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회. 지워진 진실-10/18도원 본사로 돌아온 이건은 곧바로 현장 점검에 참석했던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렀다.비서는 물류센터 동선 기록과 촬영 시각을 정리한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대표님, 사진이 촬영된 시각은 오전 열한 시 십팔 분입니다. 당시 지게차가 안전 통로를 지나갔고, 김도윤 차장이 한지아 과장님을 안전선 안쪽으로 이동시킨 상황이었습니다.”이건은 화면을 확인했다.현장 점검 기록과 출입 동선이 일치했다.“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확인됐습니까?”“아직입니다. 백림유통 측에서 내부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게시글을 처음 올린 계정은요?”“익명 게시판이라 외부에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백림유통 측에 원본 게시 기록을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이건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도원에서 확인한 사실관계를 문서로 정리하세요. 추측이나 개인적인 평가는 제외하고, 현장 상황과 안전 조치만 기록하십시오.”“네.”“그리고 이 자료는 백림유통의 공식 요청이 오면 제공하세요. 한 과장님이나 김 차장님에게 불리한 인사 조치가 검토된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추가 자료가 도착했습니다.”이건은 직원이 건넨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자료였다. 처음에는 지아와 도윤이 함께 걸어가는 사진이 올라왔고, 잠시 뒤 안전 통로에서 도윤이 지아의 팔을 잡는 장면이 추가되어 있었다.이건은 사진을 확대했다.촬영 각도가 묘했다.안전 통로의 경고등과 지게차가 지나가는 방향은 화면에서 잘려 있었고, 두 사람의 상반신만 강조되어 있었다.누군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왜곡하려 했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게시글이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린 댓글들이 있었다.'대표님 사모님이라면서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요?''민서라 씨는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한 과장님은 회사에서 연애하
도윤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 옆 카페 방향으로 걸어갔다.이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그때 비서가 차량 문을 열었다.“대표님, 출발하실까요?”“잠시만요.”이건은 휴대전화를 꺼냈다.백림유통 현장 점검 결과를 정리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비서에게 전달했다.“김 차장님과 한 과장님이 작성한 자료는 그대로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리세요. 오늘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도 빠짐없이 반영하고요.”“알겠습니다.”이건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그런데도 카페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차량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비서는 통화를 받더니 표정을 굳혔다.“네. 말씀하십시오.”잠시 상대방의 설명을 듣던 비서가 이건을 돌아보았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무슨 일입니까?”“오늘 현장 점검 중 촬영된 사진이 사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한지아 과장님과 김도윤 차장이 함께 있는 사진인데, 두 분의 관계를 의심하는 내용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이건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관계를 의심한다는 겁니까?”“두 사람이 업무 외적으로도 가깝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이 몇 장 올라왔는데, 일부는 두 분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고…….”비서가 말을 멈췄다.이건은 그를 바라보았다.“계속하세요.”“김 차장이 한 과장님의 팔을 잡아 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물류센터 안전 통로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이건의 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그 장면은 자신도 보았다. 지게차가 지나가는 순간 도윤이 지아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을 뿐이었다.그런데 누군가 그 사진을 이용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게시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백림유통 직원 계정으로만 접근할 수 있어 원문 확인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다만 내부 직원이 캡처한 화면은 전달받았습니다.”비서가 태블릿을 내밀었다.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물류센터 관리자가 일행을 구내식당으로 안내했다.이건은 원래 점심을 거르고 본사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도원 실무진이 현장 담당자들과 추가로 확인할 사항이 있어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식당 안은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로 붐볐다.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가 뒤섞였고, 창가 쪽 긴 테이블에는 백림유통 직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이건이 식판을 들고 들어섰을 때 도윤이 지아를 불렀다.“지아야, 여기 앉아. 아까 네가 찾던 자료 메일로 보내 놨어.”도윤은 옆자리에 놓인 서류를 치웠다.지아가 식판을 들고 다가갔다.“벌써 보내셨어요? 점심 먹고 확인하려고 했는데.”“오후에 또 찾을 것 같아서. 그리고 오늘 끝나면 커피 한잔하자. 지난번에 도와준 것도 아직 못 갚았잖아.”“그건 제가 도와드린 것도 아니에요. 차장님이 더 고생하셨죠.”“그럼 서로 고생했으니까 같이 마시면 되겠네.”도윤이 웃으며 의자를 당겼다.이건은 그 모습을 보았다.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지아를 자신의 옆자리로 부를 수 있었다. 오후 점검 전에 확인할 자료가 있다고 말하면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따라올 것이다.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건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지아는 식판을 내려놓고 도윤의 옆자리에 앉았다.이건은 아무 말 없이 비서와 함께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식사를 시작한 뒤에도 두 사람의 대화가 간간이 들려왔다.도윤은 지아에게 재무팀 자료를 설명했고, 지아는 계약 갱신 일정에 관해 의견을 보탰다. 때로는 업무와 관계없는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이건은 식판에 놓인 음식을 천천히 먹었다.맞은편에 앉은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아닙니다.”“평소보다 식사를 적게 하셔서요.”이건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그때 지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이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도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지아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고 있었다.이건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물잔을 집어 들었다.비서
