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내가 무슨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먼저 가버린 것뿐인데 억울해서 울 리가 있어요?”그는 하예정이 우는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예정이가 널 혼자 병원에 남겨두면 가버리면 넌 기분이 어떻겠어?”장소민은 아들에게 되물었다.그녀의 큰아들은 정말이지 감정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그더러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그의 고약한 성격으로는 다른 여자라면 이미 이혼했을지도 모른다.전태윤은 입술을 깨물고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다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길도 아는데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나 절로 돌아올 수 있어요.”장소민은 말문이 막혔다.“우리 다 건강하니까 검사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내가 의사를 보는 걸 무서워한다면서 무조건 검사하라고 고집하며 화나게 하잖아요. ”전태윤은 계속 투덜댔다.“내가 한 말을 믿지 않잖아요. 날 너무 안 믿는 것 같아요. 임신이란 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임신 못 했으면 못 한 거죠. 결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나서도 임신하지 못한다면 모를까.”장소민은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정말이지, 장가 가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자신이 줄곧 자랑스러워했던 큰아들을 한 대 때리고 싶어 하는 날이 올지를 몰랐을 것이다.“10년 후면 너희들도 이미 늙었어. 그때 가서 검사하고 다시 치료 시작하면 예정이도 고령 산모가 될 거야. 이 자식아, 네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지 도통 모르겠네. 검사 한 번 받아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전현림도 같이 아들을 욕했다.“지금 검사를 하고 안 한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녀석이 제 와이프를 병원에 혼자 두고 가버렸다는 거야. 만약 예정이가 너를 대꾸하려 하지 않거든 우리가 널 도와 사정해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마. 넌 그렇게 당해도 싸. 아직도 본인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예정이가 억지부
전태윤의 조각 같은 얼굴이 심하게 어두워졌다.“엄마, 아빠도 손주를 안길 바라고 계시는 거죠?”장소민은 입을 열었다.“우리가 손자를 안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재촉한 적 없어. 이 일을 우리 탓으로 돌리지 마. 우리는 예정이 앞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한 적이 없어.”“예정이가 스트레스가 커요.”전태윤도 본인이 아내가 건강검진을 받자고 했을 때 조금 예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아내가 아이를 가지는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해 걱정이 앞선 나머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예정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면 예정이에게 운명에 맡기라고 말해줘. 우리는 재촉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임신이 어려워지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해. 너희 둘이 같이 있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잖아. 2, 3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도 임신하지 못하면 그때 다시 검사를 받으면 돼.”“맞아요. 그래서 저도 따로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저와 예정의 몸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래도 예정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예요. 저도 예정이와 말했어요, 정남과 효진 씨의 약혼식에 참가한 후에 기분 전환할 겸 함께 여행 가자고.”장소민은 아들이 2~3년이 지난 후에도 임신하지 못해도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말라는 말뜻을 알아차렸다.‘이 녀석, 속셈은 많아서.’그들은 시부모로서 아이에 대해 재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 부부는 아직 결혼식도 치르지 않았기에 아이를 급하게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됐어. 너희 부부의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엄마가 약속할게, 10년 동안 재촉하지 않겠다고. 아이를 낳든 말든 너희 마음대로 해.”얼굴이 한껏 밝아진 전태윤은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엄마, 고마워요.”“고맙긴, 빨리 돌아가서 예정이에게 사과해. 앞으로 그렇게 성질부리고 그냥 가버리면 안 돼. 예정이가 너한테 이러면 넌 미쳐버릴걸? 하도 예정이의 성격이 좋아서 너를 양보하는 거야.”장소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럼 이만
심씨네도 방금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하예정은 마음이 복잡해 저녁 식사 후 심효진을 끌고 근처를 걸었다.“너 전에 시댁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너 스스로 자신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는 거 아니야?”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다. 심효진은 또한 하예정과 전태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녀는 하예정으로부터 전씨 집안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재촉은 하지 않았어. 그냥 이렇게 오랫동안 임신 못 한 게 내 몸에 문제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닌지 걱정돼서 말이야.”하예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도 난 너무 신경 쓰여. 시댁이 재벌이 아니라 보통 가정이라도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어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걱정하기 마련이야. 피임하지도 않았는데...”