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빛나냥
전서준이 연희를 놀린 건 연희가 예뻐서였다.

"네가 나 용서해주면 앞으로 어린이집에서 내가 너 지켜줄게. 절대 아무도 너 건드리지 못할 거야."

전서준은 이번 일 때문에 연희 엄마가 연희를 전학 보낼까 봐 두려웠다.

사실 허설아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어린이집에 가도 똑같은 일을 겪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허설아는 다정하게 연희의 의견을 물었다.

"연희야, 전학 가고 싶어? 아니면 계속 여기 있을래?"

잠시 생각하던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랑 다른 친구들은 다 좋아요."

허설아도 약간의 사심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권지헌이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단속할 테니 연희도 어린이집에서 전서준 같은 말썽꾸러기를 다시는 만날 일 없었다.

전서준도 사과할 줄 아는 걸 보면 답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집 근처 골목에 도착하자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허설아는 별다른 말 없이 연희를 데리고 떠났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뒷모습만 봐도 허설아가 지금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과 많이 달라진 허설아는 마치 단단한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했지만 성격과 사소한 버릇들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화가 나면 늘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의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화내기 미안해서 항상 화를 억누르고 스스로 삭인 뒤 다시 권지헌을 찾아가곤 했다.

권지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하고 오래된 재개발 지역의 낡은 아파트로 월세는 싸지만 회사까지 통근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이 걸렸다.

허설아가 지금 여기서 산다고?

남편이 정말 무능력한 모양이다.

권지헌은 속에서 미묘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핸들을 틀며 전서준에게 물었다.

"너 연희 자주 괴롭혔어?"

전서준은 입만 삐죽거리다 몇 번이나 물어서야 겨우 답했다.

"아빠가 없다고, 아빠가 버린 아이라고 했어요. 진짜예요, 삼촌. 나 연희 아빠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리고 평소에 나랑 놀아주지 않아서 디저트랑 과일 몇 번 빼앗았어요."

"몇 번 밀치기도 했어요. 그리고 연희 원피스가 있는데 만 원이래요. 삼촌, 만 원짜리 옷 본 적 있어요? 어찌나 싸구려인지 살짝 잡아당겼는데 바로 찢어졌어요."

"한 번은 연희가 한약 먹길래 내가 버려버렸어요."

……

권지헌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런 말을 허설아 앞에서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면 아이를 아끼는 허설아 성격에 더 화가 폭발했을 것이다.

권지헌은 전서준을 사촌 누나집에 데려다준 뒤 사건 경과를 쭉 설명했다.

차가 떠나기도 전에 벌써 집 안에서 전서준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권지헌은 차에 앉아 떠나려는 기색이 없이 느긋하게 전서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어 휴대폰을 꺼내 회사 내부 메신저를 열어 실명제로 된 계정에서 허설아를 찾았다.

프로필 사진은 일러스트로 된 강아지였다. 손에 꽃을 들고 바보처럼 환하게 웃는 몰티즈라고 하는 강아지 캐릭터였다.

과거의 허설아와 닮아 있었다.

권지헌이 메시지를 보내자 빨간색 느낌표가 나타났다.

그리고 밑에 작은 글씨로 회사 내부 제한으로 다른 부서 간 직접 소통 금지, 상급자를 건너뛰고 소통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적혀 있었다.

권지헌은 말문이 막혔다.

회사 대표가 직원한테 연락하려는데 반드시 비서팀을 거쳐야 한다니.

권지헌은 조민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 아이디 허설아한테 추천 보내요."

조민규는 허설아의 기획안에 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기절초풍할 듯하며 휴대폰을 든 채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추천을 보내자 허설아는 곧바로 물음표를 하나 보냈다.

"?"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세요."

하지만 허설아는 마지막 말을 지우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ok."

허설아는 조민규가 보낸 친구 추천 메시지를 확인했다.

권지헌의 sns 연락처는 권지헌 본인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프로필 사진에 이름은 H였고 계정 아이디는 권지헌의 영어 이름과 생일로 조합되어 있었다.

