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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당신도 만나고 싶으면 만나

Author: Doong_E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4 08:50:07

[제4조. 별거 기간 동안 쌍방은 서로의 사생활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으며,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 문장은 폭력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예원은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얼굴로 합의서를 덮었다.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내에게까지 자유라는 이름의 조항을 내민 태도가 기가 막혔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단축번호 1번.

길고 건조한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예원은 거실 베란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독하게 지쳐 보일 뿐이었다.

"어, 나야."

세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된 남편의 목소리는 소름 돋도록 평온했다.

수화기 너머로는 희미한 재즈 음악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요일 밤 8시. 로펌에서 야근을 한다던 남자의 배경음치고는 지나치게 사적이고 관능적이었다.

그때, 미세하게 섞여드는 낯선 기척이 예원의 고막을 찔렀다.

아주 작게 들려온, 하지만 분명한 여자의 웃음소리. 곧바로 방문이 닫히는 듯 소음이 차단되었지만 이미 충분했다.

"서류 받았어."

"그래?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재헌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당황함도 없었다.

마치 중요한 계약서를 퀵으로 보낸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듯한 사무적인 톤이었다.

"확인했으면 사인해서 내 사무실로 보내. 서로 피곤하게 시간 끌 것 없잖아."

"제4조."

예원은 서류의 모서리를 구길 듯 쥐며 낮게 읊조렸다.

"사생활 불간섭, 그리고 외부 교제 제한 없음. 이게 당신이 말하는 합의야?"

"합리적이잖아."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예원은 하마터면 헛숨을 들이킬 뻔했다.

"어차피 180일 뒤면 확실하게 끝날 사이인데, 남은 기간 동안 굳이 서로를 통제하며 피곤하게 굴 필요가 있나? 내 파트너 승진 심사 끝날 때까지 조용히 이혼 유예해 주는 대신, 서로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자는 뜻이야."

"자유?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마."

예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여자와, 아직 내 남편이라는 자리를 유지한 채 아무 책임 없이 지내겠다는 핑계겠지."

침묵. 수화기 너머의 재헌은 단 한 마디도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변명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그 오만하고 여유로운 침묵이야말로 그 여자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지난 몇 달간 예원을 갉아먹던 막연한 의심이 온전한 사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베이는 듯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짙고 끈적한 모욕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자신과 부부로 묶여 있는 시간을 단지 스캔들 방지용 쇼윈도로 쓰면서, 그 안에서 제 욕망과 쾌락까지 챙기겠다는 남편의 지독한 이중성. 자신이 관계를 회복해보려 미련하게 인내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 뼛속까지 깨달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조항을 내밀면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어?"

"말을 이상하게 하네."

재헌이 낮게 웃었다.

비틀린 조소가 섞인 음성이었다.

자신이 이 판의 통제자라고 굳게 믿는 자 특유의 여유.

"당신한테 불리할 것 없는 조건이잖아. 오히려 관대한 거지. 내가 내 자유를 챙긴 만큼, 당신한테도 똑같은 권리를 줬으니까."

적선하듯 내던져진 그 말에 예원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예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재헌은 자신이 정말 다른 남자를 만날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자신의 욕구를 뒤로 미뤄왔던 여자가, 180일이라는 애매한 시간 동안 보란 듯이 다른 누구를 선택할 리 없다는 확신.

이 기만적인 조항 밑에는 철저히 차재헌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형 자유이자, 자신을 향한 지독하게 오만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재헌은 그녀의 침묵을 굴복으로 착각한 듯, 부드럽고 잔인한 목소리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만나고 싶으면 만나. 그럴 사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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