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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6 10:08:01

아르센의 수도 칼텐부르크.

나른한 봄볕 아래 평화롭던 도시의 공기는, 일순간 비릿한 피 냄새와 뜨거운 무쇠의 열기에 짓눌려 굳어버렸다.

먼저 들린 것은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규칙적인 철제의 파동, 대지를 가르는 짐승의 박동이었다.

“……왔다.”

군중 속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문 너머로 검붉은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들이닥쳤다.

북방의 포식자, 드라켄 제국의 황실 근위대.

태양 빛을 집어삼킬 듯 번쩍이는 흑철색 갑옷들은 흙먼지 하나 없이 오만했다.

300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는 도시를 순식간에 질식시킬 듯 무거웠다.

그들의 등 뒤에서 펄럭이는 붉은 망토는, 마치 대륙을 피로 물들이며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파도의 정중앙.

그 틈을 가르며 한 마리의 거대한 흑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켄의 젊은 황제, 카시안.

“저,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전쟁귀?”

“세상에…… 미친 짐승이라더니,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잖아?”

흉터 투성이의 야수를 상상했던 이들은, 그의 기이할 정도로 오만한 아름다움에 숨을 멈췄다.

밤의 장막을 잘라 만든 듯한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거칠게 흩날렸고, 조각도로 깎아낸 듯 선명한 이목구비는 오만할 정도로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홀려 시선을 마주친 순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감각에 뒷걸음질 쳤다.

나른하게 내려뜬 눈매 속, 타오르는 루비처럼 붉은 동공이 번뜩였다.

그것은 베어 넘길 사냥감의 급소,

혹은 탐닉할 수컷의 욕망을 찾는 짐승의 것이었다.

카시안은 자신을 향한 군중의 경외와 공포를 즐기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가죽 장화가 말 배를 차는 묵직한 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때렸다.

‘한심하군.’

그는 고삐를 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직 시선만으로 아르센의 성벽을 훑었다.

방비는 허술했고, 병사들의 눈엔 기강 대신 나태함이 그득했다.

짓밟아 무너뜨리고, 그 위에 군림하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의 위험한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구경하던 귀족 부인들은 묘한 수치심과 갈망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저 오만하고 강인한 육체 아래 짓눌리고 싶다는, 수동적인 본능이 꿈틀거렸다.

황궁 앞의 대형이 잠잠해질 즈음, 실크 옷을 입은 아르센의 대신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굽실거렸다.

얼굴에 번들거리는 식은땀, 비굴한 미소.

카시안은 말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발밑에 기어가는 벌레를 보듯, 아주 무심하고 건조하게.

“시끄러워.”

낮게 깔린 저음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대신들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인사보다 방비부터 챙겼어야지.”

카시안이 채찍을 쥔 손으로 텅 빈 성벽 위를 가리켰다.

“궁수대가 하나도 없군. 내가 불화살이라도 쏘면 이 성은 환영식이 아니라 거대한 장례식이 되겠어. 너희 황제는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방비를 유지하는 건가?”

공기가 찢어진 듯 조용해졌다.

대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이곳을 불바다와 피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인데. 그래도 평화를 가불이라도 한 것처럼 굴 텐가?”

당황한 대신 하나가 용기를 쥐어짜듯 앞으로 나섰다.

“아, 아닙니다! 저, 저희 아르센은 평화로운 나라라…… 백성들이 황제를 사랑하여 굳이 무력을…….”

“평화라.”

카시안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약해빠진 것들이 꼭 평화라는 고결한 단어 뒤에 숨어 자신들의 거세된 무능을 가리더군.”

그의 눈동자에 노골적인 조소와 함께, 날것의 수컷이 가진 공격성이 스쳤다.

‘이런 한심한 나라의 황제라니. 안 봐도 뻔하겠어. 내 발밑에서 목숨을 구걸할 애송이겠지.’

둥― 둥― 둥―.

무거운 정적을 깨고 아르센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아르센 제국의 황제, 레온하르트 폐하 행차!”

성문이 열리고, 근위대의 호위 속에 레온하르트가 걸어 나왔다.

온화한 인상, 부드러운 금빛 눈동자.

하지만 카시안과 마주한 순간, 레온의 미소는 가면처럼 굳어 있었다.

“ 먼 길을 오느라 애썼습니다. 카시안 폐하.”

레온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

하지만 카시안은 그 손을 잡는 대신, 레온을 빤히 응시했다.

시선이 레온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짐승처럼 훑었다.

‘호오.’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겁쟁이 애송이일 거라 생각했던 아르센의 황제.

그러나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기이할 정도로 짙은 살기와 함께 본능적인 광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내 목줄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뭐지? 방금 그 눈빛은. 이런 눈을 가진 놈이 평화니 뭐니 하는 소리를 지껄였다고?’

카시안이 의아함을 느끼려는 찰나, 레온의 눈에서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다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황제의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환영하오. 우리 아르센의 평화로운 바람이 그대에게도 닿기를.”

카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 본 건가?

그는 흥미롭다는 듯, 레온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낮고, 위험한 목소리로.

“평화라…… 글쎄요. 저는 평화보다는, 탐스러운 전리품에 더 관심이 많아서.”

레온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카시안은 그 반응을 즐기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성벽도, 군대도 다 시시하군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는 마치 그곳에 숨겨진 가장 은밀하고 가치 있는 보석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아르센의 꽃.”

“…….”

“소문이 자자한 황후 폐하 말입니다. 어젯밤 폐하의 침실에서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내셨는지, 내가 직접 그 얼굴을 보고 판단하고 싶군요. 아르센의 평화가 그 황후의 숙련된 밤일 덕분인지 말입니다.”

레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짐승처럼 뒤틀렸다.

제 여자를 입에 담는 카시안의 저급하고 오만한 소유욕에, 레온의 안에 잠들어 있던 드래곤의 마력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

.

같은 시각, 황궁 2층 테라스.

반투명한 커튼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로제였다.

그녀는 카시안의 오만한 도발에도,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는 레온의 발악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짖어 봐, 실컷.’

그녀의 시선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로 향했다.

동북제국으로 향하는 도주로가 붉게 표시된 지도였다.

‘이 치정극이 끝나면, 나는 사라질 거야.’

시선이 지도에서 다시 창밖의 두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물론, 저 멍청한 남편을 네가 감히 탐내지도 못할 만큼 완벽하게 미친 사냥개로 만들어놓은 뒤에. 누가 내 진짜 남편이 될 자격이 있는지, 너희끼리 피 터지게 증명해 봐.’

로제는 커튼을 닫았다.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레온을 향한 구원도 카시안을 향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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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1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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