바로 친구 추가를 하자 권지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앞으로 딸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다 책임질게요."

"알겠습니다."

권지헌이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

전서준이 바닥을 뒹굴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아기돼지처럼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상을 본 허설아는 단번에 권지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적당히 하고 그만 화 풀라는 뜻이었다.

권지헌이 아이를 많이 아낀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아마 권지헌이 좋아하는 여자와 낳은 아이여서겠지.

허설아는 마음이 씁쓸했다. 오후에 권지헌이 전서준을 감싸는 모습을 허설아도 다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때리는 것조차 진짜로 때리지 못하고 시늉만 하다니.

하긴, 권지헌 같은 존재는 아이만 갖고 싶다고 하면 낳아줄 여자가 널렸을 것이다.

허설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영상을 태그하고 답장을 보냈다.

"확인했습니다."

답장을 끝으로 모든 감정을 다시 삼켰다.

-

그날 밤, 아니나 다를까 연희는 열이 났다.

감염을 막기 위해 허설아는 자신과 연희 모두 마스크를 쓰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검사를 해보니 기존 병들이었다.

의사는 뒤에 있는 커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를 안고 저쪽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수액 준비해야 해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허설아는 자그마한 딸을 안고 작은 칸막이 안에 앉아 다른 손으로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미대 출신인 허설아는 대학교 때부터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때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에 그냥 좋아서 게임이나 드라마 팬아트를 그렸는데 어쩌다 보니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지금 허설아는 팔로워 300만인 유명 일러스트 작가였다.

허설아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메시지들이 종종 있었고 시간이 되면 거의 다 받는 편이었다.

다만 그림 그리는 일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어 한 장 그리는 데 일주일씩 걸렸다.

게다가 연희가 아프면 효율도 많이 떨어졌다.

의뢰 가격 문의 메시지 몇 개를 확인한 허설아는 가격표만 보내고 바로 나왔다

권지헌이 SNS로 전화를 걸어왔다.

"딸 옷이 내 차에 있어요."

"내일 출근하면 차로 가서 받아 가겠습니다."

허설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하는 걸 발견하고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거라 짐작한 권지헌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칸막이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의 불만 가득한 소리였다.

"권지헌도 정말 너무하네. 우리 서준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 좀 사귀는 걸 어떻게 다른 애들 괴롭혔다고 말할 수 있어?"

"서준이가 얼마나 놀랐으면 열까지 나겠어!"

권지헌 사촌 누나인 유혜원이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니, 지헌이도 서준이를 위해서 혼낸 거예요. 그리고 서준이한테 오늘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 한 번 말해보라 하세요. 그게 무슨 친구 사귀는 거예요? 그건 그냥 괴롭힌 거예요!"

김현숙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손찌검은 안 되지! 서준이가 지금까지 자라면서 언제 맞아본 적이 있어!"

"서준이 말로는 그 계집애가 옷도 겨우 만 원짜리에 애 아빠 얼굴도 본 적 없다며? 딱 봐도 계집애랑 엄마가 일부러 국제학교에 와서 돈 많은 남자 꼬시려는 거야."

"틀림없어. 아니면 권지헌 성격에 어떻게 두 사람 집에까지 데려다줘? 서준이도 계집애 엄마가 예쁘다고 하던데 남자나 노리는 천한 것이 분명해! 안 되겠어, 내일 내가 학교에 찾아가서 뻔뻔한 그 계집애 퇴학시키라고 해야지!"

유혜원이 끝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말 지헌이 앞에 가서 똑같이 해보세요."

김현숙도 감히 권지헌 앞에서는 으스대지 못했다.

커튼 안, 허설아는 손발이 차갑게 식어갔고 모욕적인 말들이 귀에 때려 박혀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이명이 끊이지 않았다.

