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후, 연우는 주씨 가문의 주선으로 도성에서 유명한 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연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했다. 영리하고 사리도 밝은 연우는 새로운 환경에서 점차 표정이 편안해졌다.연우가 규칙적인 서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에게도 제법 여유가 생겼다.나는 자수 공방 일을 그만두고 다시 붓과 조각칼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분야인 장신구 제작으로 돌아갔다.구슬과 옥으로 만든 비녀와 팔찌, 영롱한 옥패들.틈틈이 고서를 뒤적이며 기술을 연구하고, 직접 하나씩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나는 어느덧 도성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는 장신구 장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나를 ‘최 사부’라 부르기 시작했다.그리고 이 2년 사이에 나는 온화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닌 의원, 노태현을 만났다.그는 주진혁처럼 명문가나 권력을 지니지도 않았고, 아찔하고 충격적인 과거도 없었다. 그는 차분하고 신중했으며, 어진 마음과 올곧은 기품을 지닌 사람이었다.우리는 혼례를 올렸다.아주 간소하게 치렀고, 정말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했다.혼인하던 날, 연우는 나와 노태현의 손을 맞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머니, 오늘 정말 고우십니다.""아버지도 오늘 무척 멋지시고요."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마음속에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과 충만함이 가득했다.주진혁은 혼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대신 사람을 보내 축하 선물을 전해왔다. 보석이나 은자가 아니라, 강녕의 직물 생산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보내는 추천서 한 통과 짤막한 쪽지였다."설아 네 재능이라면, 마땅히 황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이 되어야지.""강녕 관청의 조 대감은 나와 구면이니, 너를 잘 보살펴줄 것이다."나는 정중히 거절했다.우리는 여전히 연우의 일로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는 정기적으로 연우를 주국공부로 데려가 시간을 보냈다. 연우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우리 둘이 함께 자리를 지키며 아이에게
김옥란의 측근 시녀가 직접 내 거처 마당으로 찾아왔다.그녀는 공손하게 말을 전하며, 김옥란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했다.나는 근처 찻집에서 김옥란을 만났다.연회 때의 위엄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눈빛과 표정에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설아야, 내가 오늘 온 것은 진혁이를 대신해서, 또 내 자신을 위해서 몇 마디 전하려 한다. 예전 일은 내게도 잘못이 있으니, 이제 와서 자애로운 어른 흉내를 내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라는 걸 안다. 허나 내 마음이 참…"나는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이렇게 몸을 낮추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마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저와 진혁이는 이미 약조를 하였습니다. 열흘마다 오는 휴일에는 연우를 국공부로 데려가 며칠 묵게 하기로요.""저는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어미가 아닙니다. 아이가 아비와 할머니의 가족 간 정을 누리게 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정은 조금도 빼앗지 않겠습니다."김옥란은 내 말을 분명히 알아들은 듯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내 그때 과연 너를 잘못 보지 않았구나.""넌 예나 지금이나… 참 사리에 밝고 분별이 있구나."김옥란은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며 조심스레 떠보았다."설아야, 보다시피 이제 연우도 되찾았으니 온 가족이 다시 모였잖니. 진혁이 저 녀석도… 내가 지켜보니, 마음속으로는 한 번도 너를 놓은 적이 없는 게 분명하더구나. 게다가 너희 사이에는 연우라는, 끊을 수 없는 핏줄까지 이어져 있잖니.""혹시… 다시 한번 서로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겠느냐?"'다시 한 번 기회를 주라고?’나는 투박한 찻잔을 들어 올려, 그 안에서 떠다니는 찻잎을 바라보았다.5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바탕 뒤집힌 삶 속에서 서로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와 변화가 깊이 새겨졌다.하지만 어떤 사람과 어떤 길은, 한번 갈림길에서 어긋나면 다시는 나란히 걸을 수 없는 법이다.내가 막 입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연우가 방 스승님 밑에서 글을 배우는 것만 마치게 해주거라. 정식 서당에 들어갈 때쯤… 그때 떠나도 늦지 않다."주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다. 네 뜻대로 하마.""내가 믿을 만한 호위무사들을 붙여 몰래 따라가게 할 테니, 아무 걱정 말거라."이후 나는 연우를 데리고 주진혁이 마련해 준 한적한 별채로 옮겨갔다.주진혁은 확실히 내 마음을 헤아린 듯했다.마당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자가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세간살이는 소박하면서도 깔끔했다.연우는 새집이 조금 신기하면서도 낯설어 어쩔 줄 몰라 했다.나는 연우를 품에 안고 이제부터 새로운 날들이 시작될 것이며, 어미가 늘 곁에 있어줄 거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타일렀다.연우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의지하듯 내 품에 파고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만 있으면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그렇게 날들은 겉보기에는 평온하게 흘러갔다.나는 평소처럼 자수 공방으로 출근했지만, 공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예전엔 나를 함부로 부려먹던 관리인이 나를 보자마자 아첨하듯 웃으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심지어 먼저 나서서 더 수월한 일로 바꿔주겠다고까지 했다.장채은과 함께 내 흉을 보며 비웃던 자수공들도 이제는 마주칠 때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는데, 그 얼굴에는 누가 봐도 나에게 잘 보이려는 기색과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대를 이을 수 없는 몸이 된 국공부 세자에게, 파혼당한 최씨 가문의 가짜 딸이 몰래 낳아 기른 다섯 살배기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최설아가 바로 주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을 낳아준 친어머니라는 사실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그날 점심 쉬던 중, 찻집에서 나오는데 최태수와 임혜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두 사람의 얼굴에는 그날 연회에서 보였던 냉담함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지나칠 정도로 살가운 기색이 자리하고 있었다.최태수가 손을 비비며 아첨하듯 웃
