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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Author: 월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7 21:28:09
다음 날 오전, 이건의 휴대전화에 지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표님, 어제 샘플 전부 정상 입고됐습니다. 수정한 분류표도 도원 담당자에게 전달했고요. 추가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회의실로 향하던 이건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어젯밤 자신이 먼저 연락해달라고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내용도 간단하고 정확했다.

평소 같으면 ‘확인했습니다.’ 한마디로 끝냈을 일이었다.

[확인했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

이대로 보내면 대화는 끝이었다.

그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아쉬웠다.

어제 물류장에서 박스를 하나씩 확인하던 지아가 떠올랐다. 국밥집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재미없게 살 것 같다며 웃던 얼굴도 따라왔다.

그러다 문득 다른 장면 하나가 끼어들었다.

물컵을 들던 순간, 소매 아래로 드러났던 손목의 멍.

이건의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

물류장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어디 부딪혔나 싶었다. 그런데 식당에서 다시 본 멍은 생각보다 선명했다.

더 마음에 걸린 건 지아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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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은 굳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한지아가 자꾸 궁금해졌다.괜찮은지.그 손목은 왜 그런지.그리고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잘 웃고 있는지.***월요일 아침, 비서가 백림유통 회의 요약본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목요일 회의 참석자도 확정됐습니다.”결재 서류에 서명하던 이건의 손이 잠깐 느려졌다.“누굽니까?”“백현우 대표, 재무팀 김 부장, 전략기획팀 박 팀장하고 한지아 과장입니다.”펜촉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한지아 과장.그 이름이 들리자 마음 한쪽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이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서명했다.“알겠습니다.”비서가 방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다음 서류로 손이 가지 않았다.목요일.아직 사흘이나 남았다.생각보다 멀었다.이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회의가 사흘 뒤인 게 무슨 상관인가.백림유통과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었고, 실제로 확인할 업무도 있었다.책상 한쪽에 놓인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연락할 이유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어제 본 자료에도 확인할 내용이 있었고, 도원 건의 진행 상황을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건은 휴대전화로 손을 뻗지 않았다.연락하고 싶은 것과 연락해야 하는 건 달랐다.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손목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궁금하다고 물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걱정된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이건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십여 분쯤 지났을 때 비서가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목요일 회의 전에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온라인 판촉비 조정안 관련해서 실무자 의견을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건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누구 의견을 말하는 겁니까?”“자료 작성자가 한지아 과장이라 그쪽에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이번에는 손이 먼저 움직였다.이건은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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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오후, 백림유통에서 원본 자료가 넘어왔다.이건은 다른 보고서를 보고 있다가 메일 알림에 뜬 회사명을 확인하자 곧바로 메일을 열었다.첨부파일은 네 개였다.작성자도 담당 부서도 달랐다.그중 한 파일 아래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전략기획팀 한지아 과장.이건은 망설이지 않고 그 파일부터 열었다.온라인 채널별 판촉비 조정안과 도원 공급 일정 변경에 따른 손익 영향이 정리돼 있었다. 복잡한 숫자를 늘어놓기보다 어디가 달라졌고, 그 변화가 실제 손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한눈에 들어왔다.몇 장을 넘기던 이건의 시선이 한 문장에 멈췄다.‘단기 매출보다 반품률 안정화가 선행되어야 함.’지난번 회의에서도 그랬다.다른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숫자부터 설명했지만, 지아는 늘 그다음에 생길 문제를 먼저 봤다.문서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이건은 나머지 세 파일을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굳이 이 자료부터 볼 이유는 없었다.한지아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었다.이건은 의자에 기대어 잠시 모니터를 바라봤다.일은 저렇게 꼼꼼하게 하면서 정작 자기 일에는 이상할 만큼 무던했다.누가 일을 떠넘겨도 감정부터 앞세우지 않았고, 문제가 생기면 일단 해결한 뒤 책임을 따졌다.손목에 멍이 들어 있으면서도 박스를 들었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며 웃었다.처음에는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단단한 게 아니라 참는 데 익숙한 건 아닐까.그 생각이 들자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다.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건 오히려 무례했다.지아가 말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게 맞았다.그런데 기다리는 것과 궁금하지 않은 건 달랐다.자료를 읽다 보니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원래라면 투자관리팀에 넘기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직접 물어봐도 되겠군.업무 얘기라면 이상할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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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오전, 이건의 휴대전화에 지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어제 샘플 전부 정상 입고됐습니다. 수정한 분류표도 도원 담당자에게 전달했고요. 추가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회의실로 향하던 이건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어젯밤 자신이 먼저 연락해달라고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내용도 간단하고 정확했다.평소 같으면 ‘확인했습니다.’ 한마디로 끝냈을 일이었다.[확인했습니다.]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이대로 보내면 대화는 끝이었다.그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아쉬웠다.어제 물류장에서 박스를 하나씩 확인하던 지아가 떠올랐다. 국밥집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재미없게 살 것 같다며 웃던 얼굴도 따라왔다.그러다 문득 다른 장면 하나가 끼어들었다.물컵을 들던 순간, 소매 아래로 드러났던 손목의 멍.이건의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물류장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어디 부딪혔나 싶었다. 그런데 식당에서 다시 본 멍은 생각보다 선명했다.더 마음에 걸린 건 지아의 반응이었다.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끌어내렸다.놀라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마치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그게 자꾸 생각났다.어제 하루 종일 지아는 잘 웃었다. 