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대표실로 돌아온 이건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비서를 불렀다.“백림유통 프로젝트 담당자 명단을 다시 가져오세요. 결재 권한과 승인 단계, 업무 전달 경로까지 정리해서요.”“특별한 문제라도 발생했습니까, 대표님?”“확인해야 할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잠시 뒤 비서가 가져온 조직도를 펼친 이건의 손가락이 전략기획팀 부분에서 멈췄다.한지아 과장.그녀의 이름 위로 팀장과 상무, 최종 결재권자인 백현우 대표이사의 이름이 차례로 연결되어 있었다.이건은 그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지아가 아무리 정확한 보고서를 작성해도 현우가 중간에서 내용을 바꾸거나 그녀를 업무에서 배제한다면 도원에 전달되는 자료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충분히 점검할 만한 문제였다.이건은 조직도에서 백현우의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앞으로 한 과장님이 작성하는 투자 관련 보고서는 투자관리팀에 접수되는 대로 원본을 제게도 전달하세요.”“대표님께서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네. 수정 이력도 함께 받겠습니다.”“기존 보고 절차는 그대로 유지할까요?”“그대로 두세요. 다만 최종 보고서와 원본에 차이가 있으면 그 이유까지 확인하겠습니다.”이건은 조직도를 덮었다.“다음 주 백림유통 실무 회의도 제가 참석하겠습니다.”비서가 일정표를 확인했다.“그날 오후에는 해외 파트너사와 협약 관련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조율한 일정인데요.”“시간을 조정하세요.”“상대 측에서도 임원들이 참석하는 자리입니다.”이건은 잠시 비서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시간대를 확인해서 다시 보고하세요.”비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이건은 지아의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이미 여러 차례 검토한 자료였다. 수치도 정확했고, 추가로 확인할 부분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첫 장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뒤에도 그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비서가 문 쪽으로 돌아서자 이건이 다시 불렀다.“잠깐만요. 다음 주 회의가 끝난 뒤 한 시간 정도 비워 두세
“사실 회사에는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한지아 과장은 제 아내입니다.”이건의 손끝에서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멈췄다.백현우는 그 짧은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아내가 워낙 일 욕심이 많아서요. 집에서도 회사 일만 붙잡고 있으니 제가 옆에서 말려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남편 된 입장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있죠.”이건은 서류철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아내.그 단어가 이상할 만큼 귀에 거슬렸다.지아가 결혼한 여자라는 사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의 사생활이 하나 더 밝혀졌을 뿐이었다.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지아를 자신의 보호 아래 놓인 사람처럼 이야기하자, 이건은 선뜻 다음 서류를 넘길 수 없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급히 달려왔던 지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피곤이 내려앉은 얼굴, 서류를 떨어뜨리고도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던 모습.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웃던 얼굴까지.그 여자가 백현우의 아내라고?“진 대표님께서도 우리 한 과장을 높게 평가해 주시니 남편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저한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집에서 제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이건은 고개를 들어 현우와 눈을 마주쳤다.“왜 백 대표님께 말씀드려야 합니까?”현우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멈칫했다.“예?”“한지아 과장은 이번 투자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입니다. 업무상 보완할 부분이 있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하면 됩니다. 굳이 남편을 거쳐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아, 그건 제가 남편으로서 챙기겠다는 의미로…….”“그 말씀은 벌써 세 번째 하셨습니다.”이건은 손목시계를 풀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금속 시계줄이 유리 상판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현우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백 대표님이 한 과장님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적인 관계가 도원과의 투자 계약에서 어떤 의미
지아는 병원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웃음을 지었다.“그런데 대표님,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이건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기억하려고 애쓴 적은 없었다. 어제 그녀가 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어제 들었으니까요.”그가 짧게 답하자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감사합니다.”모니터 너머에서 누군가 지아를 불렀다. 그녀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옆자리 직원에게 파일 위치를 알려 주었다.이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회의를 마쳤다.화면이 꺼진 뒤 그는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다 다음 일정을 열었다.이틀 뒤, 도원 본사에서 정기 보고가 끝났을 때였다.이건은 복도에서 지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다른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돌아서는 길이었다.“한 과장님.”“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 회의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네요.”“자료가 잘 정리돼 있었으니까요.”지아가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사실 오늘은 질문이 좀 많을 줄 알았거든요.”이건은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평소라면 수행비서와 함께 곧바로 대표실로 돌아갔을 시간이었지만, 마침 같은 방향이었다.그는 지아의 가방 옆주머니에 꽂힌 병원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오늘도 병원에 가십니까?”“퇴근하고 잠깐 들르려고요. 아버지가 병원 밥이 싱겁다고 투덜거리셔서 반찬을 좀 가져다드리려고요.”지아가 웃으며 덧붙였다.“어제는 김치가 먹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병원에서는 짠 음식 조심하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자꾸 집에서 먹던 것만 찾으세요.”“많이 좋아지셨나 봅니다.”“네. 투덜거리실 기운이 생기셨으니까요.”이건도 따라 웃었다.지아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업무 중과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이 풍부해졌다.“참,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어요.”지아가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제가 늦었는데도 기다려 주셔서요. 사실 대표님이 그냥 돌아가셨을 줄 알았거든요.”“그럴 이유가 없었습니
