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이혁 씨,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그가 막 대답하려던 순간 도아영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발신자는 엄마였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세요?”평소 그녀는 근무 시간에 사적인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다.가족에게서 오는 전화라면 반드시 급한 일이 있을 때였다.급하지 않다면 그녀의 부모님은 언제나 그녀가 바쁠 것을 알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이번 주말에 시간 있지?”“왜요?”“일단 시간 있는지부터 말해봐. 엄마가 네가 직접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꼭 제가 해야 해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시면 안 돼요? 저 주말에 고객 미팅이 있어요.”“주말에도 고객을 만나야 해? 우리 도씨 그룹이 그렇게 장사가 안돼서 주말에도 일해야 해?”어머니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딸이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너무 길었다.같은 집에서 살아도 며칠이고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다.아침에 눈을 뜨면 딸은 이미 회사로 나가 있고 밤에는 자신이 잠든 뒤에야 돌아왔다.“엄마, 어떤 일인지 먼저 말씀해 보세요. 제가 시간을 좀 내볼게요.”도아영은 조금 미안해졌다. 평소에 부모님과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하는 딸이었으니까.그녀의 어머니는 좀처럼 딸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어렵게 입을 열어 부탁했건만 그녀는 또 부탁을 외면하려 했다.“오전만 시간 좀 내줘. 엄마의 아들 같은 애가 이번 주말에 해외에서 들어오거든. 네가 좀 나가서 공항에서 데려와. 너도 잘 아는 애잖아.”황서진에게는 자식처럼 아끼는 ‘아들’이 하나 있고 ‘딸’도 하나 있었다.그 둘은 각각 황서진의 두 절친의 자녀였다.또한 도아영 역시 그녀의 친구들이 딸로 삼으면서 서로의 아이를 함께 가족처럼 여겼다.“엄마, 혹시 태경 오빠 말씀하시는 거예요?”태경이란 이름이 나오자 전이혁의 귀가 순식간에 쫑긋 섰다.“그래, 너한테 오빠는 그 애 하나잖니. 태경 말고 또 누가 있겠어?”“그럼...
그 사랑에서 상처 입은 건 도아영이었다. 손해 본 것도 결국 그녀였다.사랑의 세계에서 먼저 마음을 준 사람이 지는 법.그녀는 한 번 졌기에 다시는 지고 싶지 않았다.비록 전이혁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도아영은 더 이상 수동적인 위치에 있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이혁을 흔들어놓을 차례였다.“도아영 씨, 오늘은 사과드리러 왔습니다.”“사과요? 무슨 일로요?”전이혁이 준비해 온 주얼리 세트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몇 달 전, 제가 먼저 도아영 씨에게 다가갔죠. 그런데 도아영 씨가 마음을 열었을 때 오히려 제가 물러섰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제 잘못이었어요. 이 꽃다발과 주얼리 세트는 그 일에 대한 사과입니다.”도아영은 꽃을 내려놓고 그 케이스를 들어 열었다.그 안에는 루비 세트가 곱게 빛나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값비싼 진품이었다.“이렇게 귀한 건 받을 수 없어요.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 저는 다 잊었어요. 당신도 그때 사과했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다시 이런 걸로 마음 쓸 필요 없어요.”도아영은 이 주얼리 세트가 전이혁이 전씨 할머니나 그의 어머니에게 얻어온 것이라 짐작했다.이런 주얼리는 전씨 가문의 여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 그것도 여러 세트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도아영 씨께서 안 받으면 저를 아직 용서하지 않은 걸로 알 겁니다. 그럼 저는 매일 찾아와 사과드릴 거예요. 그게 더 귀찮으실걸요.”전이혁은 아직도 얼굴이 붉어졌다.사실 그녀가 ‘여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을 그는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그저 매일 보고 싶다는 핑계로 이런 어설픈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이 루비 세트, 전씨 할머니께서 주신 건가요?”“아니요, 저의 어머니가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이런 세트를 여러 개 가지고 계시는데 그중 하나를 제가 부탁드렸어요. 도아영 씨 피부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과의 의미로 받아주세요.”지금은 받지 않아도 언젠가는 받게 할 생각이었다.그 주얼리들은 명해
