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수행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 백림유통의 수정 자료가 도착했다고 보고했다.도원인베스트먼트와 백림유통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유통망 개선안이었다. 매장별 물류비와 온라인 판촉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거래처의 공급 조건을 다시 확인해야 했고, 이건은 최종 수정안을 직접 검토하기로 한 상태였다.“백림 쪽에서는 누가 옵니까?”“한지아 과장입니다. 여섯 시까지 오기로 했습니다.”서류를 넘기던 이건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회의실 준비해 두세요. 오래 걸릴 내용은 아닙니다.”수정된 공급 조건과 몇 가지 수치만 확인하면 끝날 일이었다. 담당 임원에게 맡겨도 충분했지만, 지난번 회의에서 지아가 직접 설명했던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이건이 확인하는 편이 효율적이기도 했다.그는 보고서 첫 장을 넘기다가 작성자 이름을 확인했다.한지아.최근 백림유통에서 올라오는 자료에는 그녀의 이름이 자주 보였다. 지아가 작성한 보고서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질문이 나올 만한 부분에는 미리 설명이 붙어 있어 검토하기에도 편했다.자료를 읽다 보니 며칠 전 현장에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부터 찾더니, 일이 마무리되자 별것 아니라는 듯 웃던 모습이었다.이건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여섯 시까지는 아직 오십 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남은 시간에 처리할 결재 서류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 같은 시각, 한지아는 병원 원무과 창구 앞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과장님, 수정본은 언제쯤 주실 수 있어요? 거래처에서 최종 확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직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지아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벽시계를 확인했다.“공급가 조정표는 공용 폴더에 올려뒀어요. 마지막 시트에 거래처별 변경 조건까지 정리해 뒀으니 그것부터 보내세요. 다만 운송비 부담 주체가 확정되지 않은 두 곳은 승인된 것처럼 표시하면 안 됩니다.”통화를 끝내기도 전에 병원 직원이 지아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병원에 일이 생겨서 출발이 늦었습니다. 지금 이동 중인데 도착하려면 삼십 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평소 회의실에서 듣던 목소리와 달리 말끝마다 숨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이건은 열어 두었던 회의 자료를 닫았다.“병원이라면 무슨 일 있습니까?”“아버지 검사 때문에요. 큰일은 아닌데 보호자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미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지아는 곧바로 회의 자료 이야기를 꺼내며, 늦은 만큼 설명은 최대한 짧게 하겠다고 덧붙였다.“한 과장님, 서두르지 말고 오세요. 회의실은 그대로 두겠습니다.”“대표님도 일정이 있으실 텐데, 제가 너무 늦으면 내일 아침으로 변경하셔도 됩니다.”“오늘 확인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동 중에 자료 보지 말고 안전하게 오세요.”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네. 감사합니다, 대표님.”통화가 끊어지자 이건은 비서를 불러 일곱 시에 예정된 외부 미팅을 삼십 분 늦추도록 지시했다.기다리는 동안 처리할 일은 충분했다. 몇 건의 결재를 마쳤고 해외 지사에서 올라온 보고서에도 답장을 보냈다. 다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번씩 고개가 돌아갔다.누군가 회의실 앞을 지나가자 펜을 내려놓았다가, 문이 열리지 않자 다시 서류를 읽었다.여섯 시 사십오 분이 되자 이건은 비서에게 연락했다.“백림 쪽에서 도착하면 바로 안내해 주세요.”지아가 도원인베스트먼트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 사십팔 분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고 가방에서 자료철을 꺼냈다. 병원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안내 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하겠다고 하자 지아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직 기다리고 계신가요?”“네. 안에서 업무 보고 계십니다.”회의실 문이 열리자 창가에서 통화하던 이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이건은 굳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한지아가 자꾸 궁금해졌다.괜찮은지.그 손목은 왜 그런지.그리고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잘 웃고 있는지.***월요일 아침, 비서가 백림유통 회의 요약본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목요일 회의 참석자도 확정됐습니다.”결재 서류에 서명하던 이건의 손이 잠깐 느려졌다.“누굽니까?”“백현우 대표, 재무팀 김 부장, 전략기획팀 박 팀장하고 한지아 과장입니다.”펜촉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한지아 과장.그 이름이 들리자 마음 한쪽이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이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서명했다.“알겠습니다.”비서가 방을 나간 뒤에도 한동안 다음 서류로 손이 가지 않았다.목요일.아직 사흘이나 남았다.생각보다 멀었다.이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회의가 사흘 뒤인 게 무슨 상관인가.백림유통과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었고, 실제로 확인할 업무도 있었다.책상 한쪽에 놓인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연락할 이유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어제 본 자료에도 확인할 내용이 있었고, 도원 건의 진행 상황을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건은 휴대전화로 손을 뻗지 않았다.연락하고 싶은 것과 연락해야 하는 건 달랐다.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손목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궁금하다고 물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걱정된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이건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십여 분쯤 지났을 때 비서가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백림유통에서 목요일 회의 전에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온라인 판촉비 조정안 관련해서 실무자 의견을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건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누구 의견을 말하는 겁니까?”“자료 작성자가 한지아 과장이라 그쪽에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이번에는 손이 먼저 움직였다.이건은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제
