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황후 폐하를 들라 하라.”
레온은 목소리 아래 깔린 비릿한 긴장을 억눌렀다.
대접견실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자, 은빛 스며든 틈 사이로 한 겹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운 광채를 머금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과 금빛이 기묘하게 얽혀 흐르는 듯한 머리칼이었다. 햇빛 아래 흔들리는 그 물결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바람 한 점 스치지 않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고도 서늘했다.
은회색과 청색이 겹겹이 섞인 로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얇은 실크 드레스가 허벅지 곡선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밀착되었다 사라졌다.
레온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르센의 명문가 영애로 자라 성문에 발 한 번 내디딘 적 없다던 정숙한 아내. 어젯밤, 긴장으로 파들거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겨우 첫날밤을 치렀던 그 수줍던 여인은 어디로 간 걸까.
지금 대접견실로 들어오는 로제는, 마치 수천 명의 사내를 발밑에 꿇려본 여왕 같은 기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알던 로제가 맞아?’
레온은 등줄기를 훑는 기묘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어제의 그녀가 꺾기 미안한 하얀 꽃이었다면, 오늘의 로제는 그 향기만으로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붉은 장미였다. 그 낯선 괴리감이 레온의 소유욕을 기묘한 방향으로 자극했다.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노골적으로 로제에게 멈췄다.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의 동공이 확장되듯, 그의 시선은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의 굴곡을 타고 집요하게 내려갔다. 예의나 품격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탐닉의 시선이었다.
로제는 조용히 레온의 곁에 서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후, 로셀린입니다. 드라켄 황제 폐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자, 카시안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황후 폐하. 레온하르트 폐하의 곁은…… 평화롭고… 안온해 보이는군요”
로제가 대답 없이 자리에 앉자, 카시안은 다리를 꼬며 오만한 본심을 드러냈다.
“여성은 치장과 품위를 통해 남자의 승전욕을 고취하는 존재지요. 황후 폐하처럼 탐스러운 분이라면…… 아르센의 황제가 제국을 돌볼 정신이 있겠습니까? 낮이나 밤이나 침소에만 박혀 있고 싶겠지.”
노골적인 성희롱이었다.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황제의 밤을 달래는 '장식품'이자 '배출구'로 깎아내리는 발언에 접견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레온의 얼굴이 단숨에 강직해졌다.
전생의 로제라면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겠지만, 지금의 로제는 달랐다. 그녀는 카시안의 적안을 정면으로 꿰뚫어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카시안의 붉은 적안을 정면으로 꿰뚫어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치장과 품위가 그저 남자의 정복욕이나 부추기는 도구로 보이신다니. 드라켄의 황제께선 세상을 참 단순하게 보시는군요.”
로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내용은 날카로운 면도날 같았다.
“하긴, 평생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만 누비시느라 여자를 ‘정복해야 할 고기’ 정도로만 배우셨다면 그럴 수 있겠네요.”
카시안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예상 밖의 날 선 대답이었다.
감히 타국의 황제를 ‘무식한 야만인’이라 조롱하는 발언에 귀족들이 헉, 숨을 삼켰다.
“칼날로 땅을 넓히는 건 짐승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땅을 지배하고 사람의 혼을 빼놓는 건 온전히 머리를 쓸 줄 아는 인간의 영역이죠.”
로제는 부채를 천천히 접으며,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낮에도 밤의 욕망에 절어계시는 폐하 같은 사내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독설.
카시안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 로제를 응시했다.
방금까지 그녀를 탐스러운 전리품쯤으로 여기던 붉은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주 훌륭한 독설입니다, 황후 폐하.”
카시안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지략은…… 대개 밤의 매력이 부족한 여인들이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세우는 방어 기제지요. 꾸며도 탐스럽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카시안은 마치 정론을 말하듯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황후 폐하는…… 그럴 필요가 없으신 분이지요. 머리 아픈 정치 따위는 남자들에게 맡기시고, 그저 황제의 씨를 잘 받아 잉태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여자의 진짜 자질은 국정 테이블 위가 아니라, 침대 위에서 증명하는 법이니까요.”
명백한 모욕이자, 황후를 번식용 도구로 취급하는 도발이었다.
‘이 저급한 자식이……!’
레온은 더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의 마력이 그의 주변에서 위협적으로 소용돌이쳤다.
평생을 온화하게만 자라온 그였지만, 제 아내를 노리개 취급하는 카시안의 언사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하지만 레온이 폭발하기 직전, 로제가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마치 철없는 짐승의 짖음을 구경하는 주인처럼 여유로웠다.
“당연히 잉태해야지요. 폐하의 말씀대로 황후의 자질이 그곳에 있다면 말입니다.”
