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겁니까?”소우연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용강한이 대답했다.“그저 여기저기 몸이 약한 것뿐입니다.”그저 몸이 약한 것뿐이라니…용강한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있었다.한편, 소우연은 용강한의 말뜻을 알아들었고 더 이상 그를 위해 진맥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리고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대감께서는 소우희가 태자 저하께 도움을 청할 거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말씀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금…”말을 하던 소우연은 용강한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전 열두 살 때 남강에서 한 소년을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전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출하면서 그 소년을 치료해 주었지요. 그리고 이 일을 소우희도 알고 있습니다. 전 소우희가 이 일로 저를 모함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허허…”소우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강한이 허허 웃었고 그 모습에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지금 날 비웃고 있는 건가?’소우연이 당황하고 있던 그때, 용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마, 그런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그는 쪽지를 반듯하게 펴면서 물었다.“마마, 혹시 이 그림 속의 옥패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소우희 그자가 이 일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쓸 게 뻔합니다. 그래서…”“마마께서는 태자 저하가 그자의 말을 믿고 마마께서 어린 시절 낯선 남자와 밀회를 했다고 의심할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이게 바로 소우연이 가장 걱정되는 일이었다.하지만 전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용강한을 보며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대체 무슨 뜻인 걸까?“마마, 일단 이 옥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주, 주인이 누구입니까?”소우연은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용강한의 표정에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태자 저하의 것입니다.”용강한의 대답에 소우연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그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저, 저하께서 제가 저하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십니까?”어쩐지 소우연은 이육진이 자신에게 너무 잘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소우연의 말을 부인했다.“하지만 마마께서 소우희 대신 저하와 혼인을 한 첫 한 달은 저하께서도 모르고 계셨습니다.”‘아니… 그럼 이육진은 처음에 왜 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손을 그어가면서 덕빈 마마의 눈을 속인 것일까?’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용강한을 쳐다보자 용강한이 이내 입을 열었다.“마마, 혹시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소인이 마마께 했던 그 질문이 기억나십니까?”순간,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되물었다.“대감님께서 이렇게 용하신데 제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대감님께서 맞추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용강한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마마, 태자 저하께 마마가 악몽을 자주 꾼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 그 악몽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전생에 벌어졌던 일들이기에 마마께서 소우희와 이민수 두 사람을 그토록 증오하고 원망하시는 것 아닙니까?”용강한의 말에 소우연은 주먹을 꽉 쥔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어젯밤 이 말들을 이육진에게 했을 때 이육진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는데 지금 용강한은 그녀에게 그녀가 꾼 꿈들이 전생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닌지 묻고 있다.용강한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고 강경했다. 마치 자신이 한 얘기가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마마, 너무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소인이 마마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 전에 소인이 말했던 것처럼 소인은 언제나 태자 저하 편입니다.”용강한의 위로가 소우연의 마음을 조금 달래 주었다.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소우연은 이런
”운명을 거스른다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전생에 대해 얘기하시는 걸 보니 대감께서도 이민수가 전생에 황위에 올랐다는 걸 알고 계신 겁니까?”“네, 알고 있습니다.”“그럼 소우희가 황후가 되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네, 소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인은 전생에도 여전히 흠천감의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마를 도와 복수를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하의 운명도 거스르지 못하였지요.”“아니, 이렇게 대단하신 대감께서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셨는데 저희가 이번 생에서 어찌…”“이번 생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건 마마께서 혼인 당일 도망을 가셔서 소씨 가문 앞에 버려져 결국 목숨을 잃은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시점부터 달라졌습니다.”심장이 더욱 터질 것만 같은 소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이육진이 전생에 왜 그녀의 시체를 거둬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이 모든 건 다 이유가 있었지만 소우연은 오늘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그러다가 용강한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전생에 여전히 흠천감의 감정이었던 자신이 소우연을 위해 복수를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할 때 그의 눈빛은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다.소우연은 이제 용강한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하지만 단지 장수 목걸이 하나를 받은 일을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결국 은혜까지 갚으려고 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잠깐만…흠칫하던 소우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용강한을 쳐다보며 물었다.“그럼, 그럼 대감께서는 제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소우연의 물음에 용강한이 손가락을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소인은 점괘를 볼 줄 알지 않습니까?”“그럼 대감님은요? 대감님도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 겁니까?”용강한은 피식 웃으며 소우연의 말을 묵인했고 그 반응에 소우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완전히 달라진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다.“그런 줄 알았다면! 진작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 그동안 많은 비밀을 마음속에 안고 사느라
