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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مؤلف: 명여
유소담이 회사에 도착하자 원지안은 마치 자신이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입이 귀에 걸렸다.

“소담 언니! 대표님이 언니를 위해 복수해 줄 줄 알았으면 우리가 굳이 언론사 컨택하고 애쓸 필요도 없었잖아요. 전에는 언니도 괜히 마음 약해져서 망설이더니 이것 좀 보세요. 대표님이 제대로 판을 쳐서 한이설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잖네요.”

원지안조차 이정빈이 배후에서 판을 짰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남들은 오죽할까?

유소담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표님께서 한이설을 도울 생각이 없다면 모두가 대표님이 나를 지켜준다고 믿게 하는 편이 낫지.’

이렇게 되면 자신에게 쏟아질 귀찮은 시선들을 줄일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유난히 차갑고 음산했다. 짙은 구름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삼켜버릴 듯 낮게 드리워졌다.

본가에서 나온 이정빈은 들어갈 때보다 표정이 훨씬 굳어 있었다.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 제멋대로에 오만하던 남자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 불꽃이 파르르 떨리며 담배 끝을 태웠고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뒤덮었다.

그때, 강렬한 오렌지색 애스턴 마틴 한 대가 곁에 멈춰 섰다. 운전석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며 장난기 가득하고 자유분방한 주민찬의 얼굴이 드러났다.

“회사에 찾아갔는데 헛걸음만 했네.”

이정빈은 담배를 문 채 삐딱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대충 대꾸했다.

“할 말 있냐?”

한편 주민찬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차창에 걸치고서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용건 없으면 못 와? 술이나 한잔하자는 거지.”

이정빈이 말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결혼한다며?”

주민찬이 불쑥 물었다.

이정빈은 담배를 지그시 물고 눈꺼풀을 내리깔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누가 그래? 건후 형이야?”

“그 형 말고 또 누가 있겠냐?”

차 밖에서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주민찬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 근데 갑자기 웬 결혼? 상대는 누군데?”

이번에 이정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유소담은 어쩌고? 그동안 너랑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 정리할 생각이야?”

이 바닥에서 이정빈과 유소담의 관계를 대놓고 언급할 수 있는 건 주민찬뿐이었다.

이정빈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지고 속눈썹 아래로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 차 안팎으로 명암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침묵을 지켰다.

주민찬은 친구의 표정을 살피다 금기어라는 걸 깨닫고 괜히 말실수했다 싶었다.

그는 멋쩍게 코끝을 문지르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강하리 이번에 Y국에서 들어온다며? 하도 오랜만이라 궁금하네. 걔 지금 엄청 예뻐졌다던데, 몸매도 화끈하고. 우리 사이에 환영회라도 한번 열어줘야 하는 거 아냐?”

이정빈은 여유롭고도 묘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을 아꼈다.

“글쎄, 나중에.”

주민찬은 매끄럽게 운전대를 돌리며 혀끝으로 뺨 안쪽을 툭 밀었다.

“참나, 그렇게 냉정하게 굴 일이야? 하리가 출국하던 날 밤, 너 술 마시다 위출혈로 응급실 실려 갔던 거 내가 다 기억하는데.”

그 얘기가 나오자 이정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민찬도 그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걸 직감하고는 더 이상 강하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크라운 클럽의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기운이 오르자 주민찬은 다시금 유소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소담 씨가 네 형이랑 이어질 줄 알았어. 건후 형을 향한 소담 씨 마음이 워낙 뻔히 보였잖아. 나만 눈치챈 건 아니었을걸?”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정빈의 손목에서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가 차가운 빛을 반사했다. 팽팽하게 긴장한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어둑한 조명 아래 이정빈은 술잔을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에 주민찬조차 흠칫하며 술이 확 깰 정도였다.

‘갑자기 왜 발작이지?’

영문을 몰라 입을 떼려던 찰나, 이정빈은 한 손으로 양복 재킷을 낚아채듯 챙겨 들고는 서늘한 눈빛을 남긴 채 룸을 나가버렸다.

