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
“부적절한 상상은 곤란합니다.”
수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네?”
박건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차.
되묻는 버릇을 고치라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수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다짜고짜 올라오라고 하면 누구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단둘이.
게다가 상대는 박건우였다.
세진그룹 이사.
잘생겼고, 돈도 많고,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남자.
로맨스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배경음악이 흘러나올 법했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박건우는 수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하고 계시는군요.”
“뭘요?”
“부적절한 상상.”
“아니거든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수현은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박건우의 시선이 잠시 수현의 얼굴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붉게 긁힌 뺨에.
“호텔에 온 이유는 김수현 씨의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요?”
“그리고 당분간 머무를 곳도 필요하니까요.”
그제야 수현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하은빈이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던 집도, 다니던 회사도, 익숙한 일상도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은 콜센터 상담원이었다.
점심에는 간장계란밥을 먹었고, 오후에는 고객에게 욕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진그룹 이사와 함께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저기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하은빈이 될 수 있을까요?”
박건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되어야 합니다.”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선택하셨으니까요.”
수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
수현은 괜히 층수 표시등을 올려다봤다.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런데…….”
“말씀하시죠.”
“제가 하은빈이 되면, 박건우 씨는 뭐가 좋아지는 거예요?”
건우의 시선이 수현에게 향했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있습니다.”
너무도 간단한 대답이었다.
수현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건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뭔데요?”
잠시 후, 건우가 말했다.
“지금은 모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수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야.
사람을 아바타로 만들겠다는 남자가 설명은 제대로 해주지도 않는다.
계약서도 없이 인생을 바꾸라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궁금하잖아요.”
“궁금한 건 참으셔야 할 겁니다.”
“제가 제일 못하는 건데.”
건우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은 건가?
수현이 확인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박건우는 앞서 걷는 김수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하은빈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달랐다.
은빈은 저렇게 걸음을 크게 내딛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는 언제나 한 발쯤 물러섰다.
무언가 궁금해도 쉽게 묻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살폈다.
김수현은 정반대였다.
겁을 먹으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했다.
조금 전에는 고객의 가게 유리창까지 깨뜨렸다.
건우는 미간을 좁혔다.
생각할수록 터무니없는 여자였다.
은빈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중함이었다.
그런데 김수현에게는 그게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도현이 은빈의 실종을 알아차리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단순한 결혼 문제가 아니었다.
은빈은 도망쳤다.
결혼식 당일, 모든 사람을 남겨둔 채.
그것만으로도 건우는 충분히 불안했다.
은빈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찾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하지만 찾는 것과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건우는 은빈이 남긴 짧은 메모를 떠올렸다.
[도망칠게]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힌 순간이었다.
건우는 그 선택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빌려야 한다고 해도.
“박건우 씨?”
수현의 목소리에 건우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복도 한가운데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세요?”
“그랬습니까?”
“네. 누가 보면 저를 팔아넘길 생각이라도 하시는 줄 알겠어요.”
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이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 묘하게 가슴에 걸렸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수현에게 은빈의 삶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삶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직 전부 말하지 않았다.
백도현이라는 남자도.
은빈이 왜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지도.
수현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같은 선택을 할까.
건우는 자신할 수 없었다.
“들어가시죠.”
그가 객실 문을 열었다.
수현은 문턱 앞에서 멈췄다.
“잠깐만요.”
“또 무슨 문제입니까?”
“여기…… 하루 숙박비가 얼마예요?”
건우가 수현을 바라봤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요. 알아야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모르시는 편이 더 편할 겁니다.”
수현의 눈이 커졌다.
“그 정도예요?”
건우는 대답 대신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넓은 거실.
커다란 창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
그리고 혼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이는 공간.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방이라고?”
뒤에서 박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김수현 씨가 익숙해져야 할 세상입니다.”
수현은 천천히 뒤돌아봤다.
건우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은빈으로 살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제야 수현은 실감했다.
자신이 발을 들인 곳은 단순히 비싼 호텔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입구였다.
