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말을 들은 루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이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곳은 나스, 제국이 아닌 에이든의 모국이니 그는 안전할지라도 겨우 추방기간까지 고작 하루 이틀 남은 외국인인 저의 신세는 달랐다. 이 결혼이 엎어지면, 자신은 아르테미스로 혹은 더 나쁘면 벨루아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루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시간동안 백작가보다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벨루아의 새장에서 만족했던 건, 그를 사랑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애먼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고서야는 견딜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그러다 목숨을 건 시도로 마침내 그 곁을 떠났는데 결국 그저 화가 났다는 데미안의 변덕으로 이렇게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정말 급할 땐 급소라도 때려리고 도망가야 한다. 머릿속에 남은 결론이었다. 공작을 해하려 했다는 혐의가 붙겠지만, 적어도 평생 수녀원이나 벨루아에 갇혀 사는 것보다야 잠깐 감옥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불안이 천장을 뚫을 만큼 올라갔을 때 문이 열렸다. 순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끊기는 것 같았다.에이든은 그 당시의 루시아의 버석거리는 메마른 시선을 기억했다. 셀레나가 숨도 쉬지 못하고 저에게 달려와 데미안 벨루가 왔다고 일러주지 않았다면 조금 더 늦었다면, 큰일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그를 초대한 일도 없었고, 그토록 치밀하게 입장객을 골라냈는데도 어디서 구멍이 난걸까. 에이든의 머릿속에 목을 칠 사람들의 명단이 씌어졌다가 지워졌다. 그녀의 일에 관해서라면 그는 자꾸만 더없이 잔인해졌다. 일단은 루시아가 먼저였다. 그녀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이제 나스의 미신 따위에 지지 않았다. 저의 태양이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기사들의 저항은 하우젠의 기사들이 막았다. 애초에 나스의 영토였으니 당연히 그들이 우세했다. 서둘러 신부 대기실 안에 들어가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루시아의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 다음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벽에 데미안 벨루아를 밀친 것까지는
제국에서도 벨루아 전 공작부인의 거취는 비밀로 부쳐졌지만 이미 나스의 언론들이 대공과의 결혼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는 빠르게 소식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온 이후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에이든이 그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때 고개를 저었다.다만 이렇게 자기 아내였던 사람의 결혼식에, 그것도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직접 타국에까지 방문할 줄은 몰랐다. 아내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자기 성욕을 풀어주는 인형 역할이나 하던, 사람도 아닌 어떠한 존재를 위해. 루시아는 그래서 새삼 그 저의를 의심했다.셀레나는 무례라는 것도 잊고 그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벨루아의 기사들이 검집 위로 손을 얹는 걸 보았다.그녀가 친구를 제지했다.“잠깐 나가 있어줘, 셀리.”루시아의 말에 눈이 커진 셀레나가 만류한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하지만.”“괜찮아.”그건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셀레나는 그런 종류의 목소리와 눈빛을 루시아가 아주 어린 시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은 친구가 성장함에 따라 빛을 잃었던 귀한 것들 중에 하나였으므로. 셀레나는 그 전조를 믿기로 했다. 더 이상 벨루아 에서의 무기력한 도자기 인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데미안 벨루아가 이곳에 온 보람이 무색하리란 생각이 셀레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셀레나가 나가고서도 데미안은 벨루아의 기사들을 물리지 않았다. 루시아가 직접 언급하기 전까지.“나는 내 시녀도 물러가라 했는데 기사들은 왜 남아있는 거죠. 나를 납치라도 할 셈인가보죠.”데미안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구부러졌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그의 명을 따랐다. 벨루아에 오직 그만을 따르며 공작만을 위해 존재했던 이 인력들은 벨루아 공작부인이더라도 루시아의 명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를 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은 대개 지금 이 신부대기실의 바깥에 있었다. 이를테면 셀레나라든가, 에이든이라든가.그녀의 소년을 생
결혼식 날이 밝아왔다. 세간에서는 아주 졸속으로 치를 거라며 비웃는 언론도 있었지만 대개가 그토록 여성을 멀리하던 에이든의 일사천리로 진행된 소문의 신부와 납치결혼에 대해 궁금해 하는 기사를 냈다.이른 새벽부처 화장과 목욕, 가꾸기로 여념이 없던 루시아는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에이든이 전에 했던 말 덕분이었다. 전날 찾아온 그는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왔다. 다음날 신부로서 꾸며야할 때 하고싶지 않은 게 있냐고. 루시아는 이제 그게 나스의 관습이 아니라 에이든 개인의 다정함, 호의, 선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눈치챌 정도는 되었다.“......코르셋은 차지 않았으면 해.”평생 이런 말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그 말에 에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기절 한적도 있었지.”벨루아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 일 테다. 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웠다.“괜찮아. 자주 입었던 건 아니야.”거짓말.에이든은 때때로 루시아가 저에게 마음을 많이 열어놔도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말할 때면 그가 어찌할 수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걸 일일이 말로 표현하자면 아마 루시아가 저에게 질릴지도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안쓰러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지만.“그리고?”루시아는 첫 번째 결혼식을 생각했다. 레이루나의 기대 가득한 눈빛과 뭇사람들이 그녀를 위 아래로 재단하며 남몰래 비교하던 시선. 그 모든 것을 다시 겪으려니 끔찍했다.“초대된 손님들의 명단을 볼 수 있을까?”일전에도 윌을 통해 확인은 했지만 한 번 더 봐두어도 나쁠 건 없어보였다. 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대응할 것 아닌가.에이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빙긋 웃고 별말 없이 루시아의 곁을 떴다. 대개 그는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루시아에게 담백하게 굴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아주 작은 의심의 싹을 지울 수 있었다. 결론은 전혀 그의 마음을 예측해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당시의
