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과 하지명의 통화 내용을 전부 다 들은 성소현이 분노를 터뜨렸다.“아직도 언니한테 돈을 요구해요?”“나한테 돈 빌려달래. 요즘 사업이 잘 안 돼서 엄청 밑졌다면서 2억 빌려달래.”“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관성에 나보다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뻔뻔하게 전 대표님을 쫓아다닌다는지, 파렴치하다는지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 친척들에 비하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하예진이 되레 성소현을 달랬다.“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소현아. 나랑 예정이 평생 그 사람들이랑 화해 안 해. 죽든 말든 알 게 뭐야.”그 집 식구들이 지금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건 다 인과응보이다.“가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셔요. 소현 씨네 집 파티셰가 만든 디저트가 너무 맛있어요. 나 오늘 밤 배터지게 먹을 거예요.”심효진이 화제를 돌리자 성소현이 웃으며 말했다.“단 거 많이 먹으면 살쪄요... 아, 예진 언니 말하는 건 아니었어요.”하예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단 거 먹으면 살이 많이 찌긴 해. 그래서 나 단 거 끊었어.”“난 매일 뛰며 운동해서 많이 먹어도 살이 잘 안 쪄요.”심효진은 성소현의 팔짱을 끼며 하예진네 모자에게도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하예진은 이번에 큰 결심을 한 듯싶다. 파티의 맛있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꾹 참았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야만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다.소정남이 도착했을 때 심효진은 이미 배부르게 먹었고 취기도 올라왔다.누나의 귀가를 책임지려고 따라온 심서준이 만취한 누나를 부축하여 나가던 그때 마침 소정남과 딱 마주쳤다. 많은 이들이 소정남을 둘러싸고 한껏 아부하고 있었다.소정남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했는데 심효진이 먼저 가려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인제야 도착했는데...“소정남 씨.”심서준이 소정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효진 씨 왜 이래요?”“우리 누나 취했어요.”소정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예진이 이경혜에게 말했다.“이모, 저랑 예진이 아직 젊고 사지도 멀쩡해서 이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돼요. 저희 노력으로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모한테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저랑 예정이가 이모 외조카라는 사실을 너무 많은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랑 예정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나쁜 사람도 수도 없이 만났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여 이모랑 성씨 그룹을 해치려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이경혜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예진아, 이런 생각까지 해줘서 이모는 너무 기뻐. 너희 둘은 이모처럼 참 씩씩한 아이야. 이모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으니 이제부턴 이모도 더는 나서지 않을게.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이모한테 얘기해야 해, 알았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는 얘기해야 해. 계속 너희들한테 돈을 달라고 귀찮게 굴게 할 수는 없어.”성씨 그룹의 명성이 그래도 꽤 쓸모는 있을 것이다.“내 뒤에 소현이가 있는 건 진작 알고 있어요.”성소현과 하씨 집안 사람들이 가게에서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다.“일부러 얘기하진 않을 거예요. 구정 후에 부모님 집을 되찾는 소송을 할 때나 이모의 명성을 빌려서 압력을 가할 거예요.”“소송은 언제 하려고? 소송할 때 이모한테 얘기해. 이모가 가장 잘하는 변호사를 구해줄게. 상속법대로 하면 너희들은 무조건 승소해.”하예진도 소송을 하면 두 자매가 부동산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씨 집안 사람들이 하도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들이라 소송을 하더라도 끝까지 버틸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이모의 신분을 빌려야 할지도 모른다.이경혜와 긴 시간 얘기를 나눈 후 이경혜는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두 조카를 묵묵히 지켜보겠다고 했다.기나긴 인생길은 그래도 스스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야 한다.일주일 후, 전태윤의 독감이 드디어 말끔히 나았다.그가 입원하