”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강한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다. “그럼 마마 뜻은 우리 모두는 그저, 그저 소설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한편, 소우연은 많이 놀란 용강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흠천감이든 용 대감이든 저희가 접하고 있는 모든 건 그저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저희에게 부여한 것일 뿐입니다.”한참 동안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는 용강한을 보며 소우연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대감님, 괜찮으신 겁니까?”“어쩐지… 어쩐지…”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용강한이 갑자기 실성한 듯 허허 웃기 시작했고 그 반응에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그런 거였군요.”용강한은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결국 허약한 몸을 얻게 되고 이렇게 외롭게 살고 있는 것도 작가가 그에게 부여한 운명이다.용강한이 다른 사람에게 제2의 인생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이제 말이 되는 듯하다. 이 세상 자체가 소설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이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정말 커다란 운명의 틀을 거슬러야 한다…“그래서 마마께서 소우희와 이민수의 혼사를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심지어 그들이 죽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하신 거였군요.”소우연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자들이 하루라도 살아있으면 전 절대 안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계속 궁금하고 신경이 쓰였던 겁니다…”소우연은 그 점이 신경 쓰이면서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소우연은 용강한에게서 그 대답을 듣고 싶으면서도 그 대답을 듣게 될까 봐 긴장되었다.이때, 용강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운명의 궤도는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마께서 사망하시고 나서 알게 된 게 전부 사실이라면, 이 세상 자체가 한 권의 소설에 불과하다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이제 더 이상 이 소설을 작성한 작가가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궤도가 분명 바뀌고 있습니다…”그는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최소한
전생에 용강한은 이민수가 어떻게 황위에 오르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고 평생을 바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과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나서야 이민수의 미래의 성취를 알게 되었다.그리고 혼일 당일,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소우연이 나중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는 걸 보면 이 세상이 한 권의 소설에 불과하다는 그녀의 말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한편.소우연은 태자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참 전에 돌아온 이육진은 그녀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에게 물었다.“어디 다녀온 것이냐?”“용 대감을 만나고 왔습니다.”“용강한 그자를?”이육진은 조금 의아했다. 조금 전에 소우희가 만나자고 약속한 일품루에 갔는데 그 어디에도 소우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한참 기다리다가 저택으로 돌아온 이육진은 문지기를 통해 소우연이 진우와 정연을 데리고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용강한 그자는 왜 만나러 간 것이냐?”이육진은 조금 의심되었다. 소우연은 전에 분명 용강한을 만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한편, 이육진의 물음에 소우연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대답했다.“걱정되는 일이 한 가지 있어서 찾아갔습니다.”“무슨 일? 소우희가 도망갈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냐?”“아닙니다. 소우희가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써서 저하 앞에서 저를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 저하께서 결국 저를 오해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습니다.”그 말에 이육진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연아, 넌 아직도 네가 내 마음속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네?”“난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너를 의심하지 않아.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평생이라고 하셨습니까?”“그래, 평생.”순간, 이육진을 와락 껴안은 소우연은 팔로 이육진의 목을 감싼 채 그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갑자기 왜?”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육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때, 소우연이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소우희가 옥패 그림으로 널 운불사에 유인해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소우연의 안위 문제가 제일 중요했기에 이육진은 일단 용강한에 관한 일을 내려놓았다.한편,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일부러 잔뜩 화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그때 당시 살린 소년이 부군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소우희가 그때 당시 제가 매일 밤낮으로 외출하여 낯선 남자를 치료해 준 일로 부군 앞에서 제 명예를 더럽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운불사까지 찾아가게 된 것이지요. 