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방에 있던 하예정은 조카가 나간 후에야 전태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여보, 우빈이랑 계속 리조트에 머물면서 마음 편히 놀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일 끝내면 바로 데리러 갈게.”하예정은 오히려 남편을 타이르듯 말했다.“당신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여요. 당신이 더 잘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다 맡겨요. 혼자 전부 떠안지 마시고. 너무 힘들잖아요. 젊다고 밤을 새워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나이 들기도 전에 쇠약해져요. 건강에 문제 생기면 갑작스러운 위험도 커지잖아요. 태윤 씨, 잊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아내가 있고 곧 아이도 생길 거예요. 저와 아기는 집에서 태윤 씨를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전태윤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여보, 나도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일을 할 때마다 신중히 생각하고 자기 관리도 잘해. 이제는 반드시 당신과 아기를 생각하면서 행동할 거야. 마음 편히 있어. 내가 며칠 있다가 당신이랑 우빈이를 데리러 갈게. 우리도 오손도손 설을 쇠야지.”하예정은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신도 일찍 쉬어요. 앞으로는 밤 10시 반 넘어서면 저한테 전화하지 마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태윤 씨가 쉴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래요. 원래도 힘든데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잖아요. 당신은 요즘 예전처럼 패기 넘치는 모습이 안 보여요. 가끔 면도도 안 하고 다니세요. 늙어 보일라.”만인의 이상형 전태윤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턱을 만져보았다.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최근에 면도를 못 했군.’그리고 다시 얼굴을 만지며 영상통화 중인 아내에게 물었다.“여보, 내 정말 늙어 보여? 서른 살 금방 넘었는데... 나 관리 잘해. 피부관리 제품도 꾸준히 써왔단 말이야. 나 흰 머리도 생겼어? 진짜로 일찍 늙은 건 아니겠지? 돌아오면 꼭 보양식 챙겨줘.”하예정이 웃으며 말을 이
“엄마는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시고 늦은 밤에야 쉴 수 있으니까 우리 오늘 엄마를 편히 쉬게 해주자.”우빈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저는 자러 갈게요. 내일 아침에 엄마랑 영상통화 할 거예요. 이모, 내일 일찍 깨워주세요.”“그래, 7시 30분에 깨워줄게. 엄마는 보통 7시 반쯤 아침을 드시잖아.”우빈은 그제야 아쉬운 듯 전태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이모부, 잘 주무세요.”그리고 하예정이 머무는 방에서 나와 용정과 함께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다.용정은 약초 책을 베껴 쓰고 있었다.약재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여러 약재의 효능과 금기 사항도 함께 적어야 했다.우빈이가 돌아오자 용정은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우빈아, 엄마는 만났어?”우빈은 다가가 용정이가 쓴 약재 이름을 살펴보았지만 아는 글자가 거의 없었다.“엄마는 아직 바빠서 통화할 시간이 없대. 이모가 자라고 해서 왔어. 내일 아침 엄마가 아침 먹을 때 영상통화 하기로 했어. 너 이 글자 다 알아?”“아니. 하지만 베껴 쓰는 데는 문제 없어. 사공님께서 내가 낮에 너무 놀기만 해서 매일 두 페이지씩 베끼라고 하셨거든. 손이 너무 아파. 한 페이지도 많은데 두 페이지라니. 사공님이 내가 친구 생긴 거 질투하는 것 같아”용정은 투덜거렸다.아무리 영리하고 어른스러워도 결국 3, 4살 어린아이라 책을 베끼고 숙제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사공님 말씀대로 안 하면 붓으로 쓰라고 하실 텐데 그러면 더 느리고 힘들 뿐이었다.그는 막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한 참이었다.용정은 붓글씨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공님 전부 붓글씨를 쓰시는 것을 선호하셨다.이 꼬마는 컴퓨터를 배우고 싶었다. 정겨울처럼 모든 걸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이 여러 세외고수들의 붓글씨보다 몇 배는 빠르고 또 정돈되어 보였다.그러나 사공님들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불구불했다.정겨울은 세외고수들의 글씨를 ‘용이 춤추고 봉황이 날개를 펴는