*“부적절한 상상은 곤란합니다.”수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네?”박건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아차.되묻는 버릇을 고치라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수현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억울했다.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다짜고짜 올라오라고 하면 누구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그것도 처음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단둘이.게다가 상대는 박건우였다.세진그룹 이사.잘생겼고, 돈도 많고, 어쩐지 위험해 보이는 남자.로맨스 드라마라면 이쯤에서 배경음악이 흘러나올 법했다.물론 현실은 달랐다.박건우는 수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지금도 하고 계시는군요.”“뭘요?”“부적절한 상상.”“아니거든요?”대답이 너무 빨랐다.수현은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박건우의 시선이 잠시 수현의 얼굴에 머물렀다.정확히는 붉게 긁힌 뺨에.“호텔에 온 이유는 김수현 씨의 상처 때문입니다.”“상처요?”“그리고 당분간 머무를 곳도 필요하니까요.”그제야 수현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하은빈이 되겠다고 대답했다.그렇다면 지금까지 살던 집도, 다니던 회사도, 익숙한 일상도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은 콜센터 상담원이었다.점심에는 간장계란밥을 먹었고, 오후에는 고객에게 욕을 들었다.그리고 지금은?세진그룹 이사와 함께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저기요.”수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정말 제가 하은빈이 될 수 있을까요?”박건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되어야 합니다.”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이미 선택하셨으니까요.”수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문이 닫혔다.좁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았다.어색한 침묵.수현은 괜히 층수 표시등을 올려다봤다.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그런데…….”“말씀하시죠.”“제가
*“야! 너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우스워?”알람이가 수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걸었다.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게 궁금해?”“뭐?”“당신이 우스운지, 그게 궁금하냐고?”그것은 수현이 고객에게 처음으로 하는 반말이었다.알람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너…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당신, 진주 브랜드 아파트 109동 701호 살지?”“뭐?”“남편은 세진그룹 마케팅부 부장이고.”알람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너 지금 무슨…….”“자식은 아들 하나. 지금 J그룹에 근무하고 있고.”수현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개인정보에 알람이의 얼굴이 붉어졌다.“당신이 세진생명에 온 가족 보험을 다 들어놨잖아. 그게 무슨 뜻이겠어?”수현이 웃었다.“당신 개인정보쯤은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야.”“너……!”“그런데도 겁도 없이 나한테 함부로 굴었네.”콜센터에서 진상 고객을 만날 때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말이었다.이걸 정말 입 밖으로 내뱉는 날이 올 줄이야.이런 패기가 내 안에도 있었을 줄이야.수현의 머릿속으로 온기를 담고 있지 않은 눈을 한 박건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지금의 자신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박건우 때문에 만들어진 모습이었다.“너 이러고 무사할 줄 알아? 회사에 정식으로 민원 넣을 거야! 아니, 고소하고 언론사에도 제보할 거야. 고객의 개인정보로 협박한다고!”“당신은 아직도 내가 우습구나.”수현은 내려놓은 과일 바구니를 내려다봤다.그리고 가장 단단해 보이는 멜론 하나를 집어 들었다.잠깐의 정적.수현은 알람이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창을 향해 있는 힘껏 멜론을 던졌다.쨍그랑!튀어 오른 유리 파편이 수현의 뺨을 스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수현의 기세에 눌린 알람이가 한 걸음 물러섰다.“이거… 기물 파손이야. 알아?”말투는 여전히 공격적이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그래.당신도 한 번쯤은 두려워해 봐야지.당신이 짓밟았던 사람이 언젠가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수현은 손에 들고 있는 과일 바구니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백화점 과일 코너에서 비상금 통장을 털어가며 산 것들이었다.이 정도 값어치를 들이밀어야 마지못해 민원을 취소한다는 건 오랜 상담원 생활 끝에 얻은 노하우였다.원래라면 손목이 저릴 만큼 무거워야 했다.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조금 전 박건우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레스토랑 에플.‘알람이’가 사장으로 있는 가게였다.수현은 잠시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약속 시간보다 20분이 지나 있었다.그런데도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이상하게도.박건우를 만나고 나온 이후로 수현은 더 이상 예전의 수현이 아니었다.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는 세진유통의 사장이었고, 같은 날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한순간의 선택으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 쌍둥이 언니까지.세진유통 외동딸 하은빈.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몸의 온도가 조용히 식는 것이 느껴졌다.“너니? 김수현?”고개를 들었다.알람이였다.과일 바구니를 힐끔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가져온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내가 묻잖아. 네가 김수현이냐고.”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생각했다.내가 김수현인가.25년 동안 살아온 이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결국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끄덕여?”알람이의 목소리가 곧장 높아졌다.“너 내가 누군지 몰라?”수현은 말없이 알람이를 바라봤다.눈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문신을 한 지 얼마 안 된 듯 유난히 짙고 어색했다.이상하게도 그게 먼저 보였다.“너 벙어리야? 왜 대답을 못 해?”알람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아까는 부당하다고 잘도 지껄이더니, 지금도 한번 지껄여 봐.”피식.짧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까까지 전화 너머에 있던 김수현이 지금의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그 짧은 사이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들여다봤는데.알람이 따위가 뭐라고.알람이의 태도는 점점 거칠어졌다.하지만 그