나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연우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연우는 놀란 내 표정을 알아챈 듯, 입술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빛이 바랜 자신의 신발 끝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이름만 들어도 몰래 숨어서 우셨지요.""저는 그게 뭔지 몰라서 옆자리에 앉은 돌이에게 물어봤습니다. 돌이네 아버지도 돌이 어머니를 버렸다고 하더군요. 돌이가 그러는데, 돌이 어머니도 아버지가 남기고 간 물건을 보면 가끔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연우는 고개를 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그 맑은 눈동자에는 마음이 저릿할 만큼 일찍 철든 기색이 어려 있었다."그래서 그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자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아마도 제 아버지일 거라고요."연우를 바라보자 눈시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나는 연우의 여린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미안하다, 연우야.""이 어미가 잘못했다. 네게 아버지가 없다고 속이면 안 됐는데.""온전한 가정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나는 연우를 조금 세게 끌어안고 있었지만, 연우는 몸부림치지 않고, 평소 내가 자신을 달래주던 것처럼 작은 손으로 서툴게 내 등을 토닥였다."어머니, 괜찮습니다."연우는 작은 손으로 내 등을 몇 번이고 토닥이며 되뇌었다."저는 어머니만 있으면 됩니다. 어머니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합니다."나는 얼굴에 흐른 차가운 눈물 자국을 대충 닦아 내고, 연우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연우야, 나는 괜찮다.""오늘… 아버지가 서당에 데려다줬으면 좋겠니?"그 말을 들은 연우는 고개를 들어 진지한 눈빛으로 잠시 주진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저는 그래도 어머니께서 데려다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께 잘해주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그 한마디에 주진혁은 완전히 무너졌다.연우는 주진혁 쪽으로 아주 작게 한 걸음 다
주진혁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설아야, 그동안…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냐?"나는 사람을 태워버릴 듯한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지난 날의 아픈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던 그의 차가워진 눈빛, 최현아의 생기 넘치고 발랄한 모습에 보내던 그의 호감, 연회에서 최현아를 끌어안고 웃던 얼굴, 그리고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쫓겨났을 때의 막막함…입꼬리를 올려 웃어보려 했으나, 입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가슴속이 여전히 저릿하게 아려왔다."무슨 말을 하라는 것이냐?""네가 그때 나를 너무 반듯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싫어했을 때, 내 뱃속에 이미 연우가 있었다고?""뒤늦게 찾은 최현아가 활달하고 말을 타며 노는 것을 좋아해, 색다른 세상을 보여준다며 좋아했을 때, 난 홀로 극심한 입덧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냐?"말을 하는 사이,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진혁아, 그때 너는 이미 날 끔찍하게 싫어했었다.""넌 내가 고인 물처럼 답답하고 재미없어서 널 붙잡아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사실을 말하면 네가 나를 더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이를 빌미로 널 붙잡는 짐만 되는 여자라고 생각할까 봐. 그리고 뱃속의 연우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비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더 두려웠다…""그래서 네게 알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고, 나 혼자 연우를 잘 키워내겠다고 다짐했었다."말을 마쳤을 때, 주진혁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좁은 방 안에는 그의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동안 참 힘들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자리를 구하고, 셋방을 전전하며 온갖 고난을 겪다 보니… 때로는 정말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나도 모르게 안방 쪽을 바라보았고, 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하지만 보거
내 이름을 듣자마자 주진혁은 고개를 번쩍 들고 김옥란과 시선을 마주쳤다.마음속으로 짐작했던 것이 이제 거의 확실해졌다.김옥란은 불현듯 찾아온 엄청난 기쁨에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할 뻔했다.‘이 아이는 내 손주다! 주씨 가문의 핏줄이다! 진혁이의 친자식이 분명하다!'연우를 안고 있는 주진혁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놀라움과 기쁨, 후회… 온갖 감정이 용암처럼 가슴속에서 들끓고 뒤엉켜 당장이라도 가슴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그러나 품에 안긴 연우는 어른들의 마음속에 이는 풍파를 전혀 알지 못했다.연우는 주진혁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빠져나오더니, 다시 비틀거리며 김옥란에게 달려가 다리를 꼭 붙잡았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간절히 애원했다."할머니! 흑흑… 제발 우리 어머니를 좀 구해주십시오!""우리 어머니는 정말 착한 사람입니다! 할머니, 제발 저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해주십시오, 제발요, 할머니!""제게는 어머니밖에 없단 말입니다!"손주가 이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자, 김옥란의 가슴은 찢어질 듯 미어졌다.그녀는 당장 연우를 품에 꼭 끌어안고 흐느끼며 말했다."울지 마라. 우리 손주, 내 새끼 울지 마렴…""할머니가 여기 있으니, 누구도 네 어머니를 괴롭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서 구해주마!"말을 잇던 김옥란은 연우의 손과 무릎이 까진 것을 보고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다들 왜 아직도 멀뚱히 서 있는 것이냐!""도련님이 넘어져 다친 게 안 보이느냐!""당장 의원을 불러오너라! 내 손주를 꼼꼼히 살펴 뼈라도 상하지 않았는지 보게 하란 말이다!"그러고는 주진혁을 향해 날카롭게 다그쳤다."진혁아, 아직도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것이냐!""최설아, 어서 가서 최설아를 데려오너라! 누구든 앞을 가로막는 자는 우리 주씨 가문의 원수로 간주할 것이다!"말을 마친 김옥란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최현아를 매섭게 쏘아보며 경고했다.결국 나는 관아의 별채에서 연우를 만났다.연우가 주진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