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노준서가 말을 꺼냈다. "지금 돌아온 거예요? 그럼 우리 형도 돌아왔겠네요. 아직 연락을 못 해봤어요.""저와 서진 씨가 먼저 왔어요. 천마시에 도착해서는 노 대표님과 가는 길이 달라서 언제 돌아오셨는지는 저도 몰라요. 궁금하면 노 대표님한테 직접 물어봐요.""그렇군요."오전에 노현우를 만나 함께 점심까지 먹었지만 굳이 노준서한테 얘기할 의무는 없었다.훤칠하고 시원시원한 이미지였지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많은 남자였다 법학과에 도착하자 노준서는 김지유의 지도 교수를 찾아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계단식 강의실에 앉아 있던 동기 강보라가 김지유를 놀리듯 말했다."준서 선배랑 같이 온 거야? 어머, 뭔가 있나 본데?""관심 없어, 건축과를 어찌 감히 건드리겠어." 건영대에는 예전부터 떠도는 속설이 있었다.건축학과와 토목학과에 바람둥이가 제일 많고 그다음이 경제학과라고 했다. 강보라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건축과가 진짜 별로긴 하지. 맨날 공사장 다니느라 정신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 치면 경제학과도 만만치 않잖아! 권율 그룹 권 대표님도 전에 경제학과 출신 아니었어? 전부 다 같은 부류라고 몰아가면 안 되지."권지헌은 건영대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건영대는 각계각층에 걸출한 동문들을 수도 없이 배출했는데 권지헌 같은 기업가가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사람은 권지헌 한 명뿐이었다.작년에는 모교에 200억을 기부하기도 했다. 허설아와 따로 각자 본인들의 학과에 기부해서 한동안 빈번하게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김지유가 책을 내려놓고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권 대표님이야 참 훌륭하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어. 대부분은 바람피우고 가정폭력 저지르고 이혼하면서 여자한테 공동 채무까지 떠넘기는 경제인들이 더 많아.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야.""그럼 넌 어떤 학과 남자가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데?""인문대랑 외대." 강보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찾았다. 일주일 전 밤에 설치된 작은 프로그램이야. 성능은 별거 없지만 전화 도청하는 데는 충분해."김지유는 한 손으로 의자를 짚은 채 동기가 컴퓨터를 조작해 휴대폰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손쉽게 찾아내는 걸 지켜보았다."일주일 전? 그때는 내가 철한선에 있을 때인데. 내 휴대폰 건드릴 만한 사람도 없었어." "오래 걸리지도 않아. 다른 사람한테 보조 배터리 빌려주거나, 다른 사람 충전 장비로 충전한 적 있는지 생각해봐. 충전 단자만으로 바로 설치할 수 있거든."김지유의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 스쳤다.충전.이 휴대폰을 마지막으로 충전한 건 민박집에서였다.그때 노준서가 휴대폰을 다시 가져다주었었다.하지만 바로 새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럼 그날 밤 민박집에서 충전하다가 해킹당한 건가?""그건 아닐 것 같아. 민박집에서 누가 손댔으면 돈부터 없어졌겠지. 누가 우리 같이 불쌍한 학생 손에 있는 가치도 없는 데이터를 탐내겠어?"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김지유가 계좌도 확인해 봤지만 돈은 한 푼도 줄지 않았다.동기가 김지유한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돈만 안 없어졌으면 됐어. 요즘 사기에 더 많이 쓰이는 수법이니까 밖에 나가면 절대 다른 사람한테 보조 배터리 빌려주거나 빌리지도 마.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정말 사기라도 당하려면 사기 방지 프로그램 수백 개 깔아도 소용없었다."데이터는 괜찮아?""괜찮아, 중요한 데이터는 다 내 USB에 있어서 휴대폰엔 백업 안 돼 있어."김지유는 감사의 의미로 동기한테 밀크티와 케이크를 사주고 휴대폰을 들고 컴퓨터공학과 건물을 나섰다.떠오르는 사람은 노준서뿐이었다.노준서가 대체 왜 휴대폰에 프로그램을 심어놓은 걸까?전공도 달라서 연구 자료를 가져가 봐야 아무 쓸모도 없을 텐데.전화 도청은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노준서와는 실질적인 관계라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 김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마주 걸어오는 노준서를 본
