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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مؤلف: 명여
이정빈이 출장에서 돌아온 건 사흘 뒤 오후 세 시였다. 이 남자는 유소담에게 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오라고 못 박았다.

그날따라 하늘은 눈부시도록 쨍쨍했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잿빛 구름이 거대한 우리처럼 세상을 뒤덮었고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유소담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불길한 징조였다. 오늘 같은 날은 외출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남의 집 숟가락’ 신세로는 거절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녀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챙겨 입고 차를 몰아 공항으로 향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길 위에서 차가 고장 나 멈춰 섰다. 다행히 공항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유소담은 수리 기사를 부르고 다시 다른 차량을 수배했다.

통로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가야 했는데 몰아치는 비바람에 코트가 거의 다 젖었고 지나가던 차가 튀긴 흙탕물까지 뒤집어썼다. 어차피 이정빈을 데리러 가는 길일 뿐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VIP 통로 앞에 선 유소담은 이정빈이 나오길 기다렸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공항 통로는 쌀쌀했고 젖은 옷 때문에 그녀는 연신 몸을 떨었다.

비행기 착륙 소리가 들리고 십여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이정빈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꽃무늬 셔츠는 그의 오만함을 더욱 부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유소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된 듯했다.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말을 건네려던 찰나, 이정빈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말았다. 아무리 침착하고 냉철한 유소담이라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정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아름답고 당당한 여자는 초라한 행색의 유소담과는 달리 눈부시게 찬란했다.

그들이야말로 마치 같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요란한 파열음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수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눈앞의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강씨 가문의 보석 같은 외동딸 강하리, 그녀는 이정빈의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정빈과 주민찬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공주 대접을 받던 그녀.

유소담이 이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 강하리는 진작 가족을 따라 M국으로 이주한 뒤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정빈이 모든 여자에게 똑같이 대하지만 강하리만큼은 다르다는 걸 유소담은 너무 잘 안다. 평소 그의 곁을 맴도는 여자들은 대부분 돈을 목적으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부류였다. 이토록 고고하고 우아한 여자가 곁에 있다는 건 분명 다른 부류일 터였다.

강하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유소담의 뇌리에 한 장면이 스쳤다. 바로 예전에 이정빈의 회중시계 속에서 봤던 사진 말이다.

사진 속 그 소녀와 강하리의 눈매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소녀가 바로 어린 시절의 강하리였단 말인가?

유소담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강하리가 별빛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담 씨 맞죠? 정빈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강하리예요.”

이 여자는 유소담이 보아도 더할 나위 없는 명문가 딸의 표본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 순간 예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손을 내밀어 상대의 악수를 받고자 했지만, 우산을 쥐고 있던 손바닥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황급히 손을 거두려 하자 강하리는 그녀의 난처한 기색을 알아차린 전혀 개의치 않고 꼭 맞잡았다. 그러고는 친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유소담도 어색하게 웃었다.

“반가워요, 하리 씨.”

두 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정빈은 축축해진 유소담의 트렌치코트를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소담 씨는 정빈의 동생이니까 저한테도 동생이나 다름없어요.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대해요 그냥.”

그 말에 유소담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서 있는 이정빈의 눈치를 살폈다.

‘여동생 유소담’이라는 타이틀은 이 남자에게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베프 주민찬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하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정빈의 얼굴에는 일말의 불쾌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는 강하리에게만큼은 특별했다.

강씨 가문은 5대를 이어 정계를 주름잡은 명문가이자 권력의 정점이었다. 강하리는 명실상부한 명문가의 딸 그 자체였고 그녀와 이정빈이야말로 비로소 같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유소담은 엄마 지수정의 연줄을 등에 업고 겨우 상류 사회의 언저리를 엿보는 처지였다.

강하리는 모든 걸 다 가졌지만 유소담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정빈의 여성 편력은 익히 보아온 그녀였다. 그 곁을 스쳐 간 수많은 여자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냈었지.

하지만 강하리를 마주한 지금, 유소담은 처음으로 강렬한 위기감이 밀려왔다. 그녀 자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으니까. 거대한 격차, 그것은 결코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었다. 짐작건대 강하리는 이한철이 이정빈을 위해 점찍어둔 정략결혼 상대일 터였다.

이씨 가문은 상업이 주력이니 정계의 거물인 강씨 가문의 뒷배가 절실했다.

그제야 그날 밤 이건후가 왜 그렇게 말끝을 흐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출장을 간 이유는 강하리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유소담은 쏙 빼놓은 거겠지.

이정빈은 유소담에게 다가와 빤히 시선을 고정했다. 입가엔 비딱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꼴이 이게 뭐야. 어디 구덩이라도 빠졌어?”

