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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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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8화
“그런 적이 있었소?”이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심연희를 쳐다보았다.“낭자가 그런 것도 할 줄 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네, 하지만 이것도 3년 전의 일입니다. 저하와 비하면 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봐야죠.”말을 하던 심연희는 연기가 너무 매워서 참다못해 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천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끝까지 참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이천이 말했다.“낭자, 그러지 말고 서재로 가서 잠깐 기다리고 있게. 거긴 연기가 여기보다 덜할 것이오.”“그건 안 됩니다. 저하께서 차를 끓이시는데 전 이 기회에 곁에서 많이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차를 끓이는 건 왜 배우려는 것이오?”심연희가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그리고는 이천의 반응을 굳이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나중에 제 서방에게도 차를 한 잔 끓여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이천은 심연희의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다가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연희 낭자는 참 직설적이고 솔직한 것 같소.”심연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덕이 완전히 연소하기 시작되고 나서 연기는 더 이상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화덕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이천은 곁에 둔 찻잔과 받침대 그리고 집게까지 챙겨 다시 한번 깨끗하게 씻은 뒤 차분하고 태연하게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심연희는 그 모습을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천을 연모하고 있어서 그가 멋지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좋아하고 있는 게 바로 이천의 저런 태연하고 여유 있는 모습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그러다가 이천이 차 한 잔을 심연희 앞에 내려놓자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심연희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한 뒤, 찻잔을 들고 호호 불다가 한 입 홀짝 마셨다.“향이 너무 좋네요. 쓴맛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입안에서 단맛이 은은하게 퍼집니다. 올해 봄에 나온 백차 아닙니까?”심연희의 말에 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단하시오.”한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7화
심연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번에 이렇게까지 큰 용기를 냈는데 그녀의 용기가 헛되이 무너지지 않고 두 사람 서로의 유일한 참 인연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랐다.한편, 이천은 계속 원치각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그는 선선한 그늘을 찾아 매미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앉아있었다.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난 뒤, 굳게 닫힌 방문 안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하, 저 씻고 옷도 갈아입었습니다. 밖에 많이 더운데 그러지 말고 방으로 들어오십시오.”심연희의 목소리에 잠깐 주춤하던 이천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방에 들어섰을 때, 심연희는 그의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그녀에게 현저하게 크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어울리고 예뻤다.순백의 모습은 고요한 호수에 핀 버들개지 마냥 하얗고 순수했다.이내 정신을 번쩍 차린 이천은 곧바로 심연희에게 말했다.“밖에 계속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잘 알고 있습니다.”사람들이 계속 방문 밖에 서있는 이천을 보면 수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낭자가 이곳에 있는 건 아무도 모르니 걱정하시 마시게.”“전 두렵지 않습니다.”그러다가 잠시 머뭇거리던 심연희가 이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다만 저하께 불편과 민폐를 끼칠까 봐 조심스러울 뿐입니다.”이에 이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도 심연희처럼 유언비어가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그런 걱정은 할 것 없소. 유언비어는 나한테 전혀 타격을 줄 수 없소.”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때, 이천은 호심도에서의 그날이 떠올랐다.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화덕을 찾아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저하, 차를 끓이시려는 겁니까?”심연희가 이천을 뒤따르며 물었고 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계속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기에는 서로 너무 어색할 것 같았다.한편, 심연희는 곁에 놓인 찻잔과 주전자를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6화
“감사 인사는 할 것 없소. 다만 낭자가 입고 있는 옷이 물에 흠뻑 젖은 것 같은데.”이천의 말에 심연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전… 전…”그녀는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가 옷이 흠뻑 젖은 채로 밖에 나가서 새 옷을 구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이천은 심연희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허리를 숙여 심연희를 번쩍 안아들고는 말했다.“일단 내 처소로 가는 게 좋겠소.”“감사합니다, 저하.”소녀는 나긋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백옥 같이 하얀 손으로 이천의 팔을 꽉 잡았다.한편, 이천은 슬쩍 고개를 숙여 심연희를 쳐다보았다. 쑥스러워서 발그레한 얼굴에 새빨간 입술까지 그 모습은 예쁜 인형과도 같았다.이런 소녀가 그때 당시 어떻게 나쁜 놈 두 명을 그렇게 단번에 제압했을까?그러다가 마음이 흔들린 이천은 더 이상 심연희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는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혹시 심연희가 불편하지 않은 지 그것만 살폈다.자신의 방에 들어선 이천은 바로 큰소리로 검오를 불렀다.“검오야.”하지만 검오는 이천 앞에 나타나지도, 이천에 부름에 응하지도 않았다.이에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천은 심연희를 안고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 옆에는 병풍이 보였고 병풍 뒤에 욕조가 있었다.심연희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혹시라도 너무 긴장해서 말실수를 할까 봐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다가 욕조를 본 순간, 심연희의 표정은 더욱 긴장했다. ‘천왕 저하는 지금 나한테 저하의 욕조에서 씻으라고 하는 건가?’“잠깐만 기다리게.”말을 마친 이천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그 뒤로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이천이 따듯한 물 두 통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심연희가 보는 앞에서 물로 욕조를 한번 깨끗하게 닦고는 들고 온 따듯한 물을 욕조에 부었다.“검오에게 낭자 호위무사를 찾아보라고 했소. 그자가 국공부에 가서 낭자가 오늘 입은 것과 비슷한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5화