심효진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보니 대부분은 결혼 후 바로 임신 소문이 돌았고 더욱이는 임신하고서야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한 지 반년이 넘어서도 임신하지 않은 데다 피임 조치도 하지 않은 걸 알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그녀는 친구의 스트레스를 이해한다.“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너무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는 건 알아. 너 스트레스가 심하면 임신하기가 더 힘들 거야. 난 네 문제가 아니란 걸 믿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하예정은 또 한숨을 쉬었다.“효진아, 난 지금 임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게 아니야. 아까 태윤 씨랑 싸웠는데 글쎄 날 제쳐놓고 혼자 가버리는 거 있지. 떠나기 전 태윤 씨의 표정과 말투를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심효진은 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위로했다.“태윤 씨의 태도를 보면 네가 화낼 만도 해. 내가 듣기만 해도 너 대신 화가 나. 오늘 밤엔 우리 집에서 자는 거다. 태윤 씨가 데리러 와도 바로 같이 돌아가지 말고. 한번 속 태워봐라 그래. 내가 엄마 아빠한테 집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
따르릉!심효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의 이름을 본 그는 하예정에게 말했다.“정남 씨에게서 전화가 왔어. 내 생각엔 너희 집 태윤 씨가 또 정남 씨에게 도움을 청한 것 같아.”하예정은 담담하게 말했다.“도움을 청해도 상관 안 해. 자기만 성깔이 있는 줄 알아? 나도 성깔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심효진은 당연히 친구의 편이다. 그녀도 친구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고 명랑하기만 했던 친구가 지금 자신이 불임일까 봐 걱정하고 있다. 이건 시집간 상대가 전태윤이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무형 스트레스 때문이다.심효진은 그런 친구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이참에 친구가 남편을 잘 다스리도록 도우려 했다.따르릉!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심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효진 씨, 뭐 해요? 나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이제야 내 전화를 받아요? 난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만약 전화를 계속 안 받으면, 바로 운전해 효진 씨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소정남의 웃음이 섞인 말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고 두 사람은 성격도 잘 맞아 소개팅부터 약혼까지 한 번도 갈등을 겪은 적이 없다.때때로 심효진은 자신의 사랑이 너무 순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친구 부부가 항상 작은 갈등으로 기분 나빠하고 억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또 본인과 남친의 평온한 감정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휴대폰을 곁에 두지 않았어요. 샤워하려고 하던 참에 전화가 와서 바로 욕실에서 뛰쳐나와서 받은 거라 속도가 늦었어요.”그녀는 거짓말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나도 보고 싶어요. 매일 24시간 동안 정남 씨만 생각하는걸요. 잠들어 꿈을 꿔도 정남 씨 꿈을 꿔요.”소정남은 전화 건너편에서 이 말을 듣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하예정은 친구가 소정남과 통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그녀와 남편은 금슬이 좋지만 두 사람 모두 달콤한 말을 잘 못하는 타입이다.“효진 씨, 이젠 와이프라고 불러도 돼
“조사하지 않았어요?”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조사하지 않았어요. 효진 씨가 말했잖아요, 효진 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손에 쥐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따로 조사하지 않아요. 그저 예정 씨가 당신 집에 있을 거로 추측했어요. 예정 씨는 효진 씨와 가장 친한 사이라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효진 씨를 찾아가곤 하잖아요.”“예정이 우리 집에 있는 건 맞아요. 태윤 씨에게 말해줘요, 예정이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있을 거라고.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소정남은 대답했다.“알겠어요. 내가 곧 전할게요. 여보, 나한테 할 말 또 없어요?”“태윤 씨의 일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따라 배우지 말고요.”그는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반면 소재로 삼고 있어요. 태윤이는 예정 씨를 화나게만 하는걸요. 난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해요.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안심이에요. 정남 씨, 사랑해요. 죽을 만큼 사랑해요.”“저도요.”심효진은 말했다.“먼저 태윤 씨에게 전해요. 조급해 안달이 나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예정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항상 작은 일로 다툰다니까요. 나 이만 샤워하러 갈게요.”소정남은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고는 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자 그는 입을 열었다.“네 와이프가 또 내 와이프를 독차지하고 있어.”“당장 우리 예정 씨를 데리러 갈게. 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말이야.”전태윤도 하예정이 심씨 집안에 있을 거로 추측했다.처형에게 먼저 물어봤는데 동생이 집에 없다고 하니 무조건 심효진의 집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성소현 쪽에는 묻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우리 효진 씨가 말하는데 자기 집에서 며칠 묵을 거라고 했어. 일 없으면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 와이프인데 당연히 내 옆에 같이 있어야지. 나 당장 데리러 갈 거야.