유소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강하리가 또다시 상황을 중재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다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럴 수도 있지. 비 오는 날 지나가는 사람 물 튀기는 것쯤이야 흔한 일이잖아. 소담 씨, 저랑 체형이 비슷한 것 같은데 여기 여벌 외투가 있어요. 그거 벗어버려요. 감기 들면 큰일 나요.”

곧이어 뒤에 서 있던 수행비서에게서 외투를 건네받았다.

유소담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밖에 워낙 보는 눈이 많았다. 이 꼴을 하고 일행 뒤를 따랐다간 시선을 끄는 게 불 보듯 뻔했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였다.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마당에 더 이상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하리 씨.”

유소담이 젖은 옷을 벗자 강하리는 직접 새 외투를 걸쳐주고 허리띠까지 정성스레 매주었다. 마치 친언니가 동생을 챙기듯 티끌 없이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유소담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외투가 전 세계에 딱 열 벌뿐인 한정판이라는 것을.

공항을 빠져나와 짐을 싣는 과정에서 유소담은 애를 먹었다. 남자 기사는 익숙하게 짐을 옮겼지만, 그녀는 직접 옮기려니 조금 버거웠다.

결국 무거운 가방에 손등이 찍히고 날카로운 통증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소담은 아픈 손을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유 비서님, 괜찮으세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사의 물음에 유소담은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차에 오르려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정빈과 강하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순간 유소담은 몸이 딱딱하게 굳고 서둘러 문을 닫고는 조수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강하리의 시선이 은근슬쩍 유소담의 손등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내내 강하리와 이정빈의 옛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주를 이뤘다.

이정빈은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유소담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살피다 그만 이정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평소의 방탕하고 나른한 기운과는 결이 다른 칠흑처럼 깊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강하리가 불쑥 물었다.

“소담 씨는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요?”

“보성고등학교요.”

강하리의 얼굴에 뚜렷한 놀라움이 번졌다.

“어머, 소담 씨도 보성고였어요? 저랑 정빈이랑 같은 학교였네요.”

보성고는 남주시에서 1위로 꼽히는 명문 고등학교이자 화인국 최고 학교로 탁월한 교육 시스템을 자랑한다.

그곳은 정재계 자제들만 모이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유소담이 그 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지수정은 등골이 휘어지도록 애를 써야 했다.

“두 분은 보성고의 아이콘이셨잖아요. 저는 한참 후배였고 두 분 이름은 전설처럼 내려왔거든요.”

감정을 숨기고 적당히 격식을 차리는 처세술은 유소담의 주특기였다.

강하리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소담 씨는 너무 어렵게 구네요. 어차피 정빈이 여동생인데 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유소담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처음 이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 이정빈을 ‘오빠’라고 부르려 했지만, 이 남자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때는 그저 이 남자가 자신과 지수정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런 줄로 알았다.

문득 물병을 따서 시원하게 들이켜던 이정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얘는 나 ‘오빠’라고 부르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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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30화

    복수에 성공했다는 통쾌함에 빠져 있던 유소담은 순간 이정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강하리가 입만 열면 자연스럽게 이정빈의 형을 가족처럼 부르는 걸 보면, 정말 이미 자신을 이정빈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강하리의 이간질은 그리 고급스러운 수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소담은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어젯밤 이정빈이 차로 이건후를 치라고 명령하던 장면이 떠오르자 지금도 두피가 서늘해졌다.유소담은 저도 모르게 이정빈을 바라봤다.이정빈은 원래 늘 느슨하고 무심했다. 무슨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고, 사람을 볼 때도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으며 가지고 노는 듯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화가 난 듯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새까만 눈에 사나운 기운이 서린 채, 유소담 손목에 찬, 이건후가 준 팔찌를 썩은 고깃덩어리라도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유소담의 가슴이 철렁했다.“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두 분 얘기하세요.”이정빈은 꽤 미친 사람이니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었다.강하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담 씨, 제가 돌아왔다고 정빈이랑 민찬이가 오늘 저녁 자리를 마련했어요. 저 환영해 주는 자리라니까 소담 씨도 정빈이랑 꼭 같이 와요. 제 체면 봐서라도 빠지면 안 돼요.”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유소담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유소담이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었어? 이 대표님 약혼한대! 상대가 아까 같이 있던 강하리 씨래.”“진짜야? 여자 바꾸는 걸 옷 갈아입듯 하는 사람이 벌써 결혼한다고?”“이 대표님 같은 사람이야 옆에 여자 있는 게 뭐가 이상해. 밖에서 놀 만큼 놀아도 결국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 주는 상대량 하겠지.”수군거리던 직원이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그래서 이 대표님은 뭐래?”“당연히 좋다고 하겠지. 강하리 씨는 예쁘고 학벌도 좋고 몸매도 좋은데 싫다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강하리 씨 아직 안 갔지?”“안 갔어! 유 비서도 벌써 나왔잖아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9화