허설아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30화

    강시우의 요구는 높지 않았다."주말에 쇼핑몰에서 나랑 만나서 아주머니한테 대충 보여주고 헤어지는 거야."허설아는 연민규와 약속한 쇼핑몰 위치를 말했다."거기로 해. 주말에 연희랑 놀러 가거든."박희수와 얘기 나눌 일은 없다고 강시우가 약속하고 나서야 허설아는 동의했다.전화를 끊은 허설아는 그림 그릴 기분이 들지 않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빗물이 창틀을 두드렸다.허설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에 박희수를 한 번 본 적 있었는데 권지헌과 연애할 때였다.허설아는 기숙사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허설아네 집과 학교는 같은 구역에 있었고 차로 10분 거리였기에 연동근은 허설아가 학교 밖에서 방을 얻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그날 부모님이 집에 없다는 걸 안 허설아는 권지헌을 집으로 데려갔다.두 사람이 방에서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보낸 후 박희수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박희수는 전화를 하자마자 권지헌에게 어디 있는데 뒤에 온통 핑크색이냐고 물었다.권지헌은 핑크 테마 PC방이라고 했다. 허설아는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박희수는 관리를 아주 잘한 모습이었다. 한눈에 봐도 부귀영화만 누리며 고생이라곤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순진무구함이 남아 있었는데 권지헌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투덜거렸다."남자애가 핑크색을 좋아해?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권지헌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지금 보니 박희수가 권지헌과 강시우 사이를 의심하는 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진작부터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허설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소리가 비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멈칫하던 허설아는 이렇게 웃어본 게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연동근이 돌아가고 허설아를 웃게 한 건 연희 뿐이었다. 몇 년을 연애했지만 허설아는 권지헌의 가족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권지헌 주변 친구들이 두 사람이 사귀는 걸 알게 된 건 허설아가 떠들썩하게 매달린 일이 학교 전체에 소문났고 사귀면서부터 더 큰 화제가 되었기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29화

    권지헌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음 소리에 마음이 더욱 불안해진 박희수는 옆에서 즐겁게 모바일 게임 중인 권정우를 툭툭 쳤다. "여보, 우리 아들 정상 아닌 거 같지 않아?"권정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희수는 부랴부랴 권지헌에게 소개팅을 주선하러 갔다.그리고 강시우에게도 전화를 걸었다.-늦은 밤, 허설아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허설아의 방은 매우 작았다. 예전 허씨 가문과 비교하면 지금 침실은 아마 허설아의 욕실만 했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중고 가구점에서 주워 온 책상을 화장대로 쓰는 게 방의 전부였다.휴대폰을 켜자 지난번 허설아에게 협업을 요청했던 의뢰인에게 소식이 왔다. 의뢰인은 허설아의 가격을 받아들일 수 있다며 몇 장 의뢰하고 싶다고 했다.허설아는 의뢰인과 일러스트 스타일과 유형을 확인하고 초안 시간을 논의한 후 계약금을 받고 로그아웃했다. 요구 사항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허설아는 창작 일러스트 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화가였다. 전에도 게임 의뢰를 몇 번 받았는데 수익이 높은 게임들에 상업용 일러스트를 그린 적 있었다.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을 켜면 바로 허설아가 그린 일러스트가 나왔다. 서명은 서풍이었다.처음에는 서풍을 몰랐던 플레이어들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서야 업계에서 유명한 대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허설아에게 의뢰하는 사람도 더 많아졌다.나중에는 터무니없는 루머도 겪었는데 누군가 허설아가 그림 의뢰를 받으면서 3000만 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받았다고 소문을 내기도 했다. 많은 안티 팬들이 서풍의 그림은 그렇게 비싼 값어치가 없다며 성토하기 시작했고 허설아에게 욕설을 담은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어쩔 수 없이 게임사가 직접 나서서 의뢰 가격이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해명했다.하지만 서풍의 실력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지지했다.허설아는 온라인에 접속한 후 자신의 의뢰 가격을 공개하는 동시에 가격 인상을 선언했다. 의뢰할 사람은 의뢰하고 자신을 헐뜯으려는 사람은 허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28화