로제는 슬쩍 레온의 단단한 팔뚝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하며, 보란 듯이 고개를 기댔다.
살결이 닿는 감촉에 돌연 레온의 몸이 돌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정략결혼이라 다들 차가울 거라 짐작하시지만…… 저는 제 남편을 너무나 연모하거든요.”
로제의 시선이 카시안을 똑바로 뚫어지게 응시했다.
“게다가 제 남편이 밤일엔 또 얼마나 열정적인지. 폐하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어젯밤에도 제가 겨우 달래서 재워야 했을 정도니까요.”
“커헉……!”
옆에서 차를 마시려던 레온이 비명 같은 사레를 터뜨렸다.
얼굴이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그는 로제가 아플까 봐 손 하나 대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며 쩔쩔맸었다. 그런데 지금 로제는 그를 대륙 최고의 정력가로 묘사하고 있었다.
당혹감에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레온의 몸은 정직했다.
카시안 앞에서 자신을 밤의 지배자*로 치켜세워주는 아내의 노골적인 도발에, 묘한 정복감과 함께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카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재밌어.’
가능하다면 전리품으로 취할까 했는데, 침대 위에 올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사레가 들려 괴로워하는 레온을 비웃으며 일어섰다.
“아르센의 황제께서는…… 낮에는 양 같으시더니 밤에는 늑대라도 되시는 모양이군. 부럽군요, 황후 폐하. 저런 소년 같은 얼굴로 짐승처럼 군다니.”
카시안은 로제에게 다가가며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췄다.
“……그 정열이 나중에도 식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복상사라도 하시면, 이 아름다운 황후의 밤을 누가 위로해 주겠습니까?”
“폐하가 부끄러움이 많으셔서요. 이해해 주세요.”
로제는 지지 않고 태연하게 레온의 등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레온의 옷감 너머 척추 라인을 은밀하고 끈적하게 훑으며, 그가 느끼는 수치심과 흥분을 완전히 장악했다.
레온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카시안 앞에서 자신을 '진짜 남자'로 세워준 그녀에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종속되는 기분이었다.
“부부 금슬이 그토록 좋으시다니 다행이군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황후 폐하. 밤이나 낮이나 말입니다.”
카시안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남긴 채 대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오만한 뒷모습을 보며, 로제는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덜컹.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짙은 어둠이 깔린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내부는 숨 막힐 듯 고요했다.블랑은 창가 쪽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카시안의 옷자락이라도 스치면 또 귀찮다는 소리를 들으며 내쳐질까 봐, 짐짓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하지만 카시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그는 팔짱을 낀 채, 가면 너머의 시선으로 블랑을 끈적하게 핥아내리고 있었다.‘왜 저렇게 멀리 앉지?’아까 집무실에서는 잘만 기어들어 오더니.제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허벅지에 부드러운 뺨을 비비며 헐떡이던 그 뜨거운 감촉이 아직도 사타구니를 뻐근하게 만들고 있었다.‘물론, 매몰차게 내쳐버린 건 나지만.’카시안은 짐짓 턱을 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블랑이 저렇게 거리를 두고 얌전하게 구니 되레 속이 탔다. 이 영악한 여자는 제 발밑에서 좀 더 수치스러워하고, 좀 더 안달이 나야 예쁜데.“블랑.”“네, 폐하.”블랑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카시안은 그 겁먹은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자리가 좁나?”“네? 아뇨, 아주 넓습니다만.”“그런데 왜 문짝에 붙어서 가지?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카시안이 턱짓으로 제 양다리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켰다.“이리 와.”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블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풍성한 벨벳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며 겹쳐지고, 두 사람의 단단한 허벅지가 노골적으로 맞닿았다.“더.”카시안이 굵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얇은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아, 읏…….”블랑의 몸이 속절없이 무너지며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완전히 올라타듯 포개졌다. 맨살이 드러난 등허리에 카시안의 뜨겁고 거친 손바닥이 닿자, 블랑의 척추가 찌릿하게 굳었다.“이제야 좀 봐줄 만하군.”그는 만족스러운 듯 블랑의 등허리를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아까처럼 좀 더 음탕하게, 애원하듯이 제게 매달려주길 원했다.“아까 집무실에서.”카시안이 짐짓 무심한
