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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애월섬
서현주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니요. 잘못 들은 거예요.”

이 남자가 어젯밤 일과 그녀가 했던 말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유이영으로 착각한 게 아니라고?

연지훈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반항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강제로 무릎 위에 앉혔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책가방이 차 시트 아래로 떨어졌다.

서현주는 미친 듯이 연지훈의 어깨를 때렸다.

“지훈 씨 왜 이래요 정말? 미쳤어요?”

연지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운전석 시트에 밀어붙였다. 이어서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바보로 보여?”

서현주는 둘 사이에 팔을 뻗쳐서 거리를 유지했다.

“날 유이영으로 착각하는데 역겹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됐어요? 진작 말했잖아요. 지훈 씨랑 거리 두겠다고. 자꾸 선 넘는 쪽은 지훈 씨에요. 그리고 약 탄 거! 누가 한 짓인지 제대로 조사했어요?”

그녀는 연지훈의 깔끔하게 재단된 옷깃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눈동자에 눈물이 서서히 고였다.

“더는 날 억울하게 만들 생각 마.”

“더는?”

연지훈은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너를 억울하게 했는데?”

곰곰이 되새겨보니 전생에 수없이 많았다.

그토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서현주... 연지훈과 유이영은 반드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문득 연지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또 뭐? 거리를 두겠다고? 난 허락한 적 없는데.”

서현주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무슨 뜻이에요?”

연지훈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내가 모든 것을 제대로 조사할 때까지 도망갈 생각 마.”

“결국 지훈 씨는 유이영을 의심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서현주는 이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일이 이미 명백해졌어요. 그 과일 주스 말고 다른 의심할 곳은 없어요.”

그녀는 연지훈을 향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

“유이영도 손에 넣었잖아요. 안 그래요?”

연지훈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그는 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하지만 서현주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나랑은 상관없어요.”

그녀는 연지훈을 세게 밀치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시트 아래에 떨어진 책가방도 얼른 주워서 품에 안았다.

남은 길 동안 두 사람은 모두 조용했고 연지훈은 다시 태블릿을 집어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서현주는 즉시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차 안에서 연지훈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유이영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지훈 씨, 좀 괜찮아졌어요?”

연지훈은 나직이 응했다.

잠시 후, 유이영은 수줍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 씨, 어젯밤에 왜 내 도움 거절했어요? 날 아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난...”

“이영아.”

그가 덥석 말을 자르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유이영은 입을 다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물었다.

“지훈 씨, 오늘 왜 현주 씨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거예요? 둘이 무슨 얘기 나눴어요?”

연지훈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별 얘기 안 했어.”

유이영이 불쑥 질문을 내던졌다.

“약 탄 거 혹시 나 의심해요?”

한참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연지훈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유이영은 그제야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연지훈은 알겠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학교 정문을 바라보았는데 서현주의 모습은 이미 인파들 속으로 사라졌다.

잘난 연채린 씨 덕분에 서현주는 학교에서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따돌림당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이곳은 사립학교라 다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아이들이었다. 연씨 가문은 이 도시에서 서열 1위였고 자연스럽게 한 무리 학생들이 연채린의 뒤를 따랐다.

어쨌거나 그녀야말로 연씨 가문의 진정한 따님이니까.

교실에 막 들어서자 연채린의 따까리가 애매한 말투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왜 이렇게 구려? 대체 며칠을 안 씻은 거야? 어디 시궁창 가서 뒹굴다 온 거 아니야?”

주변 학생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고 조롱과 비웃음이 서현주에게로 향했다.

다만 서현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치며 길을 막고 있던 어느 학생의 발을 ‘우연히’ 찼다. 그리고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연채린은 서현주의 그런 모습에 더욱 짜증이 났다.

그녀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따까리들과 함께 서현주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서현주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책상에 부딪히는 걸 면했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연채린에게 물었다.

“무슨 짓이야?”

연채린이 피식 웃었다.

“무슨 짓이냐니? 당연히 너 같은 뻔뻔한 인간을 까발리는 거지.”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반 전체의 이목을 끌었다.

“다들 잘 들어. 서현주 얘 뻔뻔스럽게 우리 지훈 오빠한테 최음제 타서 관계를 가지려고 했어. 일개 고등학생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게 말이 돼? 역겨워 진짜. 다행히 우리 오빠랑 오빠 여친이 똑똑해서 덫에 걸리지 않은 거야. 서현주 얘는 우리 오빠랑 오빠 여친 사이를 이간질하는 나쁜 년이야.”

순간 교실 안은 떠들썩했고 서현주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결론은 모두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서현주는 연채린의 이런 비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연채린보다 키가 컸기에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냉랭한 눈빛과 정색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첫째, 연지훈에게 약 탄 건 내가 아니야. 나 역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어. 둘째, 연지훈 본인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셋째, 말끝마다 뻔뻔하다, 이간질한다고 하는데 너야말로 그게 고등학생다운 모습이니?”

연채린은 서현주의 반박에 할 말을 잃었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책가방을 들어서 바닥에 가차 없이 내던졌다. 맑은소리가 울려 퍼질 때, 서현주는 미처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잠시 후, 서현주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책가방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책가방 안감에서 품질이 별로인 옥고리 하나를 꺼냈다.

서현주는 옥고리와 붉은 끈을 손에 쥐고 두 손이 한없이 떨렸다.

옥고리가 부서진 것이다.

아빠가 남겨주신 옥고리가 부서지다니.

그녀는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다.

주위에는 연채린과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딱 봐도 싸구려 같은데 뭘 이렇게까지 안타까워하는 거야? 서현주 진짜 거지 맞나봐.”

“얘는 그냥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인데 스스로 인간이라고 여기나 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현주는 연채린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연지훈과 유이영, 그리고 엄진경까지 빠르게 학교에 도착했다.

구경꾼들은 교장실 앞에 잔뜩 몰려서 머리를 들이밀고 안의 상황을 살피려 했다.

연채린은 너무 울어서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었고 뺨에는 서현주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서현주는 교장 앞에 서서 옥고리를 꽉 쥐고 있었다.

연지훈과 유이영은 오자마자 연채린 곁으로 다가갔다.

유이영이 연채린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매우 아낀다는 듯이 품에 끌어안았다.

“대체 어떻게 때렸길래...”

연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집스러운 서현주의 뒷모습을 째려봤다.

“서현주.”

차갑고 위엄이 넘치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린이한테 사과해.”

서현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연지훈이 오기 전에 담임 선생님이 그에게 일부 내용을 과장되게 전달했고 연채린에게 불리한 내용은 많이 삭제했을 터였다.

어쨌든 그녀를 용서받지 못할 악인으로 묘사한 게 틀림없었다.

서현주는 허리를 곧게 폈다.

“싫어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

담임 선생님이 차갑게 말했다.

“대표님, 저희는 더이상 현주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히 채린이한테 손을 대다니...”

연지훈의 말투가 더욱 심각해졌다.

“서현주,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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