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용강한은 사형이 구축한 이 세계가 단순한 환상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실재하는 세계인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일단 돌아가자구나. 네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소우연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결국 용강한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토록 군자답고 고결한 사부님의 모습에 그녀의 연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사제는 서로를 의지한 채 영력을 운용했고, 찰나의 순간 영경산으로 돌아왔다.용강한은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우연은 그의 앞에서 머뭇거리다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용강한은 입을 벙긋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소우연의 고집스러운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사부님, 제발 저를 파문해 주소서. 진 도사님과 혜숙 상선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니, 이제 저희 두 사람도…”용강한은 손을 들어 소우연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소우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부님의 저 난감해하는 표정은 평소 얼음처럼 차갑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일단 일어나서 내 곁으로 와 앉거라.”그의 곁에 앉으라고? 소우연의 마음속에 환희가 휘몰아쳤다. 사부님과 이토록 가까이 마주한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른다. 그녀는 작은 나무 의자를 가져와 용강한의 발치에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사부님.”용강한은 다시 한번 그런 소우연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을 억누르려 심경을 암송했다. '이 몸에 진청산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것이냐?'용강한이 물었다. “너의 신세 내력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소우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버려진 고아였다는 것밖에는요.”전생에 상운국에서 비참하게 죽었던 일은 그녀만의 비밀이었다.용강한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곳 영경산은 흠천감보다 영기가 훨씬 풍부했다. 그는 도술을 펼쳐 결인을 맺어 소우연에게 전생과 이생
용강한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무시하며 소우연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진청산이 앞을 가로막으며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네가 용강한과 사제 지간의 인연을 끊는다면, 내 너희 둘이 선려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마. 어떠냐?”소우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 대노했던 진 도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사부님과의 사랑을 성취시켜 주겠다니? 그녀는 조심스레 용강한을 살폈다. “사부님…”용강한은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 일은 사형이 참견할 바가 아닙니다.”“왜,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용기조차 없는 것이냐?”진청산이 용강한을 비웃듯 몰아세웠다. “내 이런 기회를 주었거늘, 어찌 이리 요지부동이란 말이냐?”용강한은 진청산을 향해 자신의 진심을 굳이 숨기지 않고 답했다. “연이에게 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아닙니다, 사부님. 제 마음속에는… 오직, 오직 사부님뿐입니다.”소우연은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그녀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 눈망울을 마주하자, 용강한은 버텨내던 기운이 몇 번이고 꺾일 뻔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우연이 자신에게 이번생에도 그리고 다음생에도 오라버니와 여동생으로 지내고 싶다던 그 말을 말이다. 이제 여동생이 될 순 없었지만, 대신 제자가 되었다.진청산은 마치 '자, 보아라. 사형인 내가 네 길을 다 닦아놓지 않았느냐'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은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다. 여인들이 더 이상 뒷방에 갇혀 지내지 않고, 남자들처럼 실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그런 곳이지.”그럼에도 용강한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러자 소우연이 용강한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분명 제게 마음을 주셨으면서 왜 저를 거절하십니까?”말을 내뱉
그랬다. 그녀는 얼어 죽을 것이었다. 이미 한 번 얼어 죽어보지 않았던가. 소우연은 자신의 손발을 꼭 쥐었다. 다행히 이번엔 부러지지 않았으나, 얼음장처럼 굳어 감각조차 없었다.“나는 능운종 영경산의 주인 용강한이다. 내 제자가 되어 함께 능운종으로 가겠느냐?”소우연은 바라 마지않던 기회에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사부님, 제자의 삼배를 받으소서.”그녀는 행여나 그가 자신을 두고 떠날까 봐 허겁지겁 절을 올렸다. 용강한은 그녀가 정식으로 예를 갖추는 것을 보더니, 품 안에서 금으로 만든 장수 목걸이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너와는 인연이 깊구나. 이 장수 목걸이는 내가 우연히 얻은 것인데, 마침 '연' 자가 새겨져 있으니 네게 주마.”이 장수 목걸이는… 그 순간 소우연은 멍해지고 말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분명 전생의 제 물건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스승의 장례비를 마련하려 자신을 팔던 소년을 가엾게 여겨 목에서 풀어 건네주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전생에 목걸이를 건넸던 그 소년의 잔상과 겹쳐졌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그때 그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상운국이 아니었다. 이곳은 현령대륙이라 불렸고, 이곳의 군주가 누구인지, 황제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소우연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가슴이 메었다. 하늘이 정녕 그녀가 베푼 선행을 기억하여, 이곳에서 이토록 선량한 용강한을 만나게 해준 것이라 믿었다. “사부님의 하사품에 감사드립니다.”그녀는 다짐했다. 이번 생에는 영원히 사부님의 곁을 지키며, 시비가 엇갈리는 세상을 멀리하고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하겠노라고. 용강한은 소우연의 생각을 알지 못했으나, 그저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연아, 마음 놓으려무나. 내 곁에 있는 한, 결코 너를 내쫓지 않을 것이다.”소우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그녀는 서서히, 그리고