    유소담은 강하리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아주 괜찮은 거래였어요.”자신이 준 물건을 유소담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처분하자 이정빈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는데, 유소담이 정말 망설임 없이 팔찌를 넘길 줄은 몰랐다. 인제 와서는 괜히 그 말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강하리는 바라던 대로 꼬임 옥 팔찌를 손에 넣었다.“정빈아, 네가 채워 줘.”이정빈은 거절하지 않았다. 유소담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만지고 있었다.그는 일부러 유소담의 관심을 끌고 약을 올리려는 듯 강하리의 손을 보며 말했다.“네가 차니까 훨씬 예쁘네.”유소담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600억 원짜리인데 안 예쁠 수가 있겠어요?”강하리는 유소담의 텅 빈 손목을 보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척 말했다.“그럼 소담 씨는 이제 찰 게 없잖아요. 제 가방에 여분으로 가져온 게 하나 있는데, 괜찮다면...”‘그러니까 나는 강하리가 쓰지 않는 것 정도나 받아야 한다는 건가?’강하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소담은 이미 거절할 말을 생각해 뒀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소담이 이정빈 대신 바로 말했다.“들어오세요.”들어온 사람은 우도영이었다.“대표님, 큰 도련님 쪽 수행비서가 왔습니다.”이정빈은 무심하게 물었다.“왜 왔대? 무슨 일인지 말했어?”우도영은 유소담을 한번 보며 조금 머뭇거렸다.“유소담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유소담이 나가려는데 이정빈이 느긋하게 한마디 던졌다.“들어오라고 해. 나도 마침 형이 얘한테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는지 궁금하네.”유소담은 이정빈을 바라보다가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채 몇 초가 조용히 흘렀다. 말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오갔다.강하리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이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8화

    유소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듣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강하리가 먼저 요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정빈이 아무렇지 않게 내줘 버렸다.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그가 그렇게 강하리를 좋아하는데 고작 물건 하나 때문에 강하리 마음을 거스를 리 없었다.강하리는 난처한 듯 유소담을 한번 봤다.“그건 좀 그렇지 않나? 네가 소담 씨한테 준 생일 선물인데 어떻게 달라고 해.”이정빈은 나른하게 기대앉아 유소담의 무표정한 얼굴을 훑다가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꾹 누르며 말했다.“미안할 게 뭐 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듯 거대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흉곽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유소담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마음이 메마른 여자가 사랑에 목매고 인정에 굶주리면 결국 탈 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많은 자원을 가졌어도 그 깊은 구렁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다.강하리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유소담은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이 대표님 말이 맞아요. 하리 씨,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무표정하던 유소담이 갑자기 환하게 웃는 순간, 이정빈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소담은 손목의 꼬임 옥 팔찌를 빼고 있었다. 손에서 잘 빠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힘껏 잡아당겼다. 결국 팔찌는 빠졌고, 뼈가 도드라진 손등은 마찰 때문에 붉게 달아올랐다.유소담은 두 손가락으로 팔찌를 집어 들어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이 팔찌가 비싸긴 해도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까진 아니에요. 하리 씨가 원하신다면 당연히 드릴 수 있죠.”이정빈과 강하리 모두 그녀가 정말 동의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유소담은 곧 말을 돌려 이정빈을 바라봤다.“다만 이미 제게 준 순간 이건 제 물건이 됐잖아요. 저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요. 하리 씨의 환심을 사고 싶은 거라면 이 대표님이 제게 다시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7화