사랑하는 여자가, 그것도 합법적인 아내가 맨날 눈앞에서 다니는데도 키스도 하지 못하는 마음을 누가 알까?전태윤도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이젠 독감도 다 나았으니 하예정을 꽉 끌어안고 억눌렀던 욕구를 마음껏 표현했다.잠시 후, 하예정은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예정아.”하예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마주한 순간 두 눈을 깜빡였다.‘낯빛이 한순간에 바뀌네?’그녀가 물었다.“왜 그래요? 표정이 왜 또 교감 선생님처럼 엄숙한데요? 날 도와주러 처음 우리 가게에 왔을 때 학생들이 무서워서 가게도 들어오지 못했던 게 기억나네요.”전태윤이 그녀의 볼을 살살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그땐 자꾸 날 회사로 돌아가라고 해서 화나서 그랬어. 도와주겠다는 내 마음은 받아주지 않고 그냥 쫓아내기만 했잖아.”예전의 그는 그녀 앞에서 참으로 교만을 떨었다. 게다가 성격도 더러웠고 표정도 어찌나 얼음장같이 차가운지 모든 사람이 그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싸늘했다.“태윤 씨, 나한테 할 얘기 있어요?”하예정은 그가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마음껏 느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귀한 보물과도 같았다.“지금까지 너한테 하지 못한 얘기가 있어.”“그게 뭔데요?”전태윤이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내가 얘기하면 절대 화내면 안 되고 후회해서도 안 돼.”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예정은 그를 밀어내며 멀리했다.“태윤 씨, 또 무슨 속셈이에요? 대체 무슨 얘기길래 말하기 전부터 화내선 안 되고 후회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 내가 엄청 화낼만한 일이라면 그래도 참으면서 억지로 웃어야 해요? 난 절대 참지 않을 거예요. 화나면 태윤 씨를 꼬집고 깨물 거예요!”전태윤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으려 하자 하예정이 다시 밀쳐냈다.“터치하지 말아요.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에 때릴지 말지 결정할게요.”전태윤이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음... 내 명의로 된 집이 발렌시아
전태윤이 그런 곳에 별장 한 채를 갖고 있다니, 그것도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이라고 한다. 뷰가 아주 기가 막힐 듯싶다.하예정은 휴대 전화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소파에 앉더니 전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태윤의 시선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녀가 지금 화난 건지, 놀라면서도 기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건 아닌 것 같다.“예정아, 우... 우리가 초고속 결혼을 해서...”전태윤이 그녀 옆에 다가가 앉았다. 하지만 그가 앉자마자 하예정이 옆으로 움직이며 그와 멀리했다.“그냥 거기 앉아있어요. 가까이 오지 말고요.”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그동안 나한테 왜 숨겼는지는 나도 알아요. 태윤 씨한테 별장이 있는 걸 알고 태윤 씨 돈을 탐낼까 봐 그런 거겠죠. 전씨 그룹에서 임원으로 일하면 연봉이 얼마나 돼요? 적어도 몇십억은 되겠죠? 평소 일이 바빠서 계속 야근 아니면 술자리 나가던데 그 비용도 회사에서 내주죠? 여자친구도 없고 미혼인데다가 가정 형편도 나쁘지 않아서 태윤 씨가 집에 용돈을 드릴 필요도 없다고 했어요.”“그럼 지금까지 엄청 많은 돈을 모았겠네요? 그러면 수백억짜리 별장 하나쯤 사는 것도 이상할 건 없죠. 우리가 혼인신고 한 날부터 태윤 씨가 날 경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날 태윤 씨 돈이나 욕심내는 그런 나쁜 여자로 의심했었죠.”얘기하던 하예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파 위의 쿠션으로 전태윤을 냅다 때렸다.“별장이 있다는 사실을 나한테 숨겨요? 자기도 완전히 솔직하지 못하면서 그날 밤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뭐랬더라? 태윤 씨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더라?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에요?”전태윤은 그녀가 쿠션으로 마구 때려도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으니까.그는 하예정에게 자신의 명의로 된 별장이 한 채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한 채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일단은 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하예정이 알면 어떤 반응