우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좋아요! 저는 노 아저씨가 엄청 좋아요. 아빠가 한 명 더 생기면 얼마나 좋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가 하나뿐인데 저는 아빠가 둘이잖아요.”처음에 노동명이 우빈에게 새 아빠가 생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꼬마는 자기도 아빠가 있기에 욕심부리지 않고 아빠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이제 조금 더 커서 노동명과도 부자간의 정을 쌓아 올리게 되자 아빠가 한 명 더 생기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게다가 지금의 우빈에게는 새 아빠가 될 노동명에게 더 많은 정이 들었고 친아버지에게는 별 감정이 없었다.주로 주씨 집안 사람들이 끊임없이 불똥을 튀기는 바람에 우빈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던 작은 정까지 시들어갈 지경이었다.우빈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주씨 가문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우빈을 대하고 우빈을 통해 이득을 보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아직 깊은 정을 쌓을 수는 있었다.하지만 우빈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그땐 정을 쌓기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이미 자기주장이 뚜렷해진 우빈이라면 쉽게 속일 수도 없을 테니.주씨 집안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도 단순했던 것이다. 우빈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속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지금 우빈이 먼 곳에 나가 있어도 주형인에게 전화해달라고 먼저 요구하지는 않는다.주형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운전만 하기 때문에 아들에게 전화할 시간도 많지 않아 부자간의 정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주경진 부부도 우빈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데 주로 우빈이가 그들과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주경진은 그래도 우빈에게 ‘잘 먹고 잘 지내며 엄마 말 잘 들으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김은희는 늘 ‘정한을 도와줘야 한다.', ‘정한이가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니까 네가 선물해 줘.', ‘장난감이 그렇게 많은데 아무거나 몇 개만 정한에게 줘도 네가 손해 보는 건 아니다.'와 같은 말을 끊임없이 내뱉었다.우빈은 할머니가 한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결론은 알 수 있
우빈은 작은동생들을 좋아했다. 이모할머니 집에 있는 그 작은 동생처럼 사랑스러워서 특히 좋아했다.이모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우빈은 이모에게 동생을 안고 집에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는 동생을 돌볼 자신이 있었고 장난감도 많아서 동생과 함께 놀아줄 수 있다고 여겼다.전태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이모부는 우빈이를 가장 사랑하지. 이모부가 이모 배 속의 동생을 묻는 건 이모를 걱정해서야. 이모가 힘들고 아프지 않을까 해서. 우빈이는 이모 걱정을 안 해?”우빈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걱정해요! 저는 이모를 제일 사랑해요.”“그렇지? 우빈이도 이모를 제일 사랑하니까 이모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지?”“네!”“그러니까 이모부가 이모한테 묻는 건 우빈이처럼 이모를 걱정하는 것뿐이야. 누구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알겠지?”우빈은 눈을 깜빡이며 하예정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전태윤은 우빈을 칭찬했다.“우빈이는 정말 똑똑하네. 이모를 이해하고 아껴줄 줄 아는 아이구나. 이모가 우빈이를 그렇게 사랑해준 보람이 있네!”전태윤의 칭찬에 우빈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하예정은 더 크게 웃었다.우빈이가 겨우 몇 살짜리 아이인데 어떻게 전태윤을 이길 수 있겠는가? 꼬마는 이모부의 몇 마디 칭찬에 휘둘려 하늘에서 날아다닐 지경이다.“우빈아, 재미있게 놀고 있지?”“네! 그런데 가끔 용정이랑 싸워요. 제가 너무 이겨서 용정이는 울어요.”우빈은 목소리를 약간 낮추며 말했다.전태윤은 그가 지는 경우가 더 많을 거로 추측했다.과연 하예정이 그 거짓말을 폭로했다.“너랑 용정이가 싸우면 열 번 중 두세 번만 이기겠지. 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저는 아직 어린데 울면 안 돼요? 커서 남자 대장부가 되면 피는 흘려도 눈물은 안 흘릴 거예요. 남자는 쉽게 눈물을 안 흘린다고요.”우빈은 가슴을 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용정이도 울거든요.”하예정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이제 늦었으니 모두 쉬세요.”