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헌이 전부 한 건 아닙니다."
예원은 그 말이 남긴 서늘한 여운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되짚었다.
시혁에게는 차재헌을 뼛속 깊이 미워하고 증오할 충분한 감정적 이유가 있었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상처받은 피해자라는 위치를 무기 삼아 함부로 타인의 책임을 부풀리지 않았다.
짐작과 의심만으로 재헌을 모든 사건의 최종 가해자로 몰아가지 않는 그 단단하고 건조한 태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예원은 그를 조금 더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예원의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방향의 서늘한 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예원은 자신이 전날 밤, 닿지 않는 거리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시혁의 소매를 붙잡았던 아득한 순간을 떠올렸다.오직 자신의 의지로 먼저 손을 내밀 만큼 그에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과, 그의 아픈 과거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도구로 쓰여도 된다는 권리는
사람들 너머에서 권시혁과 눈이 마주쳤다. 재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제 아내'라는 호칭을 쓴 직후였다.당황하거나 불쾌함으로 굳어진 얼굴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시혁은 잠시 예원을 응시하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옆에 선 관계자의 말에 차분하게 응답했다.애써 화를 억누르거나 기분 나쁜 티를 숨기려는 억지스러움조차 없었다.그는 가볍게 샴페인 잔을 든 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온한 태도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행사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보았던 완벽하고 단정한 아크온 대표의 얼굴 그대로였다.리셉션이 이어지는 내내 예원은 미온개발의 PM으로서 사람들을 응대했다.곁에 머무는 재헌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식적인 태도를 허물지 않았다.겉보기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사회적으로 결함이 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그러나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짓는 순간순간에도, 예원의 신경은 자꾸만 홀 반대편에 있는 시혁을 향해 뻗어나갔다.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그의 모습과 관계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차분한 손짓을 예원은 무의식적으로 좇고 있었다.차재헌의 그 불쾌한 소개 멘트가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예원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다시 시혁을 찾았다.그러다 문득 예원은 깨달았다.방금 전 차재헌이 내뱉었던 호칭의 불쾌함보다, 지금 저 멀리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권시혁의 평온함이 자신을 훨씬 더 곤두서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어젯밤 좁은 차 안에서 그토록 짙은 온도를 나누었고, 계속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런데 다른 남자의 입에서 아내라는 끔찍한 단어가 떨어졌는데도, 이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선을 그었는데도 시혁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평온할 수 있을까.공식적인 행사가 모두 끝났다.
루센 프로젝트의 중간 보고 겸 파트너사 리셉션이 열린 저녁.넓은 연회장은 건축 및 인테리어 업계 관계자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예원은 단정한 와인색 실크 블라우스 차림으로 사람들 틈에 서 있었다.가벼운 샴페인 잔을 든 그녀의 얼굴에는 흐트러짐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예원은 누군가의 화려한 아내나 장식품이 아니라, 미온개발 브랜드전략팀을 이끄는 실무 책임자이자 프로젝트 PM으로서 완벽하게 이 공간에 녹아들어 있었다.쏟아지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고, 필요한 관계자들과 명함을 나누며 자신의 몫과 정체성을 선명하게 증명해 냈다."이쪽 구역 설계가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아크온 측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겁니까?""물론 아크온의 구조적인 이해도가 큰 몫을 했습니다만, 루센의 기본 브랜드 경험을 우선시하여 동선을 조정한 결과입니다."예원의 매끄럽고 여유로운 대답에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미온개발 쪽 PM이 워낙 고집이 셉니다."낯설지 않은, 조금은 과장되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예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예원의 굳어지는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다가온 남자는 차재헌이었다.법무법인 세림의 기업자문 변호사인 그가 이런 업계 리셉션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예원이 실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굳이 끼어든 것은, 예원에게도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낯선 행동이었다.재헌의 등장에도 예원은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언제나처럼 말끔한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완벽한 사회적 얼굴을 하고 있었다.조금 전 예원에게 질문을 던졌던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아, 두 분은 아시는 사이인가 보군요. 일행이십니까?"순수하고 일상적인 호기심이었다.예원이 '업무상 아는 사이입니다'라는 건조한 대답을 입술 끝까지 밀어 올린 순간이었다."네. 제 아내, 문예원입니다."재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예원은 순간적