용강한은 얇은 옷차림이었으나 마치 화로 위에 놓인 듯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신의 혈액이 들끓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린 심마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수년간 억눌러 온 그의 심장이 난폭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그의 뇌리 속으로 한 소녀의 잔상과 함께 강제로 주입된 낯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사부님…”뒤편에서 소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앳된 소녀의 모습을 한 그녀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안개라도 낀 듯 젖어 있는 그녀의 눈망울에는 처량한 비애가 가득했다.“사부님, 사부님… 제가 감히 사부님을 연모하여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할 분을 품었나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사오니, 제발 저를 쫓아내지만 마옵소서.”말이 끝나기 무섭게 투명한 눈물이 진주알처럼 굴러떨어졌다.“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빌고 또 비오니 제발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제게는 이제 가족이 없습니다. 능운종이 바로 소녀의 집입니다.”용강한은 입을 벙긋하며 눈앞의 열여섯,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우연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사형이 말했던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소우연은 사부의 속마음도 모른 채 그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연신 용서를 빌었다. 용강한이 어찌 그녀의 이런 간절한 애원을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그는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연아, 정녕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저는 평생토록 사부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내치지 마소서.”용강한은 할 말을 잃었다. 소우연에게는 상운국에서의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시 사형이 구축한 이 세계가 도대체 어떤 곳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방금 전 진 도사가 설정한 기억의 일부를 받아들인 덕분에, 자신이 '능운종 오선'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 겨우 알 뿐이었다.기억 속의 소우연은 길가에서 죽어가는 것을 그가 구해온, 가장 아끼는 어린 제자였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가 오랜 시간 함께하며 정이 들어버
그리하여 상운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설령 이천이 황제로 등극한다 해도, 이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주 승상이 관복 자락을 걷어 올리며 엎드렸다. “신들, 천왕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백관의 영수인 주 승상이 무릎을 꿇자, 죽음을 자초할 생각이 없는 이상 그 어떤 관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모두 평신하라.” 이천이 입을 뗐다. 관리들이 서둘러 일어서는 소리가 어수선하게 울려 퍼졌다. 이천은 하늘을 가득 메운 눈송이와 이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현명루 방향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들은 모두 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라. 이토록 눈이 쏟아지니 필시 곳곳에 설해가 있을 것이다. 돌아가서 구호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라.” “명 받들겠나이다.” 관리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궁을 빠져나갔다.이천은 당안에게 명하여 위진규, 심소균, 주 승상 등 주요 대신들을 남게 한 뒤, 몸을 돌려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일행들은 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 대인,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렵소. 곧 천왕 전하께서 의문을 풀어주시지 않겠소?”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이천을 따라 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월왕 전하, 왕비 마마를 뵙나이다.” 대신들이 다시 예를 갖추자, 이진이 손을 들어 보였다. “모두 평신하십시오.” 이진과 심연희의 얼굴에 서린 참담하면서도 가라앉은 기색을 본 대신들은 직감했다. 태상황과 태후, 그리고 폐하와 심 대인에게 분명 무슨 중대한 변고가 생긴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갑작스럽게 황태녀를 세우고 운유를 떠난단 말인가. 흠천감이 통째로 평지가 되었는데 운유라니, 그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 사실상 붕어하신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하지만 천왕과 월왕이 입을 열지 않는데 누가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겠는가.이천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남겨진 심복 대신들에게 흠천감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무어라 하셨
진우는 이천과 이진 남매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이진은 갓 해산하여 몸이 몹시 쇠약해진 터라, 오직 이천만이 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다.“전하, 부디 결단을 내려주소서.”진우의 뜻을 이천이 모를 리 없었다.“모두 반드시 돌아올 게다!”이진 역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맞아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꼭 돌아오실 거예요. 언니랑 외삼촌, 초운 오라버니도 모두 다 같이 돌아올 거예요!”진우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이천은 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전에 진이 너가 말하지 않았느냐. 영이가 우리 아이 중 누구라도 황태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면서?”“네, 그랬어요.”“그렇다면 먼저 황태자를 세우고, 너와 내가 섭정왕으로서 조정의 정무를 돌보자구나.”이진은 몸을 떨며 울먹였다.“오라버니… 전 조정 일을 잘 알지도 못하는 걸요. 그냥 오라버니께서 다 결정해주세요.”진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네 아이가 모두 황태자 후보가 된다면, 훗날 서로 간에 틈이 생길까 두렵습니다.”모든 황족 자손이 이천, 이영, 이진 남매처럼 그 용상을 서로 양보할 만큼 우애가 깊지는 않을 터였다. 이천 역시 진우가 우려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언니가 짊어져야 했던 압박이 얼마나 컸는지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오라버니, 언니가 말했잖아요. 남녀를 불문하고 가장 먼저 태어나는 아이를 전하로 삼겠다고요.”이진이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언니의 뜻과 아바마마, 어마마마의 염원대로 찹쌀이가 대통을 잇고 오라버니가 보필한다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예요!”이천은 깊은 숨을 내뱉었다.“그래, 알겠다.”그는 진이의 뜻을 이해했다. 이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눈앞에는 백설이 낭자한 눈밭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며 기다리고 있는 대신들이 보였다.“전하,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백관의 영수인 주 승상이 이천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태상황과 태후,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