당연했다.샘플 건은 이미 끝났고 더 이상 자신에게 보고할 일도 없었다.그런데 화면을 끄려던 손이 멈췄다.연락할 일이 없다는 게 묘하게 아쉬웠다.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연락처를 열었다.한지아.어젯밤 직접 저장한 세 글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손가락이 이름 위에 머물렀다.전화를 걸 수도 있었고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유가 없었다.이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내가 왜 이 여자한테 연락할 이유를 찾고 있지?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오전에 읽었던 자료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단기 매출보다 반품률 안정화가 선행되어야 함.’물어볼 만한 내용이었다.업무적으로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이건은 다시 메시지 창을 열었다.[한 과장님.]거기까지 입력하고 손이 멈췄다.정작 뭘 물을지는 정하지도 않은 채 이름부터 썼다.이건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뭐 하는 거지.입력한 문장을 지우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차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퇴근길 차량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이건은 노트북을 열었다.보고서를 몇 줄 읽었지만 조금 전 열었던 메시지 창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결국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이번에는 질문부터 정리했다.[오늘 보내주신 자료 봤습니다. 반품률 부분은 어떤 기준으로 잡은 겁니까?]전송.누가 봐도 업무적인 질문이었다.그제야 이건은 휴대전화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보고서를 읽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아무것도 없었다.몇 줄을 더 읽고 또 봤다.여전히 답장은 없었다.왜 이렇게 늦지.이건은 시간을 확인했다.메시지를 보낸 지 고작 칠 분이었다.그제야 자신이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이건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휴대전화를 뒤집어 좌석 위에 내려놓았다.백미러 너머로 그 모습을 본 비서는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렸다.잠시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이건의 손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 날 오후, 백림유통에서 원본 자료가 넘어왔다.이건은 다른 보고서를 보고 있다가 메일 알림에 뜬 회사명을 확인하자 곧바로 메일을 열었다.첨부파일은 네 개였다.작성자도 담당 부서도 달랐다.그중 한 파일 아래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전략기획팀 한지아 과장.이건은 망설이지 않고 그 파일부터 열었다.온라인 채널별 판촉비 조정안과 도원 공급 일정 변경에 따른 손익 영향이 정리돼 있었다. 복잡한 숫자를 늘어놓기보다 어디가 달라졌고, 그 변화가 실제 손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한눈에 들어왔다.몇 장을 넘기던 이건의 시선이 한 문장에 멈췄다.‘단기 매출보다 반품률 안정화가 선행되어야 함.’지난번 회의에서도 그랬다.다른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숫자부터 설명했지만, 지아는 늘 그다음에 생길 문제를 먼저 봤다.문서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이건은 나머지 세 파일을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굳이 이 자료부터 볼 이유는 없었다.한지아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었다.이건은 의자에 기대어 잠시 모니터를 바라봤다.일은 저렇게 꼼꼼하게 하면서 정작 자기 일에는 이상할 만큼 무던했다.누가 일을 떠넘겨도 감정부터 앞세우지 않았고, 문제가 생기면 일단 해결한 뒤 책임을 따졌다.손목에 멍이 들어 있으면서도 박스를 들었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며 웃었다.처음에는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단단한 게 아니라 참는 데 익숙한 건 아닐까.그 생각이 들자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다.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건 오히려 무례했다.지아가 말하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게 맞았다.그런데 기다리는 것과 궁금하지 않은 건 달랐다.자료를 읽다 보니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원래라면 투자관리팀에 넘기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직접 물어봐도 되겠군.업무 얘기라면 이상할 것도
다음 날 오전, 이건의 휴대전화에 지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어제 샘플 전부 정상 입고됐습니다. 수정한 분류표도 도원 담당자에게 전달했고요. 추가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회의실로 향하던 이건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어젯밤 자신이 먼저 연락해달라고 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내용도 간단하고 정확했다.평소 같으면 ‘확인했습니다.’ 한마디로 끝냈을 일이었다.[확인했습니다.]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이대로 보내면 대화는 끝이었다.그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아쉬웠다.어제 물류장에서 박스를 하나씩 확인하던 지아가 떠올랐다. 국밥집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재미없게 살 것 같다며 웃던 얼굴도 따라왔다.그러다 문득 다른 장면 하나가 끼어들었다.물컵을 들던 순간, 소매 아래로 드러났던 손목의 멍.이건의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물류장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어디 부딪혔나 싶었다. 그런데 식당에서 다시 본 멍은 생각보다 선명했다.더 마음에 걸린 건 지아의 반응이었다.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지아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끌어내렸다.놀라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마치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 너무 자연스러웠다.그게 자꾸 생각났다.어제 하루 종일 지아는 잘 웃었다. 박스를 옮기면서도 농담을 했고, 국밥집에서는 자신을 놀리기까지 했다.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그 손목은 왜 그런 걸까.궁금하다고 바로 물을 수는 없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일을 굳이 들춰내는 건 이건의 방식이 아니었다.그렇다고 한번 본 걸 못 본 일로 만들 수도 없었다.이건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문장을 하나 덧붙였다.[도원 쪽 반응은 어떻습니까?]답장은 금방 왔다.[좋아요. 어제 현장에서 바로 수정해서 오히려 대응이 빨랐다고 하네요. 오늘 오후에 최종 확인만 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이건은 메시지를 천천히 읽었다.역시 아무렇지 않았다.자기 손목에 멍이 들어 있든 말든, 지아가 먼저 말하는 건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