이경혜가 모두에게 말했다.사실 모두 밤샘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아직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이경혜가 말하자 고씨 가문의 저택에 머무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고씨 가문에 머물지 않는 사람들은 평소 묵던 호텔로 각자 돌아갔다.전태윤은 하루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호텔 방에 돌아와 소파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는데 아내가 전화한 것으로 추측했다.핸드폰을 꺼내 보니 역시 하예정이 보낸 영상통화 요청이었다.진지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며 영상통화를 수락했다.연결되자마자 우빈의 작은 얼굴이 보였다.“이모부!”우빈은 전태윤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이모, 이모부예요.”하예정은 허리를 굽혀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가 전태윤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했다.“호텔에 도착했어요?”전태윤이 부드럽게 대답했다.“막 회의 끝나고 와서 앉았는데 너에게서 전화가 왔어. 우빈아, 왜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어?”우빈이 대답했다.“내일 유치원 안 가요. 겨울 방학이에요, 방학! 야호!”방학 때는 엄마든 이모든 꼬마에게 좀 더 놀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하예정은 남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있는 것을 보더니 마음이 아픈 표정을 지었다.“매우 바쁘죠?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세요. 우빈이가 마음 아파할 거예요.”우빈이 말을 이었다.“맞아요, 제가 마음 아파할 거예요.”전태윤이 피식 웃었다.“우빈도 이모부가 좋나 봐? 여보, 당신은 마음이 안 아파?”“돌아오면 맛있는 거 해줄게요.”하예정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대답 속에 답이 들어있었다.그녀는 남편을 가장 아꼈다.물론 전태윤도 그녀를 많이 아끼고 있다.부부의 감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 그때 맛있는 거 해줘. 우리 아기는 말을 잘 듣지?”부부가 헤어진 지 사실 오래되지 않았지만 전태윤에게는 몇 년이 지난 듯한 느낌이었다.하루 안 보면 삼 년을 못 본 것만 같았다.이미 오래
“그때 가서 제가 스승님과 함께 다시 한번 이씨 가문의 저택을 샅샅이 뒤져볼게요. 이 가주님이 총을 배 속에 삼키지 않는 한 우리 두 사람이 못 찾을 총이 없을 거예요.”그들은 이은화의 행동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밤 10시가 넘어서야 고씨 가문의 저택의 초인종이 울렸다. 이씨 가문의 집사가 이경혜 일행에게 초대장을 전달하러 왔다.이경혜와 한성근의 환영 연회를 명목으로 이씨 가문은 다음 날 저녁 저택에서 저녁을 함께 하자며 초대장을 보냈다. 신분과 지위가 있는 이씨 가문의 인물들은 모두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전했다.그리고 이것이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라고 하며 고씨 가문 사람들은 초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은화는 고씨 가문과 적대하려 하지도 않았고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이경혜가 이씨 가문의 집사에게 말했다.“내일 저녁 우리가 제때 도착할 거라고 전해주세요. 가주님께서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두셔야겠네요. 저와 아저씨를 위한 환영 연회인 만큼 모두 잘 먹고 잘 마시도록 해야죠.”집사는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사모님 말씀대로 가주님께 전달하겠습니다.”이경혜가 진지하게 말을 내뱉었다.“강성에 있을 때는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더 좋겠어요.”집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가주님께서 저에게 전하라고 하신 초대장은 이미 이경혜 아가씨께 전해드렸습니다.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이경혜가 고개를 끄덕였다.고씨 가문의 집사가 이씨 가문의 집사를 바래다주었다.이씨 가문의 집사가 떠나자 이경혜는 그 많은 초대장을 훑어보았다.그리고 모두에게 말했다.“내일 저녁에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우리 모두 배불리 먹고 가요. 그리고 연회에 참석한 뒤로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마세요. 저의 그 친절한 이모님이 음식과 술에 독을 탈까 봐 걱정이네요.”정겨울은 하품을 했다. 이 시간이면 그녀는 이미 쉬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지난 시간 동안 매일 다수의 수술을 소화해야 할 정도로 바빴으며 휴식조차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