*하은빈은 결혼식 날, 신부대기실에서 사라졌다.J그룹 장남 백도현과 세진유통 외동딸 하은빈의 결혼식.재계 순위로만 보면 세진유통이 한참 아래였지만, 이상할 만큼 잡음 없이 진행된 결혼이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신부가 드레스를 입은 채 사라졌다는 게.남은 건 단 두 가지였다.벗어놓은 웨딩슈즈 한 짝.그리고 화장대 위에 놓인 짧은 메모.[도망칠게]그 네 글자를 본 순간, 건우는 결심했다.은빈의 선택이 도망이라면, 그 도망만큼은 완벽하게 만들어 주겠다고.세상이 그녀를 다시 끌고 오지 못하도록.백도현도, J그룹도, 그리고 그녀를 인형처럼 다루는 이희숙도.아무도 손대지 못하게.건우는 은빈의 흔적을 쫓았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하은빈이 혼외자였다는 것.그리고 그녀에게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는 것.동생의 존재를 알게 되자, 건우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은빈의 빈자리에 쌍둥이 동생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세진유통 딸의 삶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화려했고, 안정적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자리.물론 그 안에 숨은 함정은 철저히 가려져 있어야 했지만.며칠간의 조사 끝에 건우는 마침내 김수현을 찾아냈다.우습게도 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세진생명 콜센터.심지어 한 달 전, 자신과 통화까지 한 상담원이었다.그녀의 이름은 김수현.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아니, 기회였다.건우는 곧장 그녀를 찾아갔다.중간 과정 없이 바로 만나도 됐다.그런데 상담원 휴게실로 향하던 복도에서 우연히 들려온 대화가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화장실에서 우는 애, 김수현 맞지?”“응, 맞아. 개진상한테 제대로 까였다잖아.”“근데 김수현 종교 있었나?”“왜?”“몰라. 기도를 하는지 계속 뭘 빌던데?”“뭘?”“뭐라고 했더라. 인생을 바꾸고 싶다고. 기회를 달라고?”“에휴. 그게 쉽나. 팀장이 또 뭐라 하겠다. 빨리 들어가자.”상담원들이 멀어졌다.건우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인생을 바꾸고 싶다.기
*“오늘부터 내 아바타가 될 생각이 있습니까?”전화기 너머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박건우였다.“…네?”수현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튀어나왔다.평소 고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우라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매뉴얼대로 응대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들은 말은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내 아바타가 되겠냐고 물었습니다.”같은 말이, 같은 톤으로 반복됐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팀장의 메신저를 받은 건 화장실에서 한참 울고 돌아온 직후였다.[폭탄 통화 요청. 주의해서 응대할 것.]깜박이는 메신저를 보며 수현은 생각했다.오늘은 인생 최악의 날이다.그래도 전화를 걸었다. 매뉴얼을 되새겼고, 이름을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같은 실수는 다시 하지 않겠다는 듯이.그런데 아바타라니.술에 취한 건가?“지금은 상담원 김수현 씨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박건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매뉴얼은 내려놓고, 인간 김수현으로 대답해도 됩니다.”수현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아바타가 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하나였다.푸른 피부의 외계인.하지만 남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리는 없었다.잠깐의 침묵.짧지만 이상하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그리고.“김수현. 고졸. 콜센터 근무 중.”수현의 손이 멈췄다.“작년에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카드론 빚 3천만 원.”“잠깐만요!”수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혔다.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수현은 겨우 목소리를 낮췄다.“…제 뒷조사를 하신 이유는 모르겠지만요.”입술이 바짝 말랐다.“장난이라면 이쯤에서 끝내셨으면 좋겠습니다.”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삶에 싫증 난 부잣집 도련님의 장난감이 된 심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그리고 오늘.”박건우가 말을 이었다.여전히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무적인 목소리였다.“진상 고객과 통화했고.”수
*“감사합니다. 상담원 김. 수. 현이었습니다.”수현은 통화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하루 100콜이 넘는 전화 중 일부는 무작위로 선정되어 통화 품질 평가에 반영된다.이름을 흐리듯 말하는 것 하나로도 감점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특히 지난달은 운이 더럽게 없었다.정상적인 평가에 걸려 점수가 깎였다면 억울해도 인정했을 것이다.문제는 ‘폭탄’을 받은 거였다.100명의 상담원 중 하필 자신이.‘폭탄.’간단히 말하면 이런 사람이다.이름 : 박건우나이 : 32세직업 : 세진그룹 이사취미 : 계열사인 세진생명 콜센터에 전화하기그의 전화를 받은 상담원은 그달 통화 품질 점수 최하점을 각오해야 했다.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폭탄’이었다.수현은 처음 그 전화를 받았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객 정보란에 떠 있던 문구.[★ 비상 비상! 폭탄 폭탄! 무조건 친절 상담 ★]그리고 이어진 낮고 차분한 목소리.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보험 지식 질문들.그 부분까지는 어떻게든 잘 넘겼다.문제는 마지막이었다.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름을 한 자씩 끊어 말하는 걸 잊었다.“김수현 씨?”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는 건 기본 교육에서 배우는 내용 아닙니까?”“네. 맞습니다. 죄송합니다.”“아니면 이름을 흐리는 걸 보니 오늘 상담에 자신이 없었던 겁니까?”“아닙니다. 그렇지만…….”통화는 거기서 끝났다.그리고 돌아온 결과는 QA 점수 최하점.지난달 기준, 30만 원이 그대로 날아갔다.덕분에 이번 달 점심은…….간장. 계란. 밥.수현은 젓가락으로 밥을 비볐다.아무리 간장계란밥이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지만,점심마다 그것만 먹는 건 다른 문제였다.밥을 씹을 때마다 가난이 같이 씹혔다.그리고 이상하게도 박건우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납치해서 방에 가둬두고 세 끼를 전부 간장계란밥으로 먹이는 상상.물론 먹기 전에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