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 마음은 멀쩡해요.”
“센터에서 여자 회원 가르치는 것만 봐도 운동을 못 할 만큼?”
“그건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고요.”
“네. 그 설정으로 일단 가 보세요.”
주아는 결국 커피를 들고 먼저 일어났다.
자리로 돌아오자 수정 원고가 도착해 있었다. 작품 속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다른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는 이유로 밤새 뒤척이고 있었다.
주아는 원래 적으려던 메모를 지웠다.
‘질투 자각이 너무 늦음.’
남의 자각 속도에 참견할 처지가 아니었다.
***
그날 밤, 지혁은 거실에서 회원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주아는 방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두 번 반복했다. 세 번째에는 지혁이 노트북을 덮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다 봤어?”
“네가 방문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
주
고등학교 1학년, 지혁의 첫 전국대회를 앞두고 주아가 문구점 실과 구슬로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물속에서는 방해된다며 그의 수영 가방 안쪽에 직접 넣어 줬다.“이걸 케이스에 넣어 뒀네.”“더 해질까 봐.”“이제 갖고 있는 거 숨길 생각도 없고?”“숨긴 적은 없어. 네가 잊었지.”주아는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1년 전 자신이 낡은 수영 가방 앞주머니에 다시 넣어 둔 팔찌였다.“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버리면 절교라고 했지.”“그다음.”오래된 대화가 뒤늦게 돌아왔다.가방에 팔찌를 넣어 준 주아는 오래 갖고 있으라며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친구는 평생 가는 거니까.“기억나.”“나는 그 말 듣고 고백 못 했어.”“왜?”“평생 친구로만 있으라는 말인 줄 알았으니까.”“내가 언제 ‘만’이라고 했어.”“열여섯 살한테 그걸 구분하라고?”주아가 웃자 지혁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주아 손에 있던 케이스를 닫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주아야.”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에 주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지혁이 운동 가방의 다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화려한 장식도, 준비된 음악도 없었다. 물 위로 희게 부서지는 조명 아래 지혁이 주아 앞에 섰다.“네가 1년 뒤에 얘기하라고 했잖아. 하루도 안 당겼어.”
“응.”“뭐라고 하셨어요?”“그건 네가 정할 일이라고.”그날 밤 주아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지혁을 불렀다.“내 일정을 왜 팀장님이랑 의논해?”“너 며칠째 제대로 못 잤잖아.”“그러니까 나한테 물었어야지.”“너한테 쉬라고 하면 안 쉬었을 거잖아.”“내가 안 듣는 거랑 네가 대신 결정하려는 건 다른 문제야.”“그럼 쓰러질 때까지 보고만 있어?”“보고만 있으라는 게 아니야. 내가 뭘 맡길 수 있는지 물어봐. 밥을 사 오든 데리러 오든. 내 일을 빼는 건 내가 해.”지혁은 식탁에 놓인 주아의 노트북을 닫으려다 손을 거뒀다.“알았어. 다음부터 네 일정에 끼어들거나 네 상사한테 전화하지 않을게.”“그럼 지금은?”“내일 모니터링 끝나면 데리러 와. 죽도 사 오고.”다음 날 밤, 주아가 모니터링을 마치고 나오자 지혁의 차가 길 건너에 서 있었다. 그는 운전석 창문만 내렸다.“데리러 오라고 한 건 기억나?”“그건 잘 기억하네.”“죽도 사 오랬어.”“뒷좌석.”주아는 차에 타며 웃었다. 지혁은 왜 더 일찍 끝내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뒷좌석의 보온 가방에는 안전벨트가 채워져 있었다.지혁이 빈 견과류 봉지를 접는 소리에 주아의 생각이 현재로 돌아왔다.“그래서 7시에 뭐 하는데?”