전태윤이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대답했다.“별장이랑 발렌시아 아파트를 사니까 적금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 차는 어차피 그저 교통수단이니까 잘 굴러가기만 하면 돼. 비싼 자동차 같은 건 필요 없어.”전태윤은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아직도 수많은 거짓말로 예전의 거짓말을 수습하고 있었다.하예정이 다시 한번 그를 밀어냈다.“일단 이 손 놔요.”“도망가는 건 아니지?”“내가 어딜 도망가겠어요? 도망갈 생각이었더라면 말도 없이 짐 챙겨서 나갔죠. 큰소리를 내면서 떠나는 건 그건 태윤 씨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진짜로 떠나는 건 소리 없이, 망설임 없이 떠나는 거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그녀의 말에 전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아, 넌 어떤 상황에서 날 떠날 거야?”“나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제 발 저려서 이렇게 묻는 거죠?”전태윤이 부정했다.“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물어서 앞으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거야.”담담한 표정의 그를 보며 하예정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그가 지금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떠보는 건지 도통 가늠이 가질 않았다.“내가 가장 못 참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가정 폭력, 그리고 끝없는 거짓말이에요.”“난 바람피울 리도 없고 가정 폭력은 더더욱 없어.”전태윤이 바로 약속하자 하예정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요.”“시간으로 증명할게.”전태윤은 제 발 저린 듯 끝없는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그녀를 속인 일은 하나였지만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모른다. 결국에는 무수한 거짓말이 돼버렸다.그는 원래는 그저 하예정의 반응만 살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잠깐 화를 내다가 다시 풀리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마지노선을 알게 된 지금 전태윤
“마음에도 없는 소리.”전태윤은 짐을 싸러 갔고 하예정은 자리에 앉아 계속 돈을 셌다.관성의 최고 대그룹인 전씨 그룹은 역시 달랐다. 자금이 어찌나 탄탄했으면 지사에도 통쾌하게 돈을 썼다. 그녀가 전태윤을 고작 며칠 동안 보살폈을 뿐인데 백만 원 넘게 받았다.사실 동권배는 더 많이 주고 싶었지만 하예정이 의심할까 봐 너무 많이 주진 않았다.돈을 다 센 하예정은 평소 외출할 때 자주 갖고 다니는 돈지갑을 가지러 갔다. 천으로 된 돈지갑이라 가격도 엄청 쌌다. 인터넷에서 몇천 원에 산 거지만 아주 실용적이고 한꺼번에 꽤 많은 돈을 넣을 수 있었다.그녀는 돈을 지갑 안에 넣은 후 짐을 싸고 있는 전태윤을 쳐다보았다. 짐은 전부 그가 출장 가기 전에 하예정이 챙겨준 것이라 그리 많진 않았다.하예정은 이곳에 올 때 급히 오는 바람에 갈아입을 옷을 두 벌밖에 챙기지 못했고 생활용품도 여기에 와서 전부 새로 샀다.잠시 후, 짐을 다 싼 전태윤은 캐리어를 끌고 하예정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소정남 씨가 전용기 보내줬어. 이미 비행 팀원한테 연락했으니까 이만 가자.”전태윤은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에는 하예정의 손을 잡았다.“태윤 씨, 정남 씨는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정남 씨랑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효진이랑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훌륭한 남자는 계속 솔로로 지내긴 아까워요.”하예정은 심효진과 소정남이 잘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전태윤이 웃으며 말했다.“나랑 정남 씨는 오랜 시간 같이 일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어. 일부러 친해지려고 한 게 아니라. 그리고 두 사람 사귀진 않더라도 친구는 될 수 있을 거야.”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절친의 연애 문제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사람마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다.그녀와 전태윤은 서로 소개해주는 것만 해주면 된다. 될지 안 될지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몇 시간 후, 관성으로 돌아온 부부는 먼저 전씨 그룹으로 향했다. 전태윤은 올라가 상사에게 일을 보고해야 한다면서