    허설아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예전 계정은 이모티콘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작은 곰이 달려와 다른 곰을 안고 뽀뽀하는 일러스트 이모티콘이었다. 전에 권지헌이 매일 받았던 이모티콘이었다.실수로 누른 허설아는 바로 전송 취소했다.SNS를 열자 허설아가 집으로 갈 카풀 할 차를 구한다는 글이 보였다.마침 근처에 있었던 권지헌은 어차피 집에 가려면 송화로역을 지나야 했기에 허설아를 태워준 것이었다.다만 권지헌의 집과 교외의 낡은 아파트는 건영시의 양 끝에 있어서 엄청난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권지헌이 허설아를 발견했을 때, 허설아는 온몸이 흠뻑 젖어 볼품없고 불쌍해보였다.마치 오갈 데 없이 밖에서 온갖 괴롭힘을 당한 강아지 같았다.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채 물이 뚝뚝 떨어졌고 치마는 젖어서 몸에 달라붙었다. 차에 탄 뒤에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가워 몸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권지헌은 내색하지 않고 에어컨 온도를 조절했다.차를 타고 가는 내내 허설아는 권지헌을 무척 두려워했다.권지헌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일부러 권지헌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 듯했다. 의자에 앉아서도 언제든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사람처럼 경계심 가득한 자세로 문 쪽에 몸을 기울였다. 다시 만난 지금, 허설아 눈에 권지헌은 맹수가 되어 있었다. 빗물이 끊임없이 차창을 두들겼고 와이퍼는 지칠 줄 모르고 유리창을 닦아냈다. 차창 유리에 물줄기가 흘러내렸고 찬 바람이 불어 들어왔지만 오히려 권지헌은 이상하게 짜증났다. 부침개는 맛도 평범했다. 회식 때 밥을 거의 먹지 않아서 확실히 배가 고팠다.지금 이 시간대엔 이 동네에서 마땅한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권지헌은 부침개를 허겁지겁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 박희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지헌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아직 밖에 있어?""집 가는 길이에요. 거의 다 왔어요."박희수는 안전에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연이랑은 어땠어?""별로예요. 나 강지연한테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27화

    권지헌이 코웃음을 쳤다. 차가 다른 길로 들어갔고 도로 위에는 폭우로 인해 차량이 많이 적었다. "안목이 별로네.""……네?"허설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권지헌이 왠지 이상한 말투로 말했다. 탐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니면 단순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한 통제욕일 수도 있었다."네 딸 아빠를 어떻게 좋아하게 됐어?"허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이미 흠뻑 젖은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침묵하고 싶었지만 권지헌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허설아는 어쩔 수 없이 얼버무렸다."음, 잘생겨서요."권지헌은 황당한 이유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혀끝으로 어금니를 밀어 올리자 턱뼈에서 딱 소리가 났다. "그래? 외모 때문에 아이의 건강도 포기할 수 있어?"허설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연희가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빠와는 상관없었다.허설아가 임신했을 때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며 감정 기복이 너무 심했고 매일 너무 피곤했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겨우 세 시간밖에 못 잘 때도 있었다. 그해 허설아는 생사이별을 모두 겪었다. 연동근의 병실에서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임신한 줄도 몰랐을 것이다.요동치는 감정 속에서 허설아가 제일 먼저 내린 결정은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많이 조심했지만 뱃속에서 부족한 게 많았던 아이는 태어나서도 몸이 약했다.허설아가 연희에게 빚진 것이었다.허설아는 시선을 떨구고 말했다."아니에요. 다 제 탓이에요." 답답한 기운에 권지헌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허설아는 그 남자를 굉장히 감싸고 있었다.권지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액셀을 힘껏 밟자 차가 쏜살같이 폭우 속으로 돌진했고 갑작스레 빨라진 속도에 허설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권지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차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조금 그쳤다. 권지헌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먹을 거 있어?"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여전히 작은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26화

