정은 문이 닫힌 뒤에도 한동안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했다.현관 근처.그 자리에 선 채가방 끈만 쥐고 있었다.김다온은 조금 뒤에서 문 잠금장치를 다시 확인했다.체인.보조 잠금.센서.평소보다 더 오래.이다정은 그걸 가만히 보다천천히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힐을 벗었다.가방을 내려놨다.앉지는 않았다.그냥소파 끝에 손만 얹고 섰다.김다온이 돌아섰다.시선이 마주쳤다.짧게.하지만 이번엔둘 다 먼저 피하지 않았
주차장은 늦은 밤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식어가는 엔진 열기. 눅눅한 콘크리트. 멀리서 한 번씩 울리는 차단기 소리.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천장 조명 몇 개가 간헐적으로 깜빡였고, 그 아래로 긴 그림자만 바닥에 눕고 있었다.이다정은 차에서 내린 뒤 잠시 걸음을 늦췄다.오늘 하루가 길었다.너무 길었다.회의실.한성.봉투.김다온의 눈.그리고 마지막.그 선 넘었습니다.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김다온은 차량 문을 닫고 주변을 훑었다. 시선이 짧게 움직였다. 기둥. 사각지대. 맞은편 주차열. 출입구. 익숙한 루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다정은 이제 안다. 저건 습관이 아니라 계산이다. 숨 쉬듯 하는 경계다.이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은 좀 조용하네요.”김다온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답했다.“조용할수록
회의실 공기는 지나치게 차가웠다. 천장 조명은 밝았지만, 사람들 얼굴엔 그림자가 졌다. 긴 테이블. 정리된 자료. 미세하게 울리는 공조기 소리. 그리고 그 끝. 이다정이 앉아 있었다. 등은 곧았다. 손은 테이블 위에 가볍게 얹혀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다.김다온은 그 오른쪽 뒤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한 발 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선이 더 낮게 깔려 있었다. 움직임은 더 적었고, 대신 공기가 더 단단했다.회의실 문이 열렸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뒤이어 비서 둘. 법무 담당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 상대 회사 쪽이었다. 한성. 이다정은 그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사십대 중반.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눈이 웃지 않는다. 협상하러 온 얼굴이 아니라, 압박하러 온 얼굴이었다.남자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대표님,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이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늦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