박스를 옮기면서도 농담을 했고, 국밥집에서는 자신을 놀리기까지 했다.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그 손목은 왜 그런 걸까.궁금하다고 바로 물을 수는 없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일을 굳이 들춰내는 건 이건의 방식이 아니었다.그렇다고 한번 본 걸 못 본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이건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문장을 하나 덧붙였다.[도원 쪽 반응은 어떻습니까?]답장은 금방 왔다.[좋아요. 어제 현장에서 바로 수정해서 오히려 대응이 빨랐다고 하네요. 오늘 오후에 최종 확인만 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이건은 메시지를 천천히 읽었다.역시 아무렇지 않았다.자기 손목에 멍이 들어 있든 말든, 지아가 먼저 말하는 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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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대로 단정하지 않았다.지아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오늘 잘 먹었습니다, 대표님.”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비서가 우산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이대로 보내면 됐다.그런데 지아가 빗속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이건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한 과장님.”지아가 다시 돌아봤다.이건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오늘 샘플 건 정리되면 연락 주실 수 있습니까?”“네. 회사 메일로 드릴까요?”회사 메일로 받아도 아무 문제 없었다. 원래라면 그게 맞았다.이건의 시선이 지아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에 잠깐 머물렀다.“메일은 제가 늦게 볼 수도 있으니까 휴대전화로 주시죠.”“번호를 모르는데요.”이건이 번호를 불러주자 지아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저장했어요.”이번에는 이건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제 쪽에도 번호를 남겨주시죠.”지아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잠시 뒤 이건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화면에 낯선 번호가 떠 있었고, 지아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접니다.”이건은 통화를 종료한 뒤 연락처 저장 화면을 열었다.한지아 과장.그렇게 입력하려던 손가락이 멈췄다.잠시 화면을 바라보던 이건이 뒤의 두 글자를 지웠다.한지아.세 글자만 남았다.이건은 그대로 저장 버튼을 눌렀다.지아는 그가 무엇이라고 저장했는지도 모른 채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그럼 갈게요, 대표님.”“조심해서 가십시오.”우산도 없이 역 쪽으로 뛰어가려는 지아를 보자 이건의 미간이 좁아졌다.마침 비서가 우산을 들고 도착했고, 이건은 우산을 받아 지아에게 내밀었다.지아가 걸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봤다.“대표님은요?”이건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저보다 한 과장님이 더 오래 걸어야 하잖아요.”지아는 우산과 이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다음에 돌려드릴게요.”다음에.별것 아닌 말인데 이건의 시선이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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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먹어보라는 눈빛으로 숟가락을 가리켰다.“한 과장님은 원래 남의 밥 먹는 것까지 관리합니까?”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건은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생각보다 괜찮았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지아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맛있죠?”이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국물을 한 번 더 떠먹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된 모양이었다.“거봐요. 제가 맛있다고 했잖아요.”마치 자신이 만든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그 순간 이건의 시선이 멈췄다.물류장에서 보았던 웃음과는 또 달랐다. 일할 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고, 별것 아닌 일에도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한 과장님은 원래 잘 웃습니까?”입으로 가져가던 지아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지아가 자신을 가리키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제가요?”“오늘은 많이 웃는 것 같아서요.”지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오히려 이건을 빤히 바라봤다.“대표님도 오늘 많이 웃으셨는데요. 원래는 잘 안 웃으시죠?”생각해보니 그랬다.이건은 대답 대신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지아는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역시.”“뭐가 말입니까?”“그냥요. 평소에는 별로 재미없게 사실 것 같아서요.”이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자신에게 재미없게 산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오히려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해졌다.“한 과장님은 재미있게 삽니까?”물컵을 들던 지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방금 전까지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조금 옅어졌다.“저도 별로예요.”가볍게 넘기려는 말투였다.이건은 더 묻지 않았다.마침 지아가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옷소매가 조금 밀려 올라갔고, 물류장에서 보았던 멍 자국이 다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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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뜻밖의 제안을 받은 사람처럼 이건을 바라보다가 괜히 어색한지 손목시계를 한번 만졌다.“저랑요?”이건이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넓은 물류장에는 어느새 두 사람만 남다시피 했다.“여기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그제야 지아도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하고 저하고 둘이 밥을 먹는다는 말씀이세요?”이건은 대답 대신 지아의 표정을 살폈다.“불편합니까?”싫다면 그걸로 끝이었고, 굳이 이유까지 물어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지아가 입을 열기까지 이어진 짧은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잠시 고민하던 지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대표님은 직원이랑 따로 밥 안 드실 것 같아서요.”“한 과장님은 제 직원이 아닙니다.”그 말을 들은 지아가 그러네요, 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웃었다.“그럼 다행이네요. 대표님 직원이었으면 밥 얻어먹기 더 어려웠을 것 같거든요.”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이건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뒤따라오던 지아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제가 골라도 돼요?”이건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럼 국밥이요.”막 열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던 이건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지아가 먼저 웃었다.“왜요, 싫으세요?”“아닙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국밥은 예상하지 못해서요.”“오늘 박스까지 직접 옮기셨는데 이 정도면 대표님 체험 제대로 하시는 거죠.”지아가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닫힘 버튼을 누르며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이건도 결국 낮게 웃었다.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유난히 많이 웃고 있었다.지아가 고른 곳은 도원 본사에서 차로 십 분쯤 떨어진 골목 안쪽의 작은 국밥집이었다.비서가 주소를 확인하며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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