    그때 허설아는 무척 슬펐다.기숙사에서 몰래 울 뿐 권지헌에게 알릴 용기는 없었다.허설아는 권지헌을 정말 좋아했다.하지만 권지헌은 늘 무덤덤했고 누구에게나 다 똑같았다.기숙사에 돌아온 현서는 허설아가 눈가가 빨갛게 부은 채 권지헌을 졸라 인형 뽑기에서 뽑은 못생긴 곰 인형을 안고 이불 위에 엎드려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려하고 예뻤던 허설아는 몰래 울 때조차 눈물이 하얀 도자기 위를 흐르는 것처럼 사람 마음을 움직였다.질투가 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현서는 은근 신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권지헌이랑 싸웠어?"그때 현서와 허설아는 아직 사건이 터지기 전이라 관계가 괜찮았다.다만 허설아는 기분이 좋지 않아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괜찮아. 좀 잘게, 신경 쓰지 마."현서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도 허설아를 신경 쓰지 않고 이내 이어폰을 끼고 게임을 시작했다가 잠시 후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설아야, 이어폰 배터리가 없어서 소리 틀고 게임할게."허설아는 게임 소리가 너무 커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침대 커튼을 열고 현서가 무슨 게임을 하는지 보려 했다.하지만 커튼 틈새로 보이는 건 현서의 컴퓨터에 크게 틀어놓은 게임 영상이었다. 정작 현서는 허설아의 책상 앞에 엎드려 허설아의 스킨케어 제품을 바르고 있었다.심지어 서랍을 열어 허설아가 얼마 전에 산 액세서리까지 몇 개 슬쩍 가져갔다.머리에는 허설아가 일 년 전에 잃어버린 머리핀이 반짝이고 있었다. 허설아가 권지헌에게 앨범을 만들어 주려고 프린트한 사진 몇 장을 가져가는 것도 보였다. 그중에는 권지헌의 단독 사진도 있었고 허설아와 권지헌이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현서는 가위를 들더니 허설아를 잘라내고는 권지헌 옆에 자기 스티커 사진을 붙였다.허설아는 잠이 완전히 깼다.치가 떨리고 속이 뒤집히는 역겨움만 남았다. -정신이 팔려 대학 시절 일이 떠오르자 허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자 안초희의 음성 메시지가 와

  •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제25화

    허설아는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옷은 몸에 완전히 달라붙은 채 허설아는 초라한 모습으로 몸을 떨었다.지프차가 지하철역 입구에 멈춰 섰다. 허설아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운전석에 있던 남자는 급하게 재촉하듯 클락션을 몇 번 울렸다. 허설아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비바람을 뚫고 달려가 뒷좌석 문을 잡아당겼다.열리지 않았다.빗물이 차창 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권지헌이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된 허설아는 조수석 문을 잡아당겼다.문이 단번에 열렸다.허설아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뒷좌석 문 열어줄 수 있나요?"허설아는 조수석에 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권지헌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뒤에 앉겠다니 내가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좀 아니었다. 차에 탄 허설아는 온몸이 거의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가죽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허설아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나중에 세차비는 제가 드릴게요."권지헌은 서둘러 출발하지 않았다.옆에서 전에 유혜원이 차에 탔을 때 사놓고 미처 챙겨가지 못한 세안 티슈를 꺼내 허설아에게 건넸다.누가 봐도 여자 물건이었다.강지연이 권지헌의 차에 두고 간 것일까? 아니면 권지헌이 직접 준비한 것일까?권지헌은 세세하게 신경 쓰는 일이 거의 없는 직진남이었다. 예전에 허설아에게 립스틱을 선물할 때도 최악의 바비 핑크를 선물했었다.권지헌도 한 여자를 정말 사랑하면 이렇게 다정하게 차 안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허설아는 세안 티슈를 꼭 쥐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닦으며 씁쓸한 시선을 숨겼다. 권지헌이 차갑게 말했다."괜찮아. 월급도 얼마 안 되는데 그 돈은 딸 병원비로 써."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연동근은 눈을 감을 때까지도 예약 순서가 오지 않은 지프차를 그리워했었다. 허설아는 아직도 2, 3억이라는 가격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차의 사양은 권지헌의 차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