밤의 풍경이 틈새 벌어진 통유리창 너머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고가도로 위, 쉴 새 없이 흐르는 자동차 행렬이 강물처럼 굽이치며 끝없이 이어졌다.

크라운 클럽에서 돌아온 이정빈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유소담은 이미 잠든 뒤였다.

커다란 침대 위로 볼록하게 솟은 이불을 내려다보던 그는 재킷을 되는대로 벗어 던지고는 침대에 올라갔다. 몸을 웅크리고 누운 유소담을 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이 남자.

잠결에 놀라 깬 유소담이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맞아요?”

“나 말고 누구? 이건후라도 기대했어?”

이정빈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정말 건후 형이길 바란 거야?”

잠이 확 깬 유소담이 몸을 뒤척이려 했지만, 그가 더 강하게 눌러왔다.

“가만히 있어. 그냥 좀 안고 있게.”

훅 끼쳐오는 술 냄새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셨어요?”

다만 이정빈은 대답 대신 고집스럽게 굴 뿐이었다. 마치 형벌을 내리듯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낮게 읊조렸다.

“너 줄곧 건후 형 좋아했던 거지?”

유소담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취했어요, 대표님.”

과거 이씨 가문에서 그녀와 이건후의 사이가 가장 각별했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말이다.

이정빈의 집요함에 진이 다 빠져버린 유소담은 결국 홧김에 독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 남자의 신경을 긁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요! 나 건후 오빠 좋아해요. 줄곧 좋아했어요. 이제 만족해요?”

이정빈은 그녀를 짓누르듯 올라타 허리를 양다리로 누르고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쓰레기고 건후 형은 성인군자라도 될 것 같아? 형도 결국 똑같아. 너랑은 죽었다 깨도 불가능하다고.”

유소담은 가끔 발작하는 이 남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아렸다.

이건후와 불가능하다면 사실 이정빈과는 더욱 가망이 없는 게 아닌가?

아마도 이 남자와는 정말 끝에 다다랐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튿날 아침, 유소담이 눈을 떠보니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손을 뻗어본 자리에는 차가운 냉기만 감돌았다.

협탁 위에 포스트잇 한 장이 덩그러니 붙어 있었는데 딱 두 글자, 이정빈답게 간결했다.

[출장.]

이정빈의 일정은 누구보다 유소담이 잘 알고 있었다. 출장 계획 같은 건 없을 터, 또 그놈의 오만한 성질머리가 도진 것이 분명했다.

유소담은 포스트잇을 잘게 찢어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한 시간 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원지안이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 이건후 이사님이 오셨어요. 지금 대표님 사무실에 있어요.”

이건후는 회사의 주주이자 이사로 다들 그를 ‘이사님’이라 불렀다.

유소담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정빈이 떠나자마자 귀신같이 찾아오다니.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덮쳤다.

“무슨 용건인지 들었어요?”

이에 원지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유소담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블루마운틴으로 한 잔 타 와요.”

커피가 금세 준비되었고 유소담은 쟁반을 든 채 대표이사실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정장 재킷은 등받이에 걸쳐졌고 그는 오직 셔츠 차림이었다.

외부인이 본다면 이건후야말로 이 사무실의 주인이라고 착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유소담은 마음을 다잡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웬일이세요, 건후 오빠?”

이건후가 몸을 돌려 책을 내려놓았다. 유려하고 준수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그럴 리가요.”

유소담은 커피잔을 그의 곁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정빈이가 출장 갔다는 소릴 들어서 그냥 겸사겸사 들러봤어.”

이건후가 이렇게까지 순순히 대답할 줄은 몰랐다. 이씨 가문에 쉬운 상대는 단 한 명도 없다. 한때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이건후조차 그 온화하고 세상 무해한 모습은 그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한 보호색일 뿐이었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주저 없이 칭찬을 건넸다.

“소담이가 타주는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맛이 좋네.”

유소담의 미소가 옅어졌다. 단순히 커피 칭찬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정빈이 예전 같으면 출장 갈 때 너를 꼭 데리고 갔을 텐데 이번엔 왜...”

이건후의 은근한 떠보기에 그녀는 무심코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요.”

이건후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렸다.