비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지아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안녕하세요, 진 대표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한 과장님도 일찍 나오셨군요.”“오늘 확인하실 구간이 많아서 미리 동선을 점검했습니다. 물류팀에서도 준비를 도와주셨고요.”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안녕하십니까. 재무팀 김도윤 차장입니다. 이번 투자 건의 자금 집행계획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이건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진이건입니다.”악수는 짧았다.도윤은 손을 놓자마자 지아에게 시선을 돌렸다.“한 과장, 아까 확인한 재고 회전율 자료는 내가 설명할게. 운송 계약은 네가 맡는 게 좋겠어.”“네. 그럼 제가 먼저 물류비 구조부터 설명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역할을 정리했다. 상대방이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어느 부분을 잘 아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듯했다.이건은 그 자연스러운 호흡을 지켜보았다.지아가 자신 앞에서는 늘 말 한마디를 고르고 표정을 살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반면 저 남자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그 차이가 마음에 걸렸다.현장 점검은 예정대로 진행됐다.지아는 운송사별 계약 조건과 물동량 변동에 따른 비용 구조를 설명했고, 도윤은 투자금 집행 일정과 현금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보충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설명을 가로막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채웠다.이건은 그들의 업무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 지아는 현장 관리자에게 확인한 실제 물동량과 보고서에 반영된 수치를 비교하며, 운송 계약 재협상이 늦어질 경우 발생할 비용까지 설명했다.그녀가 일에 집중할 때마다 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오래 두었다.점검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일행은 하역장과 자동 분류 구역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동했다.바닥에는 노란색 안전선이 그어져 있었고, 작업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경고등이 켜졌다. 지아는 앞장서 걸으며 태블릿에 표시된 계약 조건을 확인하고 있었다.그때 뒤
이건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백현우를 떠올리며 굳어 있던 표정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는 한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한지아.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전화를 걸지는 않았다.대신 연락처를 닫기 전, 그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백현우는 남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정작 그녀가 얼마나 귀한 여자인지도 모르면서.이건은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한지아의 이름을 오래 바라보았다.저 남자가 가진 자리를 빼앗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을 스쳤다.그 순간, 이건의 손가락이 멈췄다.자신이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이건이 한지아의 이름을 유난히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의 비서였다.백림유통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이건은 오전부터 투자심의위원회에 제출할 검토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전날 지아가 바로잡은 물류비 절감 수치는 수정 보고서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었고, 작성자와 검토자의 이름도 구분되어 있었다.마지막 장까지 살핀 뒤 결재 화면을 열었을 때, 비서가 새로운 참석자 명단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대표님, 내일 백림유통 물류센터 현장 점검에 참석할 실무진 명단입니다. 한지아 과장님과 재무팀 김도윤 차장이 설명을 맡기로 했습니다.”이건의 손이 잠시 멈췄다.“김도윤 차장?”“네. 이번 투자 건에서 자금 집행계획과 현금흐름 검토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과장님과 함께 실무 조율을 해 온 직원입니다.”이건은 명단을 받아 들었다.한지아의 이름 바로 아래에 김도윤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부서가 다른 두 직원이 하나의 투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읽었다.“그 직원은 어떤 사람입니까?”“서른다섯 살이고, 백림유통에서 근무한 지 칠 년 정도 됐습니다. 재무팀에서는 실무 능력이 좋은 직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한 과장님과는 오
“한 과장님.”그가 다시 부르자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앞으로도 오늘처럼 하십시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본인이 확인한 사실을 끝까지 설명하세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누군가 부당하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면 혼자 감당할 필요 없습니다. 업무상 필요한 자료나 확인 절차가 있다면 도원에 정식으로 요청하세요.”지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 대표님.”그녀가 서류철을 안고 돌아서자 이건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지아는 몇 걸음 걷다가 다른 직원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보였다.이건은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방금 전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 아쉬웠다.자신에게만 조금 더 오래 웃어 주었으면 했다.그 생각이 떠오르자 이건은 미간을 좁혔다.그녀의 웃음까지 자신이 독점할 이유는 없었다.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 향한 그 얼굴을 보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차에 오른 이건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비서가 다음 일정을 보고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이 계속 떠올랐다.백현우가 지아를 몰아세우던 순간.민서라가 눈물을 보이자 현우가 곧바로 그녀를 감싸던 순간.그리고 지아가 차분하게 수정 이력을 펼쳐 놓던 순간까지.이건은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두드렸다.그는 오늘 자신이 몇 번이나 말을 끊고 싶었는지 떠올렸다.백현우에게 당장 그만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원본과 수정본을 직접 비교해 보여 주며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지아가 먼저 움직였다.이건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떠올렸다.안도감이었다.그리고 그것보다 더 강한 만족감이 있었다.지아가 현우의 말을 차분하게 반박할 때마다 속이 후련했다. 재무담당 임원이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자신이 성과를 인정받은 것처럼 기뻤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오늘 백림유통 회의는 예상보다 잘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