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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바타에게 (4)-김수현의 마지막 날

Author: 제로슈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3 20:24:05

*

수현은 손에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백화점 과일 코너에서 비상금 통장을 털어가며 산 것들이었다.

이 정도 값어치를 들이밀어야 마지못해 민원을 취소한다는 건 오랜 상담원 생활 끝에 얻은 노하우였다.

원래라면 손목이 저릴 만큼 무거워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조금 전 박건우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레스토랑 에플.

‘알람이’가 사장으로 있는 가게였다.

수현은 잠시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박건우를 만나고 나온 이후로 수현은 더 이상 예전의 수현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는 세진유통의 사장이었고, 같은 날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한순간의 선택으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 쌍둥이 언니까지.

세진유통 외동딸 하은빈.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몸의 온도가 조용히 식는 것이 느껴졌다.

“너니? 김수현?”

고개를 들었다.

알람이였다.

과일 바구니를 힐끔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가져온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묻잖아. 네가 김수현이냐고.”

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내가 김수현인가.

25년 동안 살아온 이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결국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끄덕여?”

알람이의 목소리가 곧장 높아졌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수현은 말없이 알람이를 바라봤다.

눈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신을 한 지 얼마 안 된 듯 유난히 짙고 어색했다.

이상하게도 그게 먼저 보였다.

“너 벙어리야? 왜 대답을 못 해?”

알람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까는 부당하다고 잘도 지껄이더니, 지금도 한번 지껄여 봐.”

피식.

짧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까지 전화 너머에 있던 김수현이 지금의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짧은 사이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들여다봤는데.

알람이 따위가 뭐라고.

알람이의 태도는 점점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수현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과하게 소리 지르는 인물, 감정에 휩쓸린 행동.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수현은 알람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김수현으로서의 삶을 여기서 끝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박건우의 제안처럼 하은빈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

“만일 김수현 씨가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쌍둥이 언니 하은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하은빈의 삶.

외국 유학생 신분인 세진유통 외동딸.

그리고 J그룹 상속자 백도현의 약혼녀.

화려했고, 완벽해 보였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자리.

박건우는 그런 삶을 아무렇지 않게 내밀고 있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다른 선택 사항이 있기는 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는 선택.

세진유통 사장.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린 남자.

하지만 그 선택은 너무 불확실했다.

반겨줄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하은빈과 비교당할 시선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완벽하고 빛나는 언니 앞에서 초라해지는 것.

그건 엄마의 삶까지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건 싫었다.

그렇다면 이 제안을 거절하고 지금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건?

…싫어.

진짜 싫어.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엄마가 퇴원을 결정했던 날.

“수현아. 우리 이제 병원 그만 가자.”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수현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치료하려면 병원을 가야지.”

엄마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돈이… 없다.”

짧은 말.

그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끝났다.

“엄마. 그건 내가 어떻게든…….”

“아니야.”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하면 안 된다. 엄마는 싫어.”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엄마의 병원비 때문에 자신도 얼마나 버티고 있었는지.

그날 이후 엄마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오늘은 엄마가 밥 해줄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글지글.

프라이팬 위에서 계란이 익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간장 냄새가 퍼졌다.

밥 위에 계란 하나를 올려주며 엄마가 말했다.

“이거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

“아니야. 나는 간장계란밥 좋아해.”

수현은 웃었다.

그리고 울음을 참기 위해 밥을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해주는 건데…….”

엄마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날 이상하게 밥이 짰다.

간장이 많아서가 아니라, 울음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이후 수현은 알게 됐다.

돈이 없다는 건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슬픔은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

“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게 과분한 제안이죠. 하지만 당신의 조건을 완벽히 이행하는 건 불가능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들키지 말 것.

그게 건우가 제안한 조건이었다.

“가능합니다.”

박건우가 짧게 말했다.

“대신 김수현 씨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수현은 말을 멈췄다.

자신을 버린 이들을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은빈을 키운 부모님까지 속일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했다.

수현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랬다.

박건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은빈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완벽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짧은 정적.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요.”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물리적 학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건우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쉬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한쪽에 치워진 가구처럼 살았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 모든 게 이해됐다.

“그러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박건우가 말했다.

“하은빈의 부모를 속이는 것은.”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야. 너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우스워?”

어깨를 툭툭 치는 손에 수현은 현실로 돌아왔다.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말로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한쪽에 내려놓은 과일 바구니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단단한 멜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깐의 정적.

알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지금 뭐 하는…….”

수현은 멜론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김수현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온 모든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끝났다.

김수현의 삶은.

내일부터는 하은빈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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