“창운 그룹 인수 건은 어떻게 되어가?”

유소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목적은 인수 건이었다.

“현재까지는 순조롭습니다.”

이건후는 양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그 프로젝트 책임자, 바뀔 가능성이 커.”

순간 유소담의 표정이 굳고 열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 배정원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믿을 만한 정보인가요?”

이건후는 딱히 숨기지 않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뜻인 것 같아. 그쪽에서 추천한 인물이 따로 있거든.”

유소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진짜 할아버지의 결정이라면 이정빈이 강력하게 나서서 방어해주지 않는 한 그녀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건후는 이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지만 정작 할 일을 다 하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유소담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저녁을 사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아 따라나선 곳은 일식집이었다.

식사 내내 이건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짐짓 난처한 척 입을 열지 않았고 유소담 역시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식당을 나왔을 때는 봄의 스산한 밤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얇게 입은 유소담을 본 이건후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이 남자가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느껴졌다.

몇 걸음 떼지 못해 유소담이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뻔한 순간 이건후가 재빨리 붙잡아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의 품 안으로 안기듯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찰나의 장면을 어둠 속 누군가가 카메라에 은밀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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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30화

    복수에 성공했다는 통쾌함에 빠져 있던 유소담은 순간 이정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강하리가 입만 열면 자연스럽게 이정빈의 형을 가족처럼 부르는 걸 보면, 정말 이미 자신을 이정빈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강하리의 이간질은 그리 고급스러운 수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소담은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어젯밤 이정빈이 차로 이건후를 치라고 명령하던 장면이 떠오르자 지금도 두피가 서늘해졌다.유소담은 저도 모르게 이정빈을 바라봤다.이정빈은 원래 늘 느슨하고 무심했다. 무슨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고, 사람을 볼 때도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으며 가지고 노는 듯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화가 난 듯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새까만 눈에 사나운 기운이 서린 채, 유소담 손목에 찬, 이건후가 준 팔찌를 썩은 고깃덩어리라도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유소담의 가슴이 철렁했다.“저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두 분 얘기하세요.”이정빈은 꽤 미친 사람이니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었다.강하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담 씨, 제가 돌아왔다고 정빈이랑 민찬이가 오늘 저녁 자리를 마련했어요. 저 환영해 주는 자리라니까 소담 씨도 정빈이랑 꼭 같이 와요. 제 체면 봐서라도 빠지면 안 돼요.”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유소담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유소담이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는데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었어? 이 대표님 약혼한대! 상대가 아까 같이 있던 강하리 씨래.”“진짜야? 여자 바꾸는 걸 옷 갈아입듯 하는 사람이 벌써 결혼한다고?”“이 대표님 같은 사람이야 옆에 여자 있는 게 뭐가 이상해. 밖에서 놀 만큼 놀아도 결국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 주는 상대량 하겠지.”수군거리던 직원이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그래서 이 대표님은 뭐래?”“당연히 좋다고 하겠지. 강하리 씨는 예쁘고 학벌도 좋고 몸매도 좋은데 싫다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강하리 씨 아직 안 갔지?”“안 갔어! 유 비서도 벌써 나왔잖아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9화

    유소담은 강하리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아주 괜찮은 거래였어요.”자신이 준 물건을 유소담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처분하자 이정빈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는데, 유소담이 정말 망설임 없이 팔찌를 넘길 줄은 몰랐다. 인제 와서는 괜히 그 말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강하리는 바라던 대로 꼬임 옥 팔찌를 손에 넣었다.“정빈아, 네가 채워 줘.”이정빈은 거절하지 않았다. 유소담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만지고 있었다.그는 일부러 유소담의 관심을 끌고 약을 올리려는 듯 강하리의 손을 보며 말했다.“네가 차니까 훨씬 예쁘네.”유소담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600억 원짜리인데 안 예쁠 수가 있겠어요?”강하리는 유소담의 텅 빈 손목을 보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척 말했다.“그럼 소담 씨는 이제 찰 게 없잖아요. 제 가방에 여분으로 가져온 게 하나 있는데, 괜찮다면...”‘그러니까 나는 강하리가 쓰지 않는 것 정도나 받아야 한다는 건가?’강하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소담은 이미 거절할 말을 생각해 뒀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유소담이 이정빈 대신 바로 말했다.“들어오세요.”들어온 사람은 우도영이었다.“대표님, 큰 도련님 쪽 수행비서가 왔습니다.”이정빈은 무심하게 물었다.“왜 왔대? 무슨 일인지 말했어?”우도영은 유소담을 한번 보며 조금 머뭇거렸다.“유소담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유소담이 나가려는데 이정빈이 느긋하게 한마디 던졌다.“들어오라고 해. 나도 마침 형이 얘한테 무슨 일로 사람을 보냈는지 궁금하네.”유소담은 이정빈을 바라보다가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채 몇 초가 조용히 흘렀다. 말은 없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오갔다.강하리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이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8화