심효진은 학교에서 방학한 뒤로 종일 집에서 먹고 자고 휴대폰으로 웹 소설을 본다.가끔 소정남이 심서준에게 전화 걸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면 그녀는 혹여나 동생이 자기를 배신할까 봐 뻔뻔함도 무릅쓰고 밥 먹으러 같이 나간다. 그 외엔 거의 집밖에 나서지 않는다.그러던 중 절친 하예정이 돌아왔다는 문자를 받게 되니 그녀는 곧바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그럼 저녁에 함께 훠궈 먹을래? 저번에 정남 씨가 서준이를 사줬던 훠궈 꽤 맛있던데. 네가 오면 꼭 함께 가서 먹고 싶었어. 넌 모를 거야. 나 서준이 따라 밥 먹으러 나가면 잘 먹지도 못해. 내가 작정하고 먹으면 웬만한 남자들보다 많이 먹잖니.”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오늘 밤은 안 돼. 나랑 태윤 씨 방금 돌아와서 일단 푹 쉬려고. 내일 저녁에 봐. 예진 언니랑 소현 언니도 불러서 다 함께 만나.”“소현 씨는 음식을 너무 점잖게 먹어서 그냥 부르지 말자. 식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같이 먹으면 공통점도 못 찾겠어. 예진 언니는 지금 열심히 다이어트 중이라 하루에 달리기를 3번 하면서 식단조절까지 병행해. 함께 밥 먹으면 우리가 먹는 모습만 멀뚱멀뚱 지켜볼 텐데 밥이 넘어가겠니? 예진 언니 곧 다이어트 성공할 것 같아. 너 아직 돌아와서 언니 못 만났지? 일주일에 5킬로나 빠졌다니까. 진짜 엄청 노력하고 끝까지 버텨. 나라면 진작 포기하고 폭식했을걸.”식탐이 많은 사람은 입단속 하기가 가장 힘들다.“예진 언니는 이혼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무려 10킬로를 뺐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곧 다이어트 성공할 거야.”언니가 일주일에 5킬로를 뺐다는 말에 하예정이 걱정스레 물었다.“우리 언니 단식하는 거 아니지?”관성에 없는 동안 언니의 일상생활도 지켜보지 못했다.매번 전화할 때마다 자기는 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전태윤만 잘 보살피라고 했었다.심효진이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런 건 아니고 언니가 운동량이 엄청 커. 하루에 달리기 3번 하고 육류랑 디저트를 안 먹어. 게다가 가게 인테리어까지
평소 타던 롤스로이스는 출장 기간에 기사더러 본가로 몰고 가서 그의 통지를 기다리라고 했다.“태윤 씨 회사 주차장은 자동차 전시회장 같네요. 웬만한 차종은 다 있잖아요.”하예정이 차 쪽으로 걸어가며 온갖 고급 차를 구경하며 말했다.“회사에 임원 층이 많고 연봉이 높다 보니 다들 좋은 차로 바꾸더라고. 알잖아, 남자들 차에 관심 많은 거. 난 집이 더 좋아. 집 사는 게 차 사는 것보다 훨씬 값지지.”그의 집 차고에도 전시회장처럼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하예정이 알았더라면 지금 그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텐데.“남자는 차를 좋아하고 여자는 집을 좋아하죠. 집이 있어야 안정감이 있거든요.”하예정이 전에 열심히 돈을 모았던 것도 우선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녀가 타고 다니는 차는 전태윤이 선물해준 것이다.평소에 그녀는 거의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처형한테는 도착했다고 얘기했지?”“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 바쁜가 봐요. 효진이가 말하길 우리 언니가 요즘 엄청 바삐 돌아쳐서 홀쭉해졌대요. 일주일에 5킬로나 빠졌다지 뭐예요.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울 언니.”일주일에 5킬로라니, 실로 대단할 따름이었다.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인간쓰레기 주형인이 땅을 치며 후회할 테니까.“처형은 의지가 대단한 분이야. 다이어트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무조건 성공할 거야.”하예정도 머리를 끄덕였다.로얄 팰리스, 그녀가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 심지어 전에는 부자들 동네라고 단정 지으며 이 별장 구역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예정은 줄곧 머리를 갸웃거리고 차창 밖의 풍경만 바라봤다.전태윤의 별장은 산 정상에 있는데 정상이라기엔 매우 낮은 산이었다.산꼭대기에 별장이 네댓 채 있는데 면적이 매우 크다 보니 이 구역에서 가장 큰 별장에 속한다.“어디가 태윤 씨 별장이에요?”하예정이 옆에 있는 전태윤에게 물었다.“가장 외진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