애정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이천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심연희는 이천에게 거절을 당하자 투명한 진주와도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고는 세상 가련한 표정으로 이천에게 너무 냉정하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자의 마음도 모르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원망을 하기도 했다.자신이 꿨던 꿈이 생각나자 이천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는 이 모든 게 향초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 심연희 사이에 진짜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천은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한참 뒤, 글을 읽는 소리에 다시 눈을 뜬 이천은 창문을 통해 비춰 든 햇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몸을 일으킨 이천은 연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는 향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그리 후덥지근하고 답답하지도 않았다.이번에는 잠을 꽤 깊이 잔 것 같았으며 더 이상 꿈도 꾸지 않았다.이에 이천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겨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났군.그리고는 침상에서 내려왔다.한편, 기척을 들은 검오가 세숫물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저하.”이에 고개를 끄덕인 이천이 말했다.“이런 건 내 스스로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폐하께서 저하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소인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폐하께서는 앞으로 넌 내 명령에만 따라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지.”“네, 저하.”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간단한 세안을 마친 뒤, 글을 읽는 소리도 멈추었다.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은 정오가 된 듯했다. 오늘 이천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원에 관한 일도 아직 처리하지 않았다.주위를 살피던 이천은 그제야 사라진 검오를 눈치채게 되었다. 그는 검오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조금 뒤, 검오가 서원 식당에서 준비한 음식들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이에 이천이 고맙다는 듯이 말했다.“난 이제 점점 네 손길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구나.”“당연히 적응하셔야 합니다.”검오의 말에 이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이천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4화
고개를 쓱 돌린 이천은 얼마 남지 않은 향초를 보며 살짝 의심이 들었다. 이 향초는 이영이 귀인을 찾아가 직접 구해온 것이라고 했다.벌레를 쫓고 심신의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향초라고 했는데 벌레 쫓는 효과는 더할 나위 없지만 심신의 안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이천은 이내 커다란 병 안에 들어있는 향초를 꺼내 손가락에 살짝 묻힌 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아 시름을 놓고 향초를 내려놓으려던 그때, 갑자기 뭔가 따스하고 촉촉한 향이 코를 확 자극했다.이건…이천은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이내 손가락에 더욱 듬뿍 묻혀 냄새를 맡았다. 맡으면 맡을수록 충격을 금치 못했다.그리고는 향초가 담긴 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아주 대단하네. 영이가 나한테 이런 성분이 들어있는 향초를 주다니. 이건 내 마음을 흔들려는 게 아니라 내 정욕을 끄집어내려는 거야!’이천은 향로 안에 있는 향초를 전부 버렸다. 그러고는 예전에 쓰던 향초를 꺼내 불을 피우고는 이영이 준 향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만약 그가 섣불리 이 향초를 돌려보내면 그녀들은 또 다른 꿍꿍이로 그를 상대할 것이다.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던 이천은 이내 향초를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모른 척하면 한동안은 조용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이천은 자신이 서원에 가지고 온 비단함이 떠올랐다.이내 돌아선 이천은 작은 서재로 가서 책장 속에서 비단함을 찾아 꺼내 들었다.비단함을 열었더니 안에 한 폭의 그림이 보관되어 있었다.이천은 그 그림을 펼쳐 보았다.그림 속 소녀는 정갈에게 빗은 머리에 분홍색 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있었다.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에 작은 보조개가 보이기도 했으며 그 모습은 너무도 밝고 명랑했다.이 그림은 당시 심연희가 호심도로 보낼 때, 이천이 몰래 남겨둔 것이다.이천은 그 뒤로 몇 번이나 그림을 꺼내 보면서 자신과의 인연이 보일까 꼼꼼하게 훑었다.정 태부와 용 숙부께서 그와 심연희 사이에 인연이 있다고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563화
아달이 따라 들어가려고 하자 경장명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넌 들어오지 마!”아달은 바로 문 밖으로 물러났다.한편, 낮잠을 자고 있던 몽춘은 경장명의 분노에 가까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그녀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침상 곁에 서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경장명의 모습에 겁을 먹은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이내 빠르게 침상에 기어 내려와 경장명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대, 대, 대감님…”몽춘은 너무 무서워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녀는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뱃속에 대감님의 아이가 생겼는데 돌아오면 안 된단 말인가? 경씨 가문의 피붙이가 이대로 밖에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몽춘은 감히 그럴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대감님이 너무 그리웠기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하지만, 하지만 왜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걸까?“그 여인이 나와 혼약을 취소하겠다고 하였다. 이제 만족하느냐?”낮게 깔린 경장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이에 몽춘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경장명을 연모하면서도 두려워했기에 직접적으로 심연희를 찾아가 애원했던 것이다.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대, 대, 대감님,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말을 하던 몽춘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예전의 온화하고 다정하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경장명을 바라보았다.이제 경장명의 눈빛에는 증오와 분노 그리고 혐오가 가득했다.“일부로 그런 게 아니라는 네 한마디에 그 여인이 나와 혼약을 취소하게 만들었다고! 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이다!”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경장명은 이를 악물며 호통을 쳤다.몽춘은 그의 눈빛에서 살기를 보았다.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벌벌 떨던 그녀는 뱃속에 있는 경장명의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대감님,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소인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소인은 그 어떤 명분도 바라지 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