    유소담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듣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강하리가 먼저 요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정빈이 아무렇지 않게 내줘 버렸다.예상 밖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그가 그렇게 강하리를 좋아하는데 고작 물건 하나 때문에 강하리 마음을 거스를 리 없었다.강하리는 난처한 듯 유소담을 한번 봤다.“그건 좀 그렇지 않나? 네가 소담 씨한테 준 생일 선물인데 어떻게 달라고 해.”이정빈은 나른하게 기대앉아 유소담의 무표정한 얼굴을 훑다가 엄지로 손가락 마디를 꾹 누르며 말했다.“미안할 게 뭐 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듯 거대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흉곽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유소담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았다. 마음이 메마른 여자가 사랑에 목매고 인정에 굶주리면 결국 탈 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많은 자원을 가졌어도 그 깊은 구렁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다.강하리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유소담은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이 대표님 말이 맞아요. 하리 씨,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무표정하던 유소담이 갑자기 환하게 웃는 순간, 이정빈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유소담은 손목의 꼬임 옥 팔찌를 빼고 있었다. 손에서 잘 빠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힘껏 잡아당겼다. 결국 팔찌는 빠졌고, 뼈가 도드라진 손등은 마찰 때문에 붉게 달아올랐다.유소담은 두 손가락으로 팔찌를 집어 들어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이 팔찌가 비싸긴 해도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까진 아니에요. 하리 씨가 원하신다면 당연히 드릴 수 있죠.”이정빈과 강하리 모두 그녀가 정말 동의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유소담은 곧 말을 돌려 이정빈을 바라봤다.“다만 이미 제게 준 순간 이건 제 물건이 됐잖아요. 저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요. 하리 씨의 환심을 사고 싶은 거라면 이 대표님이 제게 다시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7화

    유소담이 갑자기 이렇게 성질을 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순간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강하리가 재빨리 정적을 풀 듯 선물 상자 하나를 꺼냈다.“소담 씨, 미안한 마음에 생일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상자 안에는 비둘기 알만 한 푸른 다이아몬드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밝은 실내에서 옅은 푸른빛을 내뿜는 모습은 마치 ‘바다의 심장’처럼 신비로웠다. 그 자체로 막대한 돈이 만들어 낸 화려함이었다.유소담은 한눈에 알아봤다. 2016년 세계 경매 사상 최대 크기의 팬시 비비드 블루 다이아몬드 ‘오펜하이머 블루’였다. 스위스 제네바 경매에서 익명의 수집가가 5,060만 스위스프랑, 당시 약 850억에 낙찰받아 단일 다이아몬드 최고 거래가 기록을 갈아치웠던 보석이었다.유소담도 이 전설적인 블루 다이아몬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익명의 수집가가 강하리일 줄은 몰랐다.14.62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는 직사각형으로 커팅돼 반지에 세팅되어 있었고, 양옆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두 개가 장식돼 있었다.당시 크리스티는 ‘오펜하이머 블루’를 경매에 나온 블루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팬시 비비드 블루라고 소개했다. 유명 보석 전문가 역시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무결점 다이아몬드라고 평가한 바 있었다.유소담은 티 내지 않고 보석을 살펴봤다. 확실히 눈부시긴 했다.강하리가 이렇게까지 통 큰 선물을 꺼낼 줄은 몰랐다.‘대체 뭘 증명하려는 걸까. 잘난 척하고 싶은 건가?’강하리도 티 내지 않고 유소담의 미세한 반응을 살폈다.“작은 성의인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유소담이라면 분명 이 선물을 좋아하고, 이렇게 비싼 블루 다이아몬드 앞에서 놀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하지만 강하리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유소담이 명문가 출신은 아니어도 어릴 때부터 지수정에게 철저히 교육받아 이런 물건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는 사실을.유소담은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느긋한 시선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6화