"영수증 처리 안 하면 미안해서 어떻게 비싼 거 먹어요?"안초희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럴 바엔 구내식당이 낫죠. 맞다, 지유 씨. 사촌 동생이 지유 씨네 옆 학교에서 대학원 다니는데 소개 좀 해줄까요?"김지유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초희 언니, 제발요.""왜요? 지유 씨 연애할 시간 없는 거 알지만 알고 지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어릴 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게 좋아요. 친구 사귄다 생각해요." 김지유가 피식 웃으며 안초희의 속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집에서 내기하다 진 거죠? 저 이용하려고요?" 안초희는 김지유의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하고 불쌍한 척했다."사촌 동생 조건 진짜 괜찮아요. 우리 집 형편이 좀 괜찮다는 거 지유 씨도 알잖아요! 지유 씨, 내가 절대 손해 보게 안 할게요."하지만 김지유는 넘어가지 않았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제가 더더욱 발목 잡아선 안 되죠. 친구로 만났는데 저한테 반해버리면 어떡해요?"김지유가 안초희를 끌어안으며 일부러 한숨을 푹 쉬었다."저도 나름 얼굴이 반반한 데다 거절하는 데 시간 낭비하기도 싫고요. 그럼 그땐 어떡해요?"안초희는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냥 우리 팀 인턴한테 물어봐야겠네요."마케팅팀에 야근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몇 개 남아 있었기에 안초희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노현우가 김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인기가 많네요.""예전에 마케팅팀 동료들이 저를 잘 챙겨줘서 그래요."노현우가 밥을 한 숟가락 뜨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집안 좋은 맞선 상대까지 소개해줄 정도면 정말 잘 챙겨주네요."김지유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노 대표님, 놀리지 마세요. 저 당분간 그쪽으론 생각 없어요.""눈이 높아요?""그런 건 아니고, 예를 들면……" 고개를 들어 눈앞의 노현우를 바라보던 김지유는 저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노 대표님 같은 사람이면 생각해 볼 만하죠."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
다음 날.권율 그룹 산하, 비룡 주얼리 그룹.김지유는 안내데스크에서 출입증을 찍고 신분증을 제시했다.안내데스크 직원이 확인한 뒤 신분증을 돌려주며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웃었다."김지유 씨, 노 대표님께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노 대표님 돌아오셨어요?""아침에 막 도착하셨어요. 저 따라오세요,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해 드릴게요."안내데스크 직원이 카드를 찍고 김지유를 안내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고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문이 열린 대표 사무실 안에서 노현우와 권지혁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처음부터 권지헌은 권지혁에게 노현우한테서 많이 배우라고 일러두었다.권지혁이 능력만 있으면 앞으로 비룡 주얼리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이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노현우가 이 자리를 계속 지킬 것이다. 권지혁은 노현우를 유달리 깍듯하게 대했다.김지유가 문을 두드렸다."노 대표님, 권 대표님. 방해되는 거 아니죠?""지유 씨 왔어요?" 권지혁이 벌떡 일어나 김지유한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서진이는 어디 갔어요? 서진이가 직접 시안 가져오는 줄 알고 특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강성시에 유금각 만나러 갔어요. 이번 시안은 비룡과 유금각 둘 다 동시에 전달했으니까 누가 더 빠른지는 대표님 하기 나름이에요!"곧바로 자세를 바로 잡고는 김지유가 들고 있던 시안을 받아 들여다보던 권지혁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역시 우리 서진이답네요. 디자인이 진짜 느낌 있어요!"김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권지혁은 권서진 칭찬이라면 입이 마를 정도로 쏟아냈다.노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권지혁을 먼저 내보내려 했다."디자인 도면은 오는 길에 이미 확인했어요. 권 대표님이 바로 공장에 가져가서 우선 시제품 한 세트 만들라고 하세요. 공법 요구 사항도 디테일하게 다 적혀있어요."권지혁은 유금각보다 늦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김지유가 짐을 챙기며 말했다. "시안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갈게요, 이따 학교 가서 수업도 들어야 해서요."