그때 당시 살린 소년이 부군이라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부군 때문에! 제가 소우희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미리 도망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전 진작 소우희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을 겁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그 일은 확실히 내 잘못이 맞다. 내가 너에게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앞으로 절대 너에게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이육진이 소우연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하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에잇, 됐습니다. 마음이 넓은 제가 부군을 용서해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미소를 짓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그럼 이제 얘기해 줄 수 있겠느냐? 넌 용강한 그자를 만나러 다녀오자마자 그자를 용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자가 네 친정 식구가 되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이냐? 거짓말은 절대 안 된다. 우리는 조금 전에 서로 숨김없이 다 얘기하기로 했어.”서로 숨김없이 다 얘기하기로 한 건가? 분명 본인이 앞으로 소우연에게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놓고?하지만 어차피 이제 두 사람은 한배를 탄 전우이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기에 당연히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은 예전에 자신과 용강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네가 그자도 살려준 것이냐?”이육진이 살짝 질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소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전 다른 사람을 살리면 안 됩
이종대가 쓴 마지막 유언 속 대부분 내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소우희가 평춘왕 이종대를 어떻게 모함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확실하게 적혀 있었다.때문에 소우희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반면, 평춘왕세자 이지윤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지윤이 자신의 계모를 이용하여 자신의 친부를 살해했다고 생각이나 할까?이육진이 보낸 호위무사가 암암리에서 평춘왕 관저의 동향을 자주 살피지 않았다면 이육진마저도 믿지 못했을 것이며 이지윤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육진은 평춘왕 관저의 시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이 쓰이는 건 소우연이 이를 갈 정도로 증오하는 소우희이다.소우희를 성공적으로 체포하고 소우희가 확실하게 숨을 거둬야 소우연이 마침내 안심할 수 있다.“평춘왕은 이틀 뒤에 장례를 치르는데 혜주가 평춘왕 관저를 지키지 않고 있단 말입니까?”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이 설명했다.“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혜주를 사간 사람은 기루의 아령이라는 기생이고 혜주를 소우희 곁으로 보낸 건 이지윤 그자였다.”그렇게 보면 소우희와 이지윤 그리고 아령까지 전부 같은 꿍꿍이를 품은 자들이다.이제 평춘왕이 사망했으니 혜주는 이지윤의 사람으로서 그녀가 평춘왕 관저에 남아있든 아니면 아령 곁에 있든 모두 합리적이다.그들이 이렇게까지 대담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이지윤과 아령 사이에 그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기생집을 방문하는 손님과 기생의 관계이니까.“아령이라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래도 수상한 것 같습니다.”소우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이육진을 쳐다보았고 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그자가 어떤 사람이든 절대 널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그 말에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소우연은 아령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진우와 진규 등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소우연과 꽤 많이 닮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민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힌 ‘혜주’에게 다가가 물었다.“네, 네가 소우희냐?”소우희?자신의 이름 석자를 부르는 이민수를 보며 소우희는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예전에는 분명 우희라고 다정하게 불렀는데 말이다.소우희가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 이민수는 조금 놀란 것 외에 전혀 미안해하지도, 그렇다고 가여워하지도 않았다.‘이지윤 그놈은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른 놈들과 똑같은 개놈이었어! 허허, 결국 모든 죄를 나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간 거야!’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소우희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며 악몽이라면 이 꿈이 한 시라도 빨리 깨기를 바랐다.“세자 저하…”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소우희는 이내 얼굴의 화장도 대부분 지워버렸다.그렇게 서서히 혜주의 모습이 없어지고 소우희의 얼굴이 나타났다.그 모습에 이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언성을 높였다.“넌 평춘왕을 살해했어! 그런데 지금 어떻게 내 저택에 나타날 생각을 하는 것이냐? 소우희, 너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야?”“뭘 어쩌려고 그러냐고요?”이민수의 말에 소우희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는다고 해도 이민수가 옛정을 생각해서 몇 마디 겉치레라도 할 줄 알았는데 몇 달 전까지 그녀에게 애정을 쏟던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자 소우희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반대로 소우연 그 계집애에게 지극정성을 보이는 이육진을 보며 소우희는 깨달은 게 있었다. 이지윤이나 이민수처럼 여자를 이용하고 버리는 남자들은 이육진과 태자 자리를 쟁탈할 자격도 없다.사실 소우희는 이민수에게 이지윤을 조심하라고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이민수와 이지윤 둘 다 좋은 사람은 아니기에 나쁜 놈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던 소우희는 이민수를 보며 말했다.“세자 저하께서도 참 매정하십니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