1년 뒤, 주아는 원고 중반에서 커서를 멈췄다.여자 주인공이 10년 된 남자 사람 친구의 고백을 받고 곧장 사랑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예전의 주아라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코멘트부터 남겼을 것이다.주아는 문장 옆에 메모를 달았다.남주의 오래된 마음이 여주의 대답까지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고백 전부터 여주가 이 사람을 특별하게 대했던 장면과, 고백 뒤 혼자 선택하는 시간을 보강해 주세요.저장 버튼을 누르자 옆자리의 신입 PD가 의자를 밀고 다가왔다.“선배님, 진짜 오래된 친구끼리 갑자기 키스하면 안 어색할까요?”“어색하지.”“그럼 어떻게 연애해요?”“어색한 채로 하는 거야. 친구였던 시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역시 로맨스는 어렵네요.”“남의 로맨스는 쉬워.”주아가 무심코 대답하자 지나가던 서영이 웃었다.“본인 것도 이제 꽤 잘하던데?”신입의 눈이 반짝이자 주아는 원고로 그 시선을 가렸다.“팀장님, 쓸데없는 정보 주지 마세요.”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권지혁이었다.오늘 7시. 잊지 마.주아는 달력을 확인했다.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은 날이었다.뭘?답장은 금세 왔다.1년.주아는 날짜를 다시 봤다.정말로 연애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었다. 작년 이맘때 옷장을 비우던 지혁에게 최소 1년은 만나고 결혼을 이야기하자고 했었다.설마.주아가 화면을 보고 있자 서영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왜, 프러포
퇴근 뒤 운동센터에 도착했을 때 지혁은 마지막 수업 중이었다.주아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라운지 한쪽에 앉았다. 지혁은 촬영을 앞둔 배우의 스쿼트 자세를 점검하고 있었다. 무릎 각도와 호흡을 짚는 말은 간결했고, 자세를 교정할 때도 먼저 손을 대도 되는지 확인했다.프로답고 익숙한 모습이었다.그 배우는 지혁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지혁까지 드물게 웃으며 답하자 주아는 읽던 기획서의 같은 줄을 또 읽었다.“종이 뚫겠다.”맞은편에 앉은 현우가 말했다.“내가 뭘.”“질투하면 질투한다고 해. 이제 자격 있잖아.”“일하는데 무슨 질투야.”“그러면서 왜 회원 말고 지혁이만 보고 있는데?”주아는 기획서를 접었다. 현우가 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지혁의 수업이 끝났다.회원이 돌아가자 지혁은 곧장 라운지로 왔다.“언제 왔어?”“조금 전에.”“연락하지.”“일하잖아.”지혁은 주아의 얼굴과 멀어지는 회원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왜 기분 안 좋아.”“누가 안 좋대.”“네가.”주아는 자신이 왜 불편한지 몰랐던 며칠 전과 달랐다. 이름을 알고 나니 숨길 이유도 없었다.“질투했어. 네가 다른 여자한테 웃어서.”지혁은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주아 옆에 바짝 앉았다.“다시 말해 봐.”“싫어. 오늘 왜 다들 두
“표지 일정은 디자인팀과 제가 다시 맞추겠습니다. 대신 프로모션 문구를 오늘 바꾸면 앱 배너 심의도 밀려요. 현재 문구에서 수위 조정하는 안으로 2시까지 정리해서 드릴게요.”쟁점을 나누고 담당자를 정하자 소란스럽던 회의가 빠르게 정리됐다.회의실을 나오던 서영이 주아 옆에 붙었다.“얼굴 좋아졌네.”“일을 잘해서요?”“그건 원래 잘했고. 숙소 침대가 갑자기 편해졌나 봐?”주아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서영이 웃으며 따라왔다.점심 무렵, 안내 데스크에서 연락이 왔다. 방문객이 주아의 물건을 맡기고 싶어 한다는 말에 1층으로 내려가자 지혁이 로비에 서 있었다.한 손에는 노트북 충전기, 다른 손에는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이걸 왜 네가 갖고 와?”“오후에 외근 나가는 길이야. 충전기 식탁에 두고 갔더라.”“회사에 여분 있어.”“그건 몰랐지.”종이 봉투 안에는 샌드위치와 작은 과일 통이 들어 있었다. 주아가 아침에 과일을 남기자 그대로 싸 온 모양이었다.“이건?”“점심.”“권지혁, 연애 시작했다고 하던 것보다 더 챙기면 부담스러워.”단호하게 말하자 지혁은 즉시 봉투를 내려다봤다.“싫어?”“싫은 건 아닌데, 나 혼자 밥 잘 먹어. 네가 매번 책임질 필요 없어.”“책임지려고 한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왔어.”주아가 입을 다물었다.지혁은 짧게 웃었다.
주아는 눈을 뜨자마자 허리를 감은 팔부터 확인했다.어젯밤의 대답을 아침에도 듣겠다던 사람은 정작 깊이 잠들어 있었다. 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베개에 눌린 뺨에는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15년 동안 지혁이 자는 모습은 여러 번 봤다. 경기 전날 대기실에서도, 밤새 영화를 보다 잠든 소파에서도 봤다.같은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은 처음이었다.주아가 팔을 살짝 들어 보려 하자 지혁의 손이 허리에서 움직였다. 눈은 감은 채였다.“가지 마.”“화장실 가려고.”“갔다 와.”“그러려면 놔야지.”그제야 팔이 풀렸다. 주아가 침대에서 내려서자 지혁이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아를 위아래로 확인하더니 상체를 일으켰다.“후회해?”“아침부터 진짜.”“대답해 준다며.”주아는 침대 옆에 서서 지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안 해. 어제보다 더 좋아해. 됐어?”지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주아가 침대 위로 다시 넘어가자 그가 웃으며 받아 냈다.“안 됐어. 한 번 더.”“욕심이 아주 끝이 없네.”“이제 참을 이유가 없잖아.”입술이 닿기 직전, 주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막았다.“양치.”지혁의 눈썹이 구겨졌다.“이주아.”“현실 연애는 구강 위생부터야.”주아는 웃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맨발로 따라오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