노현우가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데리러 온 사람 왔으니 저는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건영시에서 봬요."양준우가 노현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에서 헤어진 뒤, 양준우는 시안 작업 중인 권서진 곁을 지켰고 김지유는 혼자 관광을 떠났다.팔보 골목 구경을 마친 그때, 김지유 휴대폰에 친구 신청 알림이 도착했다. 검은색 프로필 사진에 닉네임은 X, 메모란에는 노현우라고 적혀 있었다.이름은 "현우"인데 프로필 사진은 검은색 사진이었다. 김지유는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며칠이 지난 뒤, 권서진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왔다.권서진은 허설아 책상 위에 두툼한 새 디자인 시안을 툭 던져놓았다. 허설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수확이 꽤 많았나 보네요.""당연하죠, 이번에 다녀오면서 2.5키로나 빠졌어요! 노 대표님은 아직 거기서 계약 얘기 중이고 준우 씨는 옛 전우 만나러 가서 나와 지유 씨가 먼저 돌아왔어요.""왜 준우 씨와 같이 안 갔어요?"권서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 보고 싶어서 먼저 돌아온 거 아니겠어요?"허설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서진이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더니 사무실 고양이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쓰다듬었다."저도 갔죠, 밥도 한 끼 먹었고요. 그런데 해발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노현우는 그룹 관련 업무가 많이 남아 있어서 천마시에 도착한 뒤로는 동행하지 않았다.천마시에서 이틀을 지낸 뒤, 권서진과 김지유는 먼저 돌아왔다.디자인 시안에는 천마 지역 스타일 요소가 잔뜩 담겨 있었다.터키석, 마노, 마니차, 나침반 등이었다. 허설아가 시안을 넘겨보니 한 장 한 장 디자인이 하나같이 정교하고 뛰어났다.권서진은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실력도 계속 늘고 있었다.뒤에는 권서진이 천마 지역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천마족 전통 복장을 입은 몇몇 아이들이 손목에 권서진이 디자인한 팔찌를 세 겹으로 하고 있었다. 허설아는 놀랍게도 사진에서 신앙의 힘을 보아냈다.
밖에 잠깐 더 앉아 있으니 밤이라 기온이 확 낮아졌다. 노현우가 일어나 불을 끄러 가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있어요."밤에는 네 사람이 텐트 하나에서 지내기로 했다. 각자 이불을 따로 덮어 방해되지도 않고 서로 챙겨주기도 편했다.김지유는 제 자리에 서서 손을 비비며 몸을 녹였다."기다릴게요."지금 들어가 봐야 권서진과 양준우 애정 행각이나 보겠지. 김지유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노현우가 빠르게 불을 끄고 화로를 돌려주고 돌아오자 김지유는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숄을 두르고 있었지만 바깥 기온이 워낙 낮아서인지 손을 비비고 발을 굴러도 여전히 추위를 견디기 힘든 눈치였다.노현우가 김지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안 들어가요?"김지유가 손을 뻗어 양쪽 엄지손가락을 맞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애정 행각하는 거 보러 들어가라고요?"하지만 화로는 이미 돌려준 뒤라 두 사람 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 몸을 녹일 방법이 없었다.노현우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안고 있을까요?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냥 체온 나누자는 뜻이에요."노현우가 입은 검은색 롱패딩은 확실히 김지유의 코트보다는 훨씬 따뜻해 보였다.김지유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노현우한테서는 시원한 우디 향이 났는데 향수 냄새인지 아니면 천마족 텐트 안에서 배어든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못하겠어요?""누가 못한대요!"김지유는 마음을 굳게 먹고 노현우를 끌어안았다.두 사람이 서로 맞붙자 확실히 훨씬 따뜻해졌다.다만 이렇게 서로 안고 있으려니, 두 사람 다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노현우가 김지유의 숄을 다시 정리해 거의 누에고치처럼 온몸을 감싸주고 나서야 조심스레 김지유를 안았다.남자 체온은 원래 여자보다 높은 편이었다.노현우를 안고 있으니 마치 난로를 끌어안은 것 같아서, 얼어붙었던 김지유의 손에도 감각이 돌아왔다.노현우가 김지유를 반쯤 감싸안았다.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