하예정은 몸을 돌려 심효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말했다.“이제 진짜 잘 거야. 안 뒤척일게.”심효진은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했다.“너흰 부부잖아. 태윤 씨도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 이 정도의 모순은 곧 풀릴 거야. 마음 편히 자. 잠을 잘 자야 삶의 우여곡절을 마주할 힘이 생기잖아.”“네가 있어 다행이야. 기분이 나쁠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아.”“우리 얼마나 오랜 친구인데. 나도 기분 안 좋으면 너한테 하소연하잖아. 빨리 자, 너무 생각하지 말고.”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친구의 위로에 하예정은 천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전태윤이 심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고요했다. 모두 이미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그는 심씨네 집 앞에 차를 세웠다.차를 세운 후 그는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하예정은 이미 잠든 데다 휴대폰도 무음 모드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누구에게서 온 건지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누구시죠? 무슨 생각이에요 도대체? 한밤중에 웬 전화죠? 당신은 안 자도 난 자야겠어요! 잠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몰라요?”“...효진 씨, 저예요.”“누구라고요? ...태윤 씨?”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저예요.”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하예정을 향해 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금살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정말로 전태윤의 차가 자기 집 앞에 멈추어 있었다.“한밤중에 쉬지 않고 웬 전화에요?”“지금 효진 씨 집 앞이에요.”“아, 그래요?”“효진 씨, 예정이 잠들었어요? 불러줄 수 있어요?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어요.”심효진은 말했다.“지금이 몇 시인데요. 예정인 이미 잠들었어요. 이틀 후에 다시 데리러 와요.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내 약혼식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씨 일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예정은 반드시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갈 테니까.전태윤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문 넘을 준비를 했다.심씨 집안의 개 두 마리가 구석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모른 채.그가 문 위로 올라가 문을 넘어가려고 밑을 바라보자 큰 개 두 마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놀란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질 뻔했다.그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개를 키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차를 몰고 집 문 앞을 지나갈 때 다른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심씨네 집에서도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생각 못 했다.그가 차를 심씨 집안의 문 앞에 세울 때 다른 집 개들은 짖는 것을 멈추었고 심씨네 집에서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그래서 심씨 집의 개가 소리 없이 잠복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개가 사람을 문다고... 그가 밑을 보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면 두 개한테 물렸을지도 모른다!멍멍!녀석들은 전태윤이 뛰어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짖어대기 시작했다.전태윤은 집안의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차 앞으로 돌아와 차에 기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를 찾아 피려다가 담배를 찾지 못했다.그는 하예정이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 담배를 거의 끊은 탓에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누구세요?”심효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와 정원의 불을 모두 켰다. 개들이 문밖을 향해 정신없이 짖어대는 것을 보고 계단을 내려가 살펴보려 했다.전태윤은 그제야 대문 가까이 다가가 나은서에게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저예요, 태윤이에요.”나은서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예정이를 집에 데려가려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그녀는 문으로 다가갔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예정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누웠어요.
전태윤은 나은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심씨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차로 돌아왔다.차에 돌아와서도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있더니, 결국 차를 몰고 떠나갔다.다음 날 아침 일찍 전태윤은 심씨 집으로 달려갔다.심씨 집 마당의 대문은 열려있었고 개 두 마리는 목줄에 묶여있었다.전태윤은 조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늦게 온듯싶다.그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을 청소하던 효진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효진이랑 예정이, 예진이 가게로 갔어요.”“...간 지 얼마나 됐죠?”“20분 정도 될 거예요. 예정이가 일어나자마자 예진이 가게에 가서 우빈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해서 일찍 나갔어요.”전태윤은 나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말했다.“당장 처형의 가게로 가겠어요.”나은서는 가볍게 응했다.전태윤은 곧 심씨네 집을 떠났다.그는 가는 길에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처형,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이죠? 아, 예정이를 찾는 거예요? 예정이랑 효진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요.”하예진은 그들 부부가 또 다퉜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일이 바빠 바로 휴대폰을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태윤이한테서 전화가 왔어.”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준 후 그녀는 또 서둘러 일하러 갔다.하예정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전태윤은 전화 저편에서 급히 말했다.“여보, 전화 끊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어! 당신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나 피하지 말아줘 제발. 우리 이따가 얘기 좀 해. 고향에 내려가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 싶으면 내가 같이 갈게.”하예정은 마침내 담담하게 말했다.“전 도련님께서는 바쁘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전 도련님의 시간을 허비하겠어요? 저와 함께 가줄 필요 없어요.”“여보, 내가 잘못했어.”아내의 비꼬는 말을 들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