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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Author: 월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2 18:36:29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일을 해냈다.

그러나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아가 급히 몸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건도 허리를 굽혀 서류를 주웠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는 바람에 손끝이 스치자 지아가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는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그녀에게 건넸다.

“한 과장님, 서류가 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런 일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아는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곧바로 가방에 넣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웃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참 동안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정말 괜찮아지고 싶습니다.”

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가면 언젠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전화가 울리기만 해도 겁이 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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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책임을 인정하는 문장까지 작성되어 있었다.“여기 서명해. 도원에서 문제 삼으면 담당자 실수로 정리하고 끝낼 거야.”“이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사실이고 나발이고, 내가 시키면 하는 거야!”현우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찻잔이 흔들리면서 물이 받침에 흘러넘쳤다.“네가 여기서 월급 받아먹는 게 누구 덕분인데? 회사에서 내 말 안 듣고, 집에서도 남편 우습게 보더니 이제 아주 대놓고 나를 물 먹여?”서라가 재빨리 현우의 팔을 붙잡았다.“대표님, 그러다 손 다치세요. 사모님도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시면 되는데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드세요?”나는 서라를 바라보았다.“제가 하지 않은 일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서라의 눈이 커졌다. 현우는 그녀를 자기 뒤로 물리더니 다시 내게 다가왔다.“너 요즘 진이건 믿고 까부는 거지?”그가 내 앞에 바짝 섰다.“그 자식이 몇 번 잘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넌 아직 내 아내고, 백림유통 직원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자리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라고.”나는 현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업무상 잘못이 있다면 정식 절차에 따라 처리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경위서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끝까지 버텨 보겠다?”“확인할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나는 경위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오늘 중으로 자료를 정리하겠습니다.”돌아서려는 순간 현우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뼈가 눌리는 통증이 올라왔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나는 붙잡힌 팔을 내려다본 뒤 그를 바라보았다.“놓으세요. 업무 이야기는 계속 듣겠습니다.”현우는 몇 초 더 버티다가 거칠게 손을 놓았다. 나는 흐트러진 소매를 정리하고 대표실을 나왔다.복도 끝까지 걸어간 뒤에야 손목을 살폈다.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휴대전화를 꺼내 시계를 확인했다.오전 열 시 사십이 분.나는 방금 대표실에서 들은 지시와 발언을 시간순으로 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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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마음은 그가 익숙하게 다루던 사업상의 관심과는 전혀 달랐다.퇴근 시간이 지난 도원 본사 복도는 조용했다.이건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지아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자료 봉투를 들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울음을 참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졌고, 다시 단정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대표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이제 내려가는 길입니다. 한 과장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그녀가 웃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이건은 지아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보았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웃음을 지운 채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수화기 너머에서 백현우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아직도 도원이야? 내가 자료 설명 끝나면 바로 돌아오라고 했지. 너 지금 누구랑 있는 건데?”지아는 이건을 힐끗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업무를 마치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곧 돌아가겠습니다.”“진이건이랑 또 단둘이 있는 거 아니야? 너 정말 남자 문제로 회사 망신시키고 싶어?”이건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지아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움켜쥐자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은 회사 복도입니다. 돌아가서 보고드리겠습니다.”현우가 무언가 더 소리쳤지만 지아는 대꾸하지 않았다.통화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통화 내용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아는 또다시 상황을 설명하거나 변명해야 할지도 몰랐다.잠시 후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급한 연락이 와서요.”그녀는 웃었다.조금 전 회의실에서 울음을 참던 여자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이건은 그 미소를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지금 바로 돌아가셔야 합니까?”“네.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알겠습니다. 오늘 업무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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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일을 해냈다.그러나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지아가 급히 몸을 숙였다.“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이건도 허리를 굽혀 서류를 주웠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는 바람에 손끝이 스치자 지아가 놀라 손을 거두었다.그는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그녀에게 건넸다.“한 과장님, 서류가 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런 일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지아는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곧바로 가방에 넣지 못했다.평소 같았으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웃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참 동안 서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이건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후 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는 정말 괜찮아지고 싶습니다.”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냥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가면 언젠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전화가 울리기만 해도 겁이 납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또 들어야 할까 봐요.”지아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웃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했고, 제가 만든 자료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도 괜찮은 척했어요. 그런데 대표님이 잘못한 게 없다고 말씀하시니까…….”말끝이 흐려지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이건은 창가 쪽으로 몸을 조금 비켜섰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회의실 밖에서 직원들의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닫힌 문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한동안 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건 역시 침묵을 지켰다.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죄송합니다. 업무 시간에 이런 모습까지 보여 드려서.”이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보여 주신 모습 때문에 업무 평가가 달라지는 일도 없습니다.”지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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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과장님이 오셨군요.”이건이 말을 건네자 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 둔 서류를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요청하신 물류비 비교 자료와 계약별 수정 내역을 준비했습니다.”이건은 서류를 받아 첫 장부터 차례로 살펴보았다.백림유통이 도원에 제출했던 기존 투자 검토 자료의 작성 근거가 정리되어 있었고, 그다음 장에는 담당자 변경 전후의 파일 목록과 수정 시각이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이 자료까지 준비하신 이유가 있습니까?”지아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대답했다.“담당자가 변경됐기 때문에 제가 작성한 원본과 이후 수정되는 자료를 구분해 두는 게 정확할 것 같았습니다.”이건은 그녀가 선택한 표현에 주목했다.변명도 항의도 아니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하려는 설명이었고, 그 안에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으면서도 부당한 책임을 떠안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그는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자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잘하셨습니다. 오늘은 원본 작성 근거만 확인하겠습니다. 담당자 변경 이후의 자료는 새 담당자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할 겁니다.”지아는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듯 잠시 눈을 들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가 시작되자 그녀는 운송 계약별 단가 차이와 물동량에 따른 비용 변동을 설명했고, 재무팀의 질문에도 정확한 수치를 제시했다. 도원 직원들이 자료를 넘기는 소리만 회의실에 이어질 만큼 발표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그러나 이건은 그녀가 설명하는 동안에도 자꾸만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지아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등을 곧게 펴고 대답했지만, 설명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생기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누르는 움직임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그때 책상 위에 엎어 놓은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조금씩 움직였다.지아는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말을 멈췄다.이건은 잠깐 드러난 발신자 이름을 보았다.백현우.지아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설명을 이어 가려 했지만, 조금 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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