셀레나가 자신에게 그런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루시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나서야할 때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문을 열고 그의 서재에 들어서자,에이든이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 주간 어른이 된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면서 그의 사소한 습관 몇 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어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일부러 아는 체 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 물론 이런 사사로운 것들까지 그녀가 알던 유일한 남자와 또 아버지와, 제레미와도 아주 비교가 된다는 걸 모를 것이었다. 그는 여태껏 그녀의 주위에 없던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남몰래 마치 그를 때때로 구전되는 신화 속 전설의 동물을 목격한 것처럼 바라보기도 했다.물론 에이든은 그 뜻모를 시선을 두고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아마 이미 자신의 인기척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접어 활짝 웃는다.“루시.”“디디. 나도 야간 대학에 갈 수 있을까?”그녀가 건넨 말에 사뭇 놀란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셀레나가 급하게 덧붙였다. 그곳은 주로 평민 출신의 여성들이 가는 곳이라고. 사립학교나 아카데미를 가는 게 나을 거라고.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너와 함께 할 거야. 셀레나.”에이든은 루시가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조차 도서관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때 읽었던 책들도 대부분 사회과학 분류의 도서들이거나 아주 어려운 철학서가 대부분이었다. 귀족 여성들의 애독서라는 낭만 소설이나 그런 쪽은 없었다.어쩌면 루시아다운 대답이라서 에이든은 그것마저도 납득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한데도 그는 고개를 끄덕여 어떻게든 이해할 이유를 하나라도 더 만들었을 것이다.“그럼 수도에 좀 더 남을까?”에이든은 마치 오늘 아침은 좀 걸을까 같은 여상한 어투로 물었다. 그건 앞으로의 일정에 대대적인 변화를 줄지도 모를 중대한 결정이었음에도. 셀레나는 내심 경악했다. ‘겨울의
그녀는 언제부턴가 종종 세상에 아주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거나, 아주 먼 사막을 횡단한 모험가처럼 피로한 낯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늘었다.그럴 때면 셀레나는 그저 잠시 곁을 비우고 방문 밖을 서성이며 혹시나 루시아가 쓰러지지는 않을까밖을 지키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분위기에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셀레나는 궁금했다. 이제껏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 그 세계에, 눈앞의 남자는 과연 어떨 것인지. 루시아는 그에게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것인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진부하고 낭만적이고 다만 주인공들은 행복한, 그저 음유시인의 사랑 이야기같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에이든은 자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같았지만.***루시아가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그때였다. 악몽을 꿔서 식은땀으로 온몸이 범벅이었다. 레이스를 두른 잠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마침 셀레나가 자러 간 듯 했다. 부르는 줄을 당길까 하다가 친구에게 이건 너무 하대하는 방식인 것같아 평소에 선호하지 않았던 걸 잠결에 떠올리고는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비교적 나라의 가운데에 위치한 수도라고는 해도 나스는 전반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제국에 비해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이번 몇 주는 꼭 열대우림의 우기처럼 소나기같은 비가 내리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더니 고작 하루 이틀 만에 겨울 찬바람같은 찬기가 불어왔고, 입에서는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연기가 불었다.하우젠 령에 갈 목적으로 루시아와 셀레나가 주문했던 겨울옷이 늦어지는 것도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로 의상실에 겨울옷 주문 제작이 폭주해서 라고 했다.루시아는 서늘한 복도의 기운을 느끼며 두꺼운 스웨터실로 짠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자박자박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타운하우스를 거닐었다. 아무도 없이 고요한 통로를 건너는 일은 이곳에서 좀처럼 없어서 오래간만인 일이었다.아이가 죽고 나서, 그러니까 루시아가 겨우 눈을 뜨고 아이의 관을 받아보고
루시아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이 된 이래 그녀의 시녀가 아무리 친정인 아르테미스 백작가에서 데려왔다고는 하나 평민 출신인 것은 내내 그녀에게 흠잡히는 일이었다. 셀레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아주 어릴 적부터 유모인 제 어머니를, 그리고 그 딸인 저를 편견 없이 좋아해주던 아이였다.별을 닮은 듯 반짝이는 큰 눈망울이 어린 사슴 같던 루시아는 악독한 브리짓 언니 보다도 사실 다정한 셀레나가 더 좋다고 귓가에 비밀처럼 속삭이는, 그리고는 쑥스러워하며 볼을 붉히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자신도 비를 맞아가며 피를 뚝뚝 흘리는 소년을 주워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평소의 루시아의 성품이라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도와주고, 함께 지내다 떠난 이가 이제와 이렇게 루시아와 저를 구해주다니 이것도 다 제 친구의 다정함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라고 셀레나는 굳게 믿었다.“이곳에서라면 평민이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고, 에이든이 그렇게 만들었다면서요. 그러면 저는 야간 대학을 다니고 싶습니다.”에이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스에서 온 이래로 어미새 돌보듯 내내 루시아의 곁을 떠나지 않던 그녀였다.셀레나의 과보호가 때때로 에이든의 그것보다 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물론 그가 없었던 시간에 루시아의 곁을 지켜 본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런 셀레나가 루시아의 곁을 잠시 비워가며 할 일이란,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여성도 보증된 신분이 있으면 야간 대학에 등록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타국에서 왔으나 귀족 여성의 시녀 자격이었으니 어찌됐든 셀레나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제국에서도 그닥 루시아와 달리 책보는 일에는 관심도 없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에이든은 결심의 계기가 궁금했다.“저는 내내 루시아를 위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국에서는 사람도 아니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씁쓸한 자조가 셀레나의 초록눈을 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