해성에는 설 연휴를 맞아 또 눈이 내렸다. 전이혁이 도착했을 때는 도시 전체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그는 먼저 호텔에 묵으며 하루 동안 푹 쉬었다.여행길의 피로를 완전히 풀고 나서야 박씨 아저씨가 챙겨준 새해 선물 꾸러미를 차에 실었다.이번에는 렌터카 업체에서 고급 차를 빌렸다. 그는 트렁크 가득 선물을 싣고 곧장 도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하지만 도아영은 없었다.그녀는 그녀의 큰언니와 몇몇 사촌 여동생들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결국 전이혁은 대문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정성껏 준비해 온 선물 또한 도성준에게 거절당했다.도성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이혁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우’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도성준은 전이혁이 곧 다시 찾아올 것을 예감했다. 딸을 얻으려 다시 집으로 찾아와 애정 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말이다.그래서 전이혁이 헛걸음치게 하려는 속셈으로 딸을 설득해 여행을 떠나게 했다.도아영 역시 오랜만에 공은호와 사형제들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공은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사제지간끼리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도아영의 머릿속에서는 전이혁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졌다.전이혁이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건 정월 초열흘, 즉 도씨 그룹이 설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첫날이었다.부대표인 도아영은 새해 시무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전이혁은 마침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비서로부터 전이혁이 면담을 요청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도아영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말했다.“들여보내요.”잠시 후, 문밖에는 큼직한 꽃다발과 붉은 케이스가 담긴 선물 백을 든 전이혁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사과하려는 선물이었다.‘여우’와 도아영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상처를 준 그날 이후 그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또한 도아영이 자신을 속였다는 일쯤은 전이혁은 넓은 마음으로 덮어주기로 했다.
“형!”“너희 넷째 작은아버지 입 좀 잠가놔야겠다. 우리 부자끼리 편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고 있잖아.”전태윤이 태연하게 내뱉자 하예정이 그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웃었다.“여보, 그만 놀리세요. 도련님 얼굴에 초조함이 다 쓰여 있잖아요. 이틀 동안 붙들고 물어봤는데도 결국 할머니께서는 한마디도 안 하셨다잖아요.”전이혁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맞아. 형수님 말이 딱 맞아. 형, 이제 제발 진지하게 좀 들어줘. 이번 일은 정말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니까.”“그래서 할머니는 뭐라고 하셨는데?”전태윤이 물었다.“도아영 씨한테 다시 다가가라고 하셔.”“그럼 됐네. 할머니 말씀대로 해. 우리 할머니가 널 해칠 분이냐? 평소야 장난으로 손주들 골려 먹는 걸 즐기셔도 결혼 문제만큼은 누구보다 신중하시지. 그분은 그런 일로 농담하실 분이 아니야.”그제야 전이혁의 얼굴에 미묘한 안도감이 번졌다.전태윤은 도아영이 바로 ‘여우’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의 말을 믿으라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여우’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도아영을 다시 쫓으라고 한 건 곧 그녀들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알았어. 형 말대로, 할머니 말씀대로 할게. 근데 형, 그걸 왜 진작 안 알려줬어?”전태윤은 느릿하게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나도, 할머니께서도 여러 번 말했잖아. 후회하지 말라고. 그땐 네가 뭐라 그랬더라? 네 사전에는 후회란 없다고 큰소리쳤지? 지금은 그 사전 바꿀 생각은 안 드냐?”“그게 그 말이었어?”전이혁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후회하지 말라는 말이 ‘여우’가 도아영 씨라는 뜻이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 완전히 딴 얘기잖아.”“그건 네가 눈치가 없는 거지. 우리 할머니가 어떤 분인데. 겉으론 순하게 웃으시면서도 속으로는 손자들 골탕 먹이는 데는 최고 시잖아.”전씨 할머니는 멀리서 재채기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누가 내 욕을 하나?’도아영을 직접 거절했던 일을