저녁 6시, 서쪽 별궁.블랑은 화장대 앞에 앉아, 붉은 립스틱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했다.‘연회 시작까지 2시간…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어?’바닥에 무릎을 꿇고 다리 사이에서 애원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은 그 썩은 동아줄을 쥐고 서연합을 밟고 제 왕국을 세우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 것이었다.이대로 카시안을 잃으면 언제든 목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 거대한 야망마저 한낱 재로 흩어지게 된다. 사랑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내 왕국을 세워줄 가장 완벽한 방패이자 절대적인 검을 잃는 것이다.[똑똑.]노크 소리에 블랑의 눈빛이 번뜩였다.“들어와.”대답과 함께 시녀가 들어왔다. 그 뒤로, 두 명의 시종이 커다란 검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폐하의 명입니다.”상자가 바닥에 내려지고, 뚜껑이 열렸다.블랑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빛을 반사하지 않고 삼켜버리는 짙은 흑색.겉감은 밤의 어둠처럼 무거웠으나, 움직일 때마다 안감에서 핏빛 와인색이 아찔하게 번뜩이는 벨벳 드레스였다.목선은 단정하게 막혀 있었지만, 등은 허리선까지 노골적으로 깊게 파여 있었다. 천박하지 않은, 그러나 사내의 소유욕을 극도로 자극하는 완벽한 관능이었다.상자 한가운데 놓인 붉은 보석의 나비 가면과 짧은 쪽지.[내 파트너가 초라한 꼴로 다니는 건 질색이니, 입고 대기하도록.]블랑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사과도 애정도 섞이지 않은 이 드레스의 의미를 그녀는 한눈에 파악했다.이것은 옷이 아니라 황제가 던진 목줄이었다. 내 파트너로서 예쁘게 꾸미고 얌전히 엎드리라는, 그의 통제.‘입지 않고 버티는 괜한 자존심 싸움 따위는 안 해.’오히려 완벽하게 입어주고, 그의 숨통을 조여버릴 것이다. 진짜 목줄을 쥔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어야 하니까.“……알겠다고 전하세요.”블랑은 드레스 위로 손끝을 미끄러트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거울 속에는 버림받을까 떨던 약자가 아니라, 가
“무서워서 그랬어요. 폐하가 절 장난감처럼 쓰다 버리실까 봐… 그래서 그 후작을 만나러 간 거였어요.”블랑의 섬세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카시안의 허벅지 안쪽, 가장 뜨겁고 위험한 곳을 향해 느릿하게 기어 올라갔다.“화 푸세요, 네? 폐하가 원하시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여기서 옷을 벗으라면, 당장 벗을게요.”카시안은 숨을 멈췄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절대 제 손에 길들지 않을 것 같던 여자가, 지금 제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엉망으로 다뤄달라며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허벅지에 닿은 그녀의 매끄러운 뺨, 가쁜 숨결, 사타구니를 향해 올라오는 끈적한 손길.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책상 위로 끌어올린 뒤, 서류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짐승처럼 박아넣고 싶었다.하지만.‘여기서 눕히면 내가 지는 거다. 완벽하게 목줄을 채워야 해.’카시안은 아랫도리로 몰리는 터질 듯한 쾌감을 악물고 억누르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조금 더 애타게,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내 앞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담지 않겠지.카시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블랑의 가느다란 턱을 쥐었다.부드럽게 쓰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억센 악력으로 그녀의 고개를 뒤로 밀어냈다.“후우…….”카시안이 짐짓 지루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블랑. 네가 이 방에서 당장 꺼낼 수 있는 무기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그는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블랑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오늘은 발정 난 고양이를 달래줄 기분이 아니군.”블랑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렸다.거절당했다.수치심을 내던지고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애원했는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폐, 폐하……?”“밀린 서류가 산더미야. 네 얄팍한 재롱을 받아주기엔 내 시간이 너무 비싸서 말이지.”카시안은 무감한 얼굴로 다시 펜을 잡았다. 시선은 이미 그녀를 지워버린 듯 서류로 향해 있었다.“나가 봐.”협박이 아닌 진짜였다.블랑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
오후 2시. 황제의 집무실.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시종장도, 호위기사들도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했다.카시안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넘기고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했다.“다시 써와.”짜악!카시안이 보고서를 바닥으로 쳐내자, 종이가 눈송이처럼 허공에 흩어졌다.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머릿속에선 어젯밤 블랑이 뱉어낸 서늘한 독설이 귓가를 맴돌았다.[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주다가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어설픈 사랑놀음?’“빌어먹을.”카시안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만년필이 대리석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고, 검은 잉크가 핏자국처럼 흉측하게 튀었다.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제 유일한 진심을 비웃고 짓밟은 그녀가 미치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게 화가 나는 건, 그 모욕을 당하고도 지금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의 향기를 맡고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사내의 발정 난 본능이었다.