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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수정된 합의서

Autor: Doong_E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9-04 12:00:05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 화면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만나고 싶으면 만나. 그럴 사람이 있다면.’

귓가에 맴도는 재헌의 비릿한 조소가 오히려 예원의 이성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남편의 뻔뻔한 외도 확인에 배신감으로 무너져 내릴 줄 알았지만, 슬픔이나 비참함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판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의 오만함이, 예원 안에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서늘하게 깨우고 있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된다고 믿었던 어제의 문예원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예원은 탁자 위에 놓인 합의서를 챙겨 들었다. 버려진 아내처럼 거실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음 날 오후, 강남의 한 조용한 프라이빗 카페.

"차재헌, 이 미친 자식 제정신이야?"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서류가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예원의 대학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자 기업 계약과 컴플라이언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 박소경이었다.

그녀는 감정적인 위로보다는 냉철한 법률 검토로 힘이 되어주는 완벽한 실전형 아군이었다.

소경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건 합의서가 아니라 지 불륜 보호용 면책 특권이잖아. 사생활 불간섭? 외부 교제 허용? 당장 서류 찢어버리고 유책 배우자로 소송 걸어. 내가 그 자식 가식적인 껍데기 다 벗겨줄 테니까."

소경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맞은편에 앉은 예원의 얼굴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소송으로 가면 흙탕물 싸움이 될 거고, 그 긴 시간 동안 난 계속 '차재헌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법정을 오가야 해."

예원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식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또렷하게 말했다.

"난 그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어. 180일 뒤에 깔끔하게 이혼 도장을 찍어 준다면, 이 별거 합의 자체는 받아들일 생각이야."

"문예원, 너 진짜 바보야? 차재헌은 지금 자기가 파트너 승진하기 좋은 타이밍에 이혼하려고 널 180일 동안 안전한 쇼윈도로 세워두겠다는 거잖아!"

"알아."

짧고 단호한 대답에 소경의 움직임이 멈췄다.

예원의 눈빛에는 남편에게 상처받은 피해자의 억울함 따위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매일 치열한 회의실에서 변수와 싸우며 브랜드를 기획하는 미온개발의 프로젝트 매니저, 철저한 협상자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 서류에 순순히 서명해 주진 않을 거야. 이 계약서를 나한테 가장 유리한 방패이자 무기로 바꿀 거니까."

예원의 서늘한 선언에 소경의 눈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잠시 예원을 마주 보던 소경은 곧 펜을 집어 들고 서류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변호사로서의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좋아. 어디 한번 난도질해 보자. 뭘 원해?"

"먼저, 내 직장이나 업무에 직접 개입하거나, 제삼자를 통해 압력을 넣는 것도 금지해 줘."

예원이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조건을 내밀었다.

"단순한 사생활 보호로는 부족해. 위반한 쪽이 생기면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조건을 조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소경의 입꼬리가 흥미롭다는 듯 올라갔다.

그녀는 거침없이 합의서 위에 붉은 줄을 긋고 여백에 새로운 조항들을 빠르게 갈겨썼다.

"완벽해. 거주지 분리에, 너나 네가 만나는 사람을 조사하거나 접촉하는 것도 금지하자. 뒷조사나 감시까지 전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서류의 가장 기만적인 문장, 제4조에 머물렀다.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

"하, 자기가 바람피우는 걸 이렇게 포장하네."

소경이 코웃음을 쳤다.

"넌 어차피 자기를 못 떠날 테니 180일 동안 얌전히 있을 거고, 자기는 안심하고 놀겠다는 거잖아. 이 쓰레기 같은 조항은 삭제할까?"

"아니. 둬."

예원은 붉은 줄이 쳐진 합의서를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 몇 년간 결혼 생활이라는 틀에 갇혀 잃어버렸던, 서늘하고 명석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자유라면, 나한테도 완벽하게 적용시켜 줘야지."

노트북 타이핑을 준비하던 소경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예원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차재헌의 그 얄팍한 오만에 제대로 쐐기를 박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나중에 딴말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단서를 달아줘.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걸 이혼 협상에서 내게 불리한 사유로 들이밀 수 없게."

소경은 짧게 감탄사를 내뱉더니 경쾌한 소리를 내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차재헌이 제 발로 파놓은 오만의 함정은, 이제 그 자신의 목을 옭아맬 가장 완벽한 올가미로 변하고 있었다.

곧 화면 위로 모든 변수를 차단하는 치명적인 단서 조항이 완성되었다.

[쌍방은 별거 기간 중 발생한 상대방의 외부 교제를 이혼 협상에서 문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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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센 현장 실사가 마무리되고 며칠 뒤.예원과 시혁은 현장 사무실 뒤편에 마련된 작은 자재 샘플실에 들어와 있었다.벽면 양쪽으로 마감재 샘플 보드와 사인물, 각종 자재 박스가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탓에, 통로는 성인 한 명 반 정도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비좁았다.적어도 예원은 그 비좁은 거리를 처음부터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며칠 전 사적인 저녁 식사 이후 시혁을 향한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고, 현장에서 그의 판단을 묵직하게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예원은 선반 위를 훑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제 요청한 메인 라운지 미디어 월 마감 샘플이 이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텍스처를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A구역 선반 쪽에 있을 겁니다."시혁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 두 사람은 도면과 자재 리스트를 대조하며 비좁은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 저기 있네요."예원의 시선이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선반 위에 놓인 짙은 회색의 샘플 보드에 멎었다.그녀가 까치발을 들며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도면을 확인하던 시혁 역시 예원이 찾던 것과 같은 샘플 보드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가죽 장정된 두꺼운 보드 모서리 위로,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아니, 정확히는 얽히거나 겹쳐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찰나, 두 사람의 손끝이 가볍게 스치듯 닿았을 뿐이었다.예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닿은 건 정말이지 손끝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찰나에 닿은 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선명했다.늘 서늘하고 이성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권시혁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체온을 가진 한 '남자'로 감각되는 낯설고 강렬한 순간이었다.당황한 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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