예원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시혁의 얼굴로 올라왔다. 찰나였지만 분명 두 사람의 눈빛이 맞부딪혔다.시혁이 어젯밤 뜨겁게 얽혀들었던 그녀의 손이 아니라, 그 손가락에 빈틈없이 끼워져 있는 차재헌과의 결혼반지를 확실하게 목격했다는 사실을 예원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서늘하고 차분한 시혁의 눈동자가 다시 예원의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예원은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바짝 말라 들어갔다.그가 입을 열어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왜 아직도 그 반지를 끼고 있느냐고 물을까. 우리가 어젯밤 어떤 약속을 했는데 아직까지 그걸 빼지 않은 거냐고 탓할까.아니면 차가운 눈빛으로 불쾌한 기색이라도 비칠까.짧은 정적 끝에 시혁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회의 내용 정리해서 공유하겠습니다."예원의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방금 전까지 반지에 닿아 있던 그의 서늘한 눈빛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도, 무엇 하나 어긋남 없이 평소와 똑같은 완벽한 업무 모드였다."수정안은 오후까지 보내겠습니다."그 건조하고 사무적인 인사말을 끝으로, 시혁은 짧게 목례를 남긴 채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회의실 안에 홀로 남겨진 예원은 그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가만히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그는 분명히 보았다. 예원의 손에 여전히 족쇄처럼 끼워져 있는 차재헌의 반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도 단 한마디의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기분 나쁜 내색은커녕, 그 흔한 왜냐는 물음조차 없이 평소와 똑같이 서늘하고 단정한 얼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하지 맙시다."예원의 마지막 규칙에 시혁은 잠시 침묵했다. 당황하거나 어이없다는 기색은 없었다.그는 어둠 속에서 예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특유의 건조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그렇게 하죠."그것으로 끝이었다.시혁은 그 이상의 확답을 요구하거나, 아쉬움을 핑계로 다시 입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 뜨겁게 얽혀있던 차 안의 공기를 뒤로한 채, 깔끔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다음 날, 미온개발 회의실.루센 프로젝트의 실무 회의를 위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선 예원은 가장 먼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시혁을 발견했다.창밖으로 쏟아지는 밝은 아침 햇살 아래, 반듯한 수트 차림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예원의 머릿속에 전날 밤 차 안에서의 기억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갔다.어둠 속에서 빈틈없이 맞닿았던 입술의 온도, 뺨을 간지럽히던 더운 숨결, 그리고 계속 만날 거냐는 질문에 내뱉었던 자신의 단호한 대답.그러나 예원은 곧바로 시선을 눈앞의 서류로 내리며 미세하게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다잡았다.시혁 역시 회의실로 들어온 예원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사적인 안부 대신 지극히 건조한 업무용 멘트가 흘러나왔다."수정안, 방금 전송했습니다."어제 잘 들어갔느냐는 다정한 안부도, 밤사이 잘 잤느냐는 일상적인 질문도 없었다.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시혁은 완벽하게 '아크온의 대표'라는 외피를 단단하게 두르고 있었다.예원은 그 차갑고도 프로페셔널한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아득한 긴장감을 느꼈다.어제 차 안에서 합의했던 첫 번째 규칙이 지금 이 순간 한 치의 오차
"우리도 규칙을 만들까요?"예원의 제안이 좁고 고요한 차 안의 공기를 미세하게 갈랐다.시혁은 그 낯설고 당돌한 제안을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기거나 희미하게 웃어넘기며 분위기를 풀지 않았다.오히려 그는 방금 전까지 예원을 살피던 짙고 차분한 눈동자 그대로 예원을 응시하다가,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무슨 규칙입니까."예원은 등받이에 아주 살짝 기대며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문득 남편인 차재헌과 서재에서 맺었던 180일짜리 계약서가 떠올랐지만, 지금 시혁과 나누려는 이야기는 결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이 끝이 정해진 파국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부부라는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한 종료의 조건이었다면, 지금 권시혁과 세우려는 규칙은 서로를 향한 욕망을 인정한 채 새롭게 시작하려는 이 아찔한 관계를 지탱하기 위한 시작의 약속이었다."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되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요."예원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공적인 선부터 분명하게 그었다."일할 때는 지금 이 사적인 감정, 절대로 끌고 들어오지 않기. 루센 프로젝트에서는 지금 같은 일 때문에 서로를 적당히 봐주거나 억지로 밀어주지 않았으면 해요."만약 이 위험한 관계 때문에 예원 자신의 업무적인 잣대가 흔들리고 프로로서의 태도가 오염된다면, 예원 스스로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예원의 단호한 제안에 시혁은 아주 짧게 멈칫하더니, 이내 특유의 서늘하고 건조한 어투로 받아쳤다."그건 원래 그러고 있었습니다."무심하게 툭 던져진 그 대답에 예원의 굳어 있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방금 전까지 숨소리가 섞일 만큼 뜨겁게 입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공적인 영역에서 결코 자신을 무르게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단한 확신.그 사실이
"복수 때문이면 끝냅시다."서늘하고 예리한 선언이 좁은 차 안을 갈랐다.그 순간 예원은 당황하여 변명을 찾거나 어설프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관계가 완전히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위협 앞에서도, 차갑게 가라앉은 시혁의 눈동자를 마주 본 그녀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복수 아니에요."예원의 즉각적인 대답에도 시혁은 다시 거리를 좁혀오거나 굳었던 표정을 풀지 않았다.그는 미동조차 없는 자세로 예원의 맑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섣부른 안도나 긍정 대신 이어지는 무겁고 서늘한 침묵. 시혁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기다렸다.그 침묵 앞에서 예원은 ‘복수 아니다’라는 짧은 부정만으로는 자신이 왜 그를 원했는지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예원은 그 흔들림 없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남편의 전화를 안 받은 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보란 듯이 앙갚음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시혁 씨를 이용해서 재헌을 자극할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단단했다.예원은 잠시 숨을 고르며, 조금 전까지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그의 뜨거운 체온과 짙은 체향을 감각했다.자신이 무엇을 원해서 이 선을 넘었는지, 그 이유를 가장 투명한 언어로 고백할 차례였다."아까 키스해달라고 한 것도……."좁은 차 안의 공기가 예원의 목소리를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냥, 내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재헌이 다른 여자를 만나서도, 서류상의 계약이 그것을 허락해서도 아니었다.과거의 상처를 덮기 위한 도피처는 더더욱 아니었다.오직 문예원이라는 한 사람의 온전한 충동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