평소 회의 중에 짓던 미소와는 조금 달랐다. 눈가가 자연스럽게 접혔고, 입술 끝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이건은 물잔을 들었다가 잠시 내려놓았다.“한 과장님은 식사를 잘 챙겨 드시는 편인가 봅니다.”“잘 챙겨 먹는다기보다는 잘 먹는 편이죠. 시간이 없어서 못 먹는 날이 문제예요.”“그럼 오늘은 한 끼를 만회하신 겁니까?”지아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반밖에 못 먹었으니까 절반만 만회한 셈이네요.”이건도 따라 웃었다.그는 서류를 펼쳐 놓고도 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지아가 남은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물잔을 그녀 쪽으로 조금 밀어 주었다.지아는 무심코 잔을 집어 들었다가 뒤늦게 그가 옮겨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감사합니다.”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료를 살폈다.회의가 끝난 것은 여덟 시가 가까워졌을 때였다.지아는 노트북을 닫고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신 것도 그렇고, 식사까지 챙겨 주셔서요.”이건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오늘은 돌아가서 쉬세요. 수정본은 내일 오후까지 주셔도 됩니다.”“오전에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정리돼 있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한 과장님.”그가 이름을 부르자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내일 오후까지라고 말씀드린 건 그때까지 보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오늘 밤에 마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지아는 잠깐 말문이 막힌 듯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이건은 아마도 내일 오전이면 수정본이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일을 미뤄 두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걸어가는 동안 지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지아는 걸음을 잠깐 늦췄다. 조금 전까지 편하게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고, 휴대전화를 쥔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갔다.“받으셔도 됩니다.”“아닙니다. 급한 전화는 아니에요.”지아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이건은 더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에 일이 생겨서 출발이 늦었습니다. 지금 이동 중인데 도착하려면 삼십 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평소 회의실에서 듣던 목소리와 달리 말끝마다 숨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이건은 열어 두었던 회의 자료를 닫았다.“병원이라면 무슨 일 있습니까?”“아버지 검사 때문에요. 큰일은 아닌데 보호자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미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지아는 곧바로 회의 자료 이야기를 꺼내며, 늦은 만큼 설명은 최대한 짧게 하겠다고 덧붙였다.“한 과장님, 서두르지 말고 오세요. 회의실은 그대로 두겠습니다.”“대표님도 일정이 있으실 텐데, 제가 너무 늦으면 내일 아침으로 변경하셔도 됩니다.”“오늘 확인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동 중에 자료 보지 말고 안전하게 오세요.”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네. 감사합니다, 대표님.”통화가 끊어지자 이건은 비서를 불러 일곱 시에 예정된 외부 미팅을 삼십 분 늦추도록 지시했다.기다리는 동안 처리할 일은 충분했다. 몇 건의 결재를 마쳤고 해외 지사에서 올라온 보고서에도 답장을 보냈다. 다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번씩 고개가 돌아갔다.누군가 회의실 앞을 지나가자 펜을 내려놓았다가, 문이 열리지 않자 다시 서류를 읽었다.여섯 시 사십오 분이 되자 이건은 비서에게 연락했다.“백림 쪽에서 도착하면 바로 안내해 주세요.”지아가 도원인베스트먼트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 사십팔 분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고 가방에서 자료철을 꺼냈다. 병원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안내 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하겠다고 하자 지아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직 기다리고 계신가요?”“네. 안에서 업무 보고 계십니다.”회의실 문이 열리자 창가에서 통화하던 이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수행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백림유통의 수정 자료가 도착했다고 보고했다.도원인베스트먼트와 백림유통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유통망 개선안이었다. 매장별 물류비와 온라인 판촉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거래처의 공급 조건을 다시 확인해야 했고, 이건은 최종 수정안을 직접 검토하기로 한 상태였다.“백림 쪽에서는 누가 옵니까?”“한지아 과장입니다. 여섯 시까지 오기로 했습니다.”서류를 넘기던 이건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회의실 준비해 두세요. 오래 걸릴 내용은 아닙니다.”수정된 공급 조건과 몇 가지 수치만 확인하면 끝날 일이었다. 담당 임원에게 맡겨도 충분했지만, 지난번 회의에서 지아가 직접 설명했던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이건이 확인하는 편이 효율적이기도 했다.그는 보고서 첫 장을 넘기다가 작성자 이름을 확인했다.한지아.최근 백림유통에서 올라오는 자료에는 그녀의 이름이 자주 보였다. 지아가 작성한 보고서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질문이 나올 만한 부분에는 미리 설명이 붙어 있어 검토하기에도 편했다.자료를 읽다 보니 며칠 전 현장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부터 찾더니, 일이 마무리되자 별것 아니라는 듯 웃던 모습이었다.이건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여섯 시까지는 아직 오십 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남은 시간에 처리할 결재 서류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 같은 시각, 한지아는 병원 원무과 창구 앞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과장님, 수정본은 언제쯤 주실 수 있어요? 거래처에서 최종 확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직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아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벽시계를 확인했다.“공급가 조정표는 공용 폴더에 올려뒀어요. 마지막 시트에 거래처별 변경 조건까지 정리해 뒀으니 그것부터 보내세요. 다만 운송비 부담 주체가 확정되지 않은 두 곳은 승인된 것처럼 표시하면 안 됩니다.”통화를 끝내기도 전에 병원 직원이 지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