    강하리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이었다. 모자 장식에는 진주가 박혀 있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복사해 붙여 놓은 듯 완벽했으며,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까지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람처럼 우아했다.‘과연 명문가 아가씨 다워.’ 유소담조차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몸에 밴 단정함과 우아함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소담 씨, 왔네요.”“하리 씨.”유소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더더기 없는 옷차림에 선명한 색감, 몸짓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자신감마저, 강하리와 나란히 있어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소담 씨, 정빈이 찾으러 온 거죠?”강하리가 안쪽 휴게실을 가리켰다.“정빈이가 옷 갈아입는 중이니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유소담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휴게실 안에서 이정빈의 느긋하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걔는 그냥 대체품일 뿐이야.”‘대체품...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강하리의 대체품?’이정빈은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강하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의 존재가 이정빈과 강하리라는 잘 어울리는 한 쌍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모양이다.곧이어 강하리가 안쪽을 향해 말했다.“난 신경 쓰지 않아.”유소담은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알아서 차단하는 것도 자기 보호의 한 방법이었다.강하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슬쩍 유소담의 손목에 있는 꼬임 옥 팔찌를 훑었다.“소담 씨, 어젯밤 정말 미안했어요. 어제가 소담 씨 생일인 줄 몰랐거든요. 알았더라면 제가 아무리 아팠어도 정빈이를 소담 씨한테 보냈을 거예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저만 아니었으면 소담 씨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유소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류의 말은 이정빈 곁에 있으면서 수도 없이 들어 본 것 같았다.“하리 씨가 마음 쓰실 필요 없어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이렇게 일찍부터 이 대표님이랑 회사에 나오신 걸 보니 몸은 괜찮아지셨나 봐요?

  • 날 버린 건 너야, 뒷북치지 마!   제25화

    말하고 나니 조금 후회됐다. 어떤 일은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말해 버리면 재미가 없어지니까.유소담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묶여 지금은 호랑이와 함께 길을 걷는 신세가 되었다. 평소에는 참고 말없이 버티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꽤 고집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빈정거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정빈의 마음에는 파문이 일었다. 억눌러 둔 감정이 조금씩 번져 나갔다.이정빈의 뜨거운 시선을 받자 유소담은 괜히 몸 둘 바를 몰랐다.어둡고 누런 가로등 불빛이 번갈아 차 안을 스쳤다. 이정빈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더니, 뜨겁게 타고 있는 담배 끝을 자신의 손가락 마디에 눌렀다. 차갑고 하얀 피부가 붉은 불씨에 닿는 순간 검붉게 달아올랐고, 담뱃불은 그렇게 조금씩 꺼져 갔다. 거의 자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유소담은 주먹을 꽉 쥔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정빈을 바라봤다. 이정빈은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깊고 어두운 눈 속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침함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은 강렬한 충격을 줬다.뼛속까지 위험을 즐기는 미친 인간이었다.이정빈은 완벽에 가까운 집안 배경과 타고난 외모, 치밀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의 앞에서는 공손해야 했고, 늘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 사람에게 잇따른 반항과 거절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유소담은 그가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이건후가 앉아 있었다면, 방금 담뱃불이 눌린 곳은 이정빈 자신의 손이 아니라 이건후의 손이었을 것이다.이정빈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의 재떨이가 될 수 있었다.이 방탕한 남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다.“우도영, 차 세워.”차가 천천히 멈췄다. 유소담은 그가 뭘 하려는지 몰랐다. 다음 순간 차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거칠게 들이쳤고,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내려.”비는 이미 완전히 그쳐있었다. 유소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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