“할미가 이미 도와줬잖아. 집사한테 새해 인사 선물 몇 세트 준비하라고 말해 둘 테니까 그거 들고 도씨 가문으로 가서 새해 인사드려. 새해에 웃으면서 찾아가면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을 거야.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알았어요. 할머니 말씀대로 할게요.”전이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그리고 곧장 휴대폰을 꺼내 정월 초나흗날의 비행기 표를 끊었다.“왜 내일 표는 안 끊어?”전씨 할머니가 물었다.“하루만 더 할머니랑 있고 싶어서요.”할머니는 웃었다.“할미는 괜찮아. 네놈들이 다 짝을 찾아서 더는 혼자만 남지 않으면 그게 제일 큰 효도지.”전이혁이 정월 초나흗날에 해성으로 가기로 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하나는 가족들과 하루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일 밤 형들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형들에게 도움을 청해 도아영이 ‘여우’인지 아닌지를 함께 분석해 보려 했다.그는 형들, 특히 큰형 전태윤이 이 일의 진실을 알고 있을 거로 짐작했다.하지만 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다들 그저 그가 우왕좌왕하는 꼴을 재미있게 지켜보는 듯했다.도대체 자신이 언제 그렇게 집안 전체의 놀림감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비록 전씨 할머니에게서 확실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말과 태도 속에서 전이혁은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다.그는 마음을 내려놓고 남은 연휴 이틀을 편안하게 보냈다.정월 초사흘 저녁, 전태윤은 아내 하예정과 함께 리조트로 돌아왔다.그날 하루 종일 리조트에 머물던 전이혁은 문 앞에서 집사가 전태윤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그는 전태윤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고 불룩한 배를 감싸 쥔 하예정에게 다정하게 말했다.“형수님, 조심하세요. 미끄러워요.”그 모습에 전태윤은 잠시 동생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전이혁은 전태윤 부부 주위를 맴돌며
“이혁아, 할미 머리의 흰머리에도 네 몫이 있단다.”전이혁은 웃으며 전씨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안았다.“네네... 저희가 잘못했어요. 할머니 마음고생만 시켰네요. 할머니, 앞으로는 더 효도할게요.”전씨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이제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 그러냐. 하루하루 덤으로 사는 거지. 앞으로 어쩌겠다는 그런 약속은 하지 마라. 못 지키면 괜히 체면만 구겨져. 정말 효도하고 싶으면 가서 도아영 씨나 다시 잡아 와. 나는 그 아이가 참 마음에 들더라. 그 아이가 내 손주며느리가 됐으면 좋겠어.”“할머니, 말씀만 해주세요. 도아영 씨가 ‘여우’ 맞죠? 맞다면 바로 돌아가서 집부터 사고 새로 사업도 시작하면서 아영 씨를 다시 쫓을게요. 매일같이 아무 일도 안 하고 남의 뒤만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요.”전씨 가문의 형제들은 사랑을 쟁취하려 할도 전념해서 그 일만 한 사람은 없었다.모두 자기 일과 사업을 병행하면서 사랑도 함께 키워갔다.전씨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내가 도아영 씨가 바로 그 ‘여우’라고 하면 그게 곧 진짜가 돼? 도아영 시가 아니라고 부정하면 너도 어쩔 수 없잖아. 만약 둘이 다른 사람이라면?”전이혁은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끈질기게, 간절하게도 물었건만 전씨 할머니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그러나 그 말투와 눈빛 속에는 확신에 가까운 여운이 있었다.전씨 할머니의 속뜻을 읽자면 도아영과 ‘여우’가 한 사람일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할머니, 제가 도아영 씨에게 다시 다가가도 괜찮을까요?”“도아영 씨는 내가 직접 네 손에 쥐여 준 인연이야. 쫓아간다고 틀릴 리가 있겠어?”“할머니...”전씨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또 한 번 콕 찔렀다.“다가가고 싶으면 얼른 다가가. 설도 지났고 도아영 씨도 아직 휴가 중일 테니 지금이 약속 잡기 제일 좋을 때다. 가서 데이트나 해... 안 가고 뭐 해?”전이혁은 대답 대신 조용히 할머니를 바라봤다.확답을 듣지 못하니 불안했다.구애하다 보니 도아영이 ‘여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