“폐하.”그때, 시종장이 얼어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블랑 백작 부인께서…… 돌아가라고 할까요?”카시안의 턱관절이 뻐근해지도록 힘이 들어갔다.어젯밤, 그녀는 레녹 후작을 등 뒤에 세운 양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 어설픈 허세에 코웃음이 났다.순진한 진짜 ‘블랑’이라면 모를까, 가짜 껍데기를 뒤집어쓴 ‘로제’에게 레녹은 방패가 되어줄 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권력과 부가 아닐 테니.그 위태롭고 앙증맞은 기만극을 빤히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 주며 서연합으로부터 그녀를 지킬 이는 드라켄의 황제인 카시안 자신뿐이었다.제 살길을 영악하게 계산하는 그 여자가 그 뻔한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결국 레녹이라는 카드는 드라켄에서 살기 위해 쥐어 짜낸 허세일 뿐, 그녀가 비를 피할 곳은 결국 내 발밑밖에 없다.지금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하나뿐인 진짜 동아줄을 잃을
[에필로그 : 악마에게서 온 편지]제국 북부의 끝자락.일 년 내내 축축한 안개가 걷히지 않는 저주받은 영지, 그레이필드.남작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은밀히 숨겨둔 곳.오랫동안 방치되어 흉가나 다름없는 북부의 낡은 별장은 낮게 가라앉은 빗물 냄새와 매캐한 곰팡이, 그리고 썩어가는 나무 비린내로 절어 있었다.스산한 바람이 창틀을 흔들 때마다,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비 전하.”늙은 유모가 가늘게 떨리는 촛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그 아주 작은 기척에도 여자는 흠칫 놀라며 제 품 안의 아이를 미친 듯이 끌어안았다. 얇은 슬립 새로 드러난 여자의 앙상한 쇄골과 어깨 위에는, 미치광이 남편 엘런이 남긴 시커먼 멍과 채찍 자국들이 흉측하게 얽혀 있었다.“그이인가요? 그자가, 그 미치광이가 결국 날 찾아낸 건가요?! 나와, 내 아들을 죽이러……!”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고 핏발이 서 있었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던 고귀한 장미는 온데간데없고, 매질에 길들여진 가여운 짐승 한 마리만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아닙니다, 전하. 엘런 저하의 사냥개들이 아닙니다. 제국 수도에서…… 전령이 편지를 두고 갔습니다.”“편지……?”타티아나의 메마른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유모의 손에 들린 것은 달콤한 장미향이 배어 있는 최고급 양피지. 그 위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페온 공작가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타티아나는 부러진 손톱으로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듯 가져갔다.다정한 필체로 씌어 내린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시시각각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공포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서늘한 경멸로.그리고 마지막엔…… 지독하리만치 거대한 열망으로.[- 너를 기다리는 오랜 친구, 아이린.]“……아하하.”타티아나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마른 실소가 터져 나왔다.친구? 카시안 대신 그 미치광이의 번지르르한 껍데기와 혓바닥에 홀리도록 완벽한 함정
쾅-!카시안이 테이블을 내리쳤다.굴러다니던 술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이 났다.“지금… 나를 그 새끼와 비교하는 건가?”“비교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블랑은 발밑으로 파편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폐하는 감정적이에요. 늙은 공작이 도발하면 화부터 내시죠. 그러니 매번 지는 겁니다. 하지만 레녹 후작은 다르더군요. 그는 감정을 죽이고, 완벽한 계산을 하더군요.”“그만.”“그 남자는 제게 명분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폐하가 쥐여주지 못한, 아주 확실하고 치명적인 칼을요.”“그만하라고 했어!”카시안이 블랑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가녀린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질렀다. 평소라면 그녀를 녹여내렸을 그 뜨거운 체온이, 지금은 노골적인 폭력과 살기를 품고 있었다.훅 끼쳐오는 독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짙은 체향. 숨결이 닿을 만큼 아찔한 거리였지만, 블랑은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치켜든 턱 끝이 그의 흉포한 턱선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맞물렸다.그는 그저 위로를 원했다.오늘만큼은 품에 안겨 '폐하가 최고'라고 맹목적으로 속삭이며 상처를 핥아주는 여자를 원했다.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찢어진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고, 왜 더 잘하지 못했냐며 발밑으로 그를 짓밟고 있었다.“나는 네가, 온전한 내 편인 줄 알았어.”카시안의 성대가 고통스럽게 긁혔다.“그런데 적의 수장과 손을 잡고 와서 나를 비웃어?”“비웃는 게 아니라 정신 차리시라는 겁니다!”블랑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소리쳤다.“폐하의 그 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 주다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 저는 폐하의 위로나 해주는 인형이 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두 사람의 시선이 날 선 칼날처럼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카시안은 처음으로 블랑에게서 낯설음을 느꼈다.자신이 누군지 몰라 벌벌 떨던 순진한 처녀도, 침대 위에서 열락에 젖어 달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