    유소담이 갑자기 이렇게 성질을 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순간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강하리가 재빨리 정적을 풀 듯 선물 상자 하나를 꺼냈다.“소담 씨, 미안한 마음에 생일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상자 안에는 비둘기 알만 한 푸른 다이아몬드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밝은 실내에서 옅은 푸른빛을 내뿜는 모습은 마치 ‘바다의 심장’처럼 신비로웠다. 그 자체로 막대한 돈이 만들어 낸 화려함이었다.유소담은 한눈에 알아봤다. 2016년 세계 경매 사상 최대 크기의 팬시 비비드 블루 다이아몬드 ‘오펜하이머 블루’였다. 스위스 제네바 경매에서 익명의 수집가가 5,060만 스위스프랑, 당시 약 850억에 낙찰받아 단일 다이아몬드 최고 거래가 기록을 갈아치웠던 보석이었다.유소담도 이 전설적인 블루 다이아몬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익명의 수집가가 강하리일 줄은 몰랐다.14.62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는 직사각형으로 커팅돼 반지에 세팅되어 있었고, 양옆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두 개가 장식돼 있었다.당시 크리스티는 ‘오펜하이머 블루’를 경매에 나온 블루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팬시 비비드 블루라고 소개했다. 유명 보석 전문가 역시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무결점 다이아몬드라고 평가한 바 있었다.유소담은 티 내지 않고 보석을 살펴봤다. 확실히 눈부시긴 했다.강하리가 이렇게까지 통 큰 선물을 꺼낼 줄은 몰랐다.‘대체 뭘 증명하려는 걸까. 잘난 척하고 싶은 건가?’강하리도 티 내지 않고 유소담의 미세한 반응을 살폈다.“작은 성의인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유소담이라면 분명 이 선물을 좋아하고, 이렇게 비싼 블루 다이아몬드 앞에서 놀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하지만 강하리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유소담이 명문가 출신은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지수정에게 철저히 교육받아 이런 물건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는 사실을.유소담은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느긋한 시선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6화

    강하리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이었다. 모자 장식에는 진주가 박혀 있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복사해 붙여 놓은 듯 완벽했으며,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까지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람처럼 우아했다.‘과연 명문가 아가씨 다워.’ 유소담조차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몸에 밴 단정함과 우아함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소담 씨, 왔네요.”“하리 씨.”유소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더더기 없는 옷차림에 선명한 색감, 몸짓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신감마저, 강하리와 나란히 있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소담 씨, 정빈이 찾으러 온 거죠?”강하리가 안쪽 휴게실을 가리켰다.“정빈이가 옷 갈아입는 중이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유소담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휴게실 안에서 이정빈의 느긋하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걔는 그냥 대체품일 뿐이야.”‘대체품...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강하리의 대체품?’이정빈은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강하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의 존재가 이정빈과 강하리라는 잘 어울리는 한 쌍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모양이다.곧이어 강하리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난 신경 쓰지 않아.”유소담은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알아서 차단하는 것도 자기 보호의 한 방법이었다.강하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슬쩍 유소담의 손목에 있는 꼬임 옥 팔찌를 훑었다.“소담 씨, 어젯밤 정말 미안했어요. 어제가 소담 씨 생일인 줄 몰랐거든요. 알았더라면 제가 아무리 아팠어도 정빈이를 소담 씨한테 보냈을 거예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저만 아니었으면 소담 씨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유소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류의 말은 이정빈 곁에 있으면서 수도 없이 들어 본 것 같았다.“하리 씨가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이렇게 일찍부터 이 대표님이랑 회사에 나오신 걸 보니 몸은 괜찮아지셨나 봐요?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5화

    말하고 나니 조금 후회됐다. 어떤 일은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말해 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니까.유소담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묶여 지금은 호랑이와 함께 길을 걷는 신세가 되었다. 평소에는 참고 말없이 버티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꽤 고집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빈정거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정빈의 마음에는 파문이 일었다. 억눌러 둔 감정이 조금씩 번져 나갔다.이정빈의 뜨거운 시선을 받자 유소담은 괜히 몸 둘 바를 몰랐다.어둡고 누런 가로등 불빛이 번갈아 차 안을 스쳤다. 이정빈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더니, 뜨겁게 타고 있는 담배 끝을 자신의 손가락 마디에 눌렀다. 차갑고 하얀 피부가 붉은 불씨에 닿는 순간 검붉게 달아올랐고, 담뱃불은 그렇게 조금씩 꺼져 갔다. 거의 자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유소담은 주먹을 꽉 쥔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정빈을 바라봤다. 이정빈은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깊고 어두운 눈 속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침함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은 강렬한 충격을 줬다.뼛속까지 위험을 즐기는 미친 인간이었다.이정빈은 완벽에 가까운 집안 배경과 타고난 외모, 치밀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의 앞에서는 공손해야 했고, 늘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 사람에게 잇따른 반항과 거절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유소담은 그가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이건후가 앉아 있었다면, 방금 담뱃불이 눌린 곳은 이정빈 자신의 손이 아니라 이건후의 손이었을 것이다.이정빈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의 재떨이가 될 수 있었다.이 방탕한 남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다.“우도영, 차 세워.”차가 천천히 멈췄다. 유소담은 그가 뭘 하려는지 몰랐다. 다음 순간 차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거칠게 들이쳤고,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내려.”비는 이미 완전히 그쳐있었다. 유소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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