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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작가: 꿀떡
“한소희, 지영이를 죽일 뻔하고도 잠이 오냐!”

한소희가 고통 속에 간신히 고개를 들자 눈에 핏발이 선 한태준이 보였다.

그 곁에선 최명희가 고개를 숙인 채 끊임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소희야... 네 언니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모질게 구는 거니? 고별회 일은 우리가 참았지만 이번엔... 아예 지영이를 죽이려고 작정한 거잖아?”

한소희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며 최명희의 가식적인 모습에 치를 떨었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한 자 한 자 똑똑히 내뱉었다.

“고별회의 저주는 제가 한 거 아니에요. 지영이를 민 적도 없고요. 한지영이 절 함정에 빠뜨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는 당신은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요?”

찰싹.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서운 타격음과 함께 한소희의 고개가 돌아갔고 입가엔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

“이런 막돼먹은 년!”

한태준은 당장에라도 한소희를 잡아먹을 듯 기세를 높였다.

“네 엄마도 죽을 때까지 제 잘못은 모르더니 너도...”

“여보, 진정하세요! 다 소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최명희가 한태준의 등을 다독이며 가식적인 위로를 건네자 한태준은 매몰차게 한소희를 쏘아보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한소희, 네가 정 그렇게 잘났다면 오늘부터 넌 더 이상 우리 한씨 집안 딸이 아니다!”

한태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최명희를 데리고 문이 부서져라 닫으며 떠나갔다.

그와 동시에 번개가 허공을 가르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소희는 기력이 다해 바닥에 주저앉았고 가녀린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임종 직전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마른 손으로 한소희의 손을 꼭 쥐고 끊어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한 자 한 자 내뱉던 목소리였다.

“소희야, 앞으로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렴... 엄마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소희는 지난 시간 동안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잠을 청하며 자신을 채찍질해 왔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한태준의 사랑 따위 없어도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엄마...”

한소희는 무릎을 적시는 눈물과 함께 나직이 읊조렸다.

“이런 못난 모습만 보여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창밖의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몰아쳤고 한소희는 스스로를 껴안은 채 눈물 속에서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

다시 한소희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느샌가 거실 소파로 옮겨져 있었다.

벽로 속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정적을 깨우고 있었고 그 곁에 앉은 강주혁은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푸르스름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주혁 씨...”

한소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그를 불렀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에는 한때의 다정함 대신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만이 가득했다.

“깼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한소희는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강주혁은 대답 대신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 원래는 널 데리러 가려 했어. 그런데 갑자기 지영이 전시회장에 불이 났더군. 작품이 단 한 점도 남지 않고 전부 재가 되어버렸어.”

한소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주혁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그녀가 급히 항변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정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제발 조사해 봐...”

“한소희.”

그가 나지막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생전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에 한소희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화가가 되는 건 지영이의 가장 큰 꿈이었어. 그 그림들은 지영이 목숨만큼 소중한 것들이라고. 그런 애가 자기 분신 같은 작품들을 스스로 없앴을 리는 없잖아.”

한소희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불을 질렀다는 사실, 장인어른이나 지영이한테는 말 안 했어.”

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만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 너도 소중한 걸 잃는 기분이 어떤지 똑같이 느껴봐야지.”

그제야 한소희는 강주혁의 손에 어머니가 생전에 만들어준 인형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이걸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아.”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인형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이걸 망가뜨리면, 너도 죽을 만큼 고통스럽겠지?”

“안 돼!”

한소희는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지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인형은 한소희가 열 살 때,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가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유일한 유품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바늘조차 제대로 잡지 못할 만큼 쇠약한 상태였지만, 끝내 인형을 완성해 임종 직전 한소희의 손에 쥐여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소희야, 엄마가 더는 곁에 있어 줄 수 없구나. 앞으로 엄마가 보고 싶으면 이걸 보렴...”

그 후 한소희는 어머니의 유해를 인형 속에 몰래 바느질해 넣고 매일 밤 인형을 품에 안고 자며 수많은 고통스러운 밤을 견뎌왔다.

그런데 지금, 강주혁은 그녀의 유일한 구원이자 전부인 그것을 없애려 하고 있었다.

“지영이가 떠나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 네가 말을 듣지 않은 탓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주혁은 손을 들어 인형을 활활 타오르는 벽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안 돼!”

한소희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앞뒤 재지 않고 벽로로 뛰어들었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팔을 집어삼켰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꽃 속에서 이미 검게 그을린 인형을 필사적으로 낚아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망가진 인형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검게 타버린 천 위로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와 함께 강주혁은 그녀를 지나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실을 나갔다.

...

한소희는 인형을 안은 채 밤새 울었다.

이튿날 먼동이 틀 무렵, 그녀는 망가진 인형을 챙겨 캐리어를 끌고 별장을 나섰다.

대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지영의 휠체어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한소희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소희야, 무섭게 왜 그래?”

한지영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가면 우리 다신 못 볼 거야. 이미 아빠랑 주혁이 눈엔 네가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년으로 찍혔으니까. 그러니 그 사람들이 널 다시 이 땅에 발붙이게 둘 것 같니?”

“그래? 차라리 잘됐네.”

한소희가 차갑게 눈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넌 곧 죽을 테니까, 우리 정말 다시는 볼 일 없겠다.”

그 말에 한지영은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소희, 너 정말 내가 불치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어?”

한지영은 갑자기 휠체어에서 일어나 한소희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건 강주혁을 속이기 위한 연극일 뿐이야. 나중에 오진이었다고 발표하면 그가 얼마나 기뻐하겠어? 참, 비밀 하나 더 알려줄까?”

한지영은 한소희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사실 강주혁이 너한테 보여 준 혼인관계증명서는 가짜였어. 그의 법적인 아내는 나거든.”

한지영은 한소희가 무너지는 모습을 기대하며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한소희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어 마디가 하얘지면서도 얼굴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그래, 그럼 둘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살아 봐.”

한소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강주혁의 검은 세단이 한소희의 곁에 멈춰 섰다.

강주혁이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지금 가는 거야?”

“어.”

한소희는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 서로 냉정해지는 시간을 갖자.”

강주혁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돌아오면, 그때 우리 문제 제대로 해결해 보자고.”

한소희는 대답 대신 묵묵히 택시에 올라탔다.

멀어지는 강주혁의 차를 바라보며 한소희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강주혁, 진실을 알게 된 뒤에 부디 후회하지 않길 바라.’

차가 출발하자 한소희는 사랑과 증오가 점철된 그 별장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바다처럼 고요했다.

한소희는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기사님, 공항으로 가주세요.”

두 대의 차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렸다.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된 두 사람의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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