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이준.
꺼진 줄 알았던 이름이 화면 위에 다시 떠 있었다.
서하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수술 직전까지 남아 있던 부재중 전화와는 시간이 달랐다. 새 기록은 수술실에 들어간 뒤 찍혀 있었다.
오전 11시 42분.
그 시간에 자신은 가슴이 열려 있었고, 오래 버티던 심장은 몸 밖으로 떠나고 있었다.
“휴대폰 오래 보시면 안 돼요.”
간호사가 다가오자 서하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물었다.
“이 시간에 전화 온 거 맞죠?”
“통화 기록이면 그렇겠죠. 지금은 쉬셔야 해요.”
“제가 수술 중이었는데요.”
간호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서하는 화면이 어두워진 뒤에도 그 자리를 바라봤다.
가슴 안에서는 새 심장이 일정하게 뛰었다.
하나, 둘, 셋.
박동을 세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열둘.
열셋.
열넷.
그런데 스무 번도 넘기기 전에 이준의 이름이 다시 끼어들었다.
사고.
경찰.
봉투.
그리고 같은 날 자신에게 들어온 심장.
서하는 눈을 감았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사고로 뇌사한 성인은 이준 하나가 아니었고, 그중 누군가의 심장이 자신에게 배정됐을 뿐이었다.
이준 역시 사고를 당했다는 말밖에는 듣지 못했다.
죽었다는 말도 없었다.
장기기증을 했다는 말은 더더욱.
그런데 생각은 자꾸 빈칸을 제멋대로 채우려 했다.
“윤서하 씨.”
오민재가 회진표를 들고 들어왔다.
서하는 바로 물었다.
“기증자 사고가 언제였어요?”
민재의 손이 멈췄다.
“말씀드릴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날짜도 안 돼요?”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됩니다.”
“그럼 제가 알아낸 건요?”
“알아낸 것과 병원이 확인해드리는 건 다릅니다.”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로 뇌사한 성인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거죠?”
“네.”
“남자인지도 모르고.”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지금 확인하려 하지 마세요.”
“왜요?”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 의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회복하는 동안 더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서하는 가슴 위 드레싱을 내려다봤다.
“전 이미 의미를 붙였나 봐요.”
민재는 그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면역억제제 투여 시간을 확인한 뒤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간호사가 침대 상체를 조금 세워주자 가슴 중앙이 잡아당겨졌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고, 곧 호흡을 돕는 기구를 입에 물었다.
한 번 깊게 들이마시는 일조차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씀하세요.”
“몇 점이면 참는 거고 몇 점이면 말해야 해요?”
“지금 느끼는 그대로요.”
서하는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살아남고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약이 들어가면서 몸은 조금 느슨해졌으나 박동만은 선명했다. 가슴을 받친 채 기침을 한 번 하자 눈앞이 희어졌고, 서하는 유리문 밖의 미경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돌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이런 일을 해야 했다.
숨을 쉬고, 약을 받고, 아프다고 말하고, 다음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사실이 억울하면서도 조금은 현실 같았다.
문밖에서 미경이 들어왔다. 보호복을 갖춰 입은 채 침대 곁에 선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눈이 부어 있었다.
“어때?”
“살아 있나 봐.”
“그런 말 좀 하지 마.”
“엄마.”
미경이 물병에 빨대를 꽂다가 멈췄다.
“이준 씨 사고, 언제 났어?”
“지금 그 얘기 꼭 해야 해?”
“알고 있잖아.”
“경찰한테 들은 게 전부야.”
“뭘 들었는데?”
미경은 빨대 끝을 만지작거렸다.
“교통사고였고, 상태가 안 좋다고.”
“언제?”
“서하야.”
“날짜만.”
미경이 한동안 입을 다문 뒤 말했다.
“며칠 전.”
서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가슴이 당겼고, 새 심장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규칙을 지켰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네가 그 소리 듣고 수술 포기할까 봐.”
“그 사람이랑 내 수술이 무슨 상관인데.”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끝부분이 흔들렸다.
미경도 들었는지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상관없는 일로 만들어.”
서하는 웃지 못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부탁이었다.
잠깐 뒤 재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작업대는 내가 정리했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서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괜찮아’라고 쓰기엔 전혀 괜찮지 않았고, ‘살아 있어’라고 쓰려니 그 말도 낯설었다.
결국 엄지손가락 하나짜리 이모티콘만 보냈다.
전송 표시가 뜨는 동안 가슴 안에서 또 한 번 박동이 밀려왔다.
오후가 지나면서 약 기운이 다시 몰려왔다. 잠깐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고, 눈을 뜰 때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박동을 세는 것이었다.
하나, 둘.
살아 있다.
셋, 넷.
누군가는 죽었다.
다섯.
이준은 어디에 있을까.
밤이 가까워졌을 무렵 간호사가 휴대폰 충전선을 연결해줬다.
“십 분만 보세요.”
서하는 화면을 켠 뒤 다른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통화 기록부터 열었다.
강이준.
오전 11시 42분.
부재중 전화.
서하는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다 상세 기록을 눌렀다.
통화 시각 아래, 아까는 보지 못했던 표시 하나가 떠 있었다.
음성메시지 1개.
서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로 아래에 재생 버튼이 있었다.
만남 날짜가 정해진 건 이틀 뒤였다.오후 3시.해온대학교병원 본관 7층 기증자 가족 중재실.윤서하는 안내 문자를 받은 뒤에도 한동안 날짜만 들여다봤다.장소가 생기고 시간이 정해지자 갑자기 모든 것이 현실이 됐다.이제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었다.가야 했다.그 문을 열면 지금까지 익명으로 존재했던 사람이 맞은편에 앉는다.그리고 어쩌면.강이준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추측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다.서하는 강태경에게 날짜를 알렸다.[다음 주 수요일에 만나기로 했어요.]전화가 바로 걸려왔다.“같이 갈까요?”“아뇨.”“혼자 괜찮겠습니까?”“형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태경이 잠시 말이 없었다.“왜요?”“상대가 누군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그런데 형이 나타나면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가는 것 같아서.”“알겠습니다.”“하린 씨한테도 말하지 마세요.”“그럴게요.”서하는 통화를 끊고 정하린과의 대화창도 열었다가 닫았다.누구도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태경도.하린도.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표정을 먼저 보고 싶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만나고, 직접 들어야 했다.약속 당일.서하는 예정 시각보다 40분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7층으로 올라가기 전 1층 카페에 앉아 물만 조금씩 마셨다.휴대폰 화면에는 메모가 열려 있었다.확인할 것.기증자의 이름.가족이 알고 있는 기증 과정.편지를 쓴 이유.심장이 누구에게 갔는지 가족이 알고 있는 범위.적어놓고 보니 전부 질문 같지 않았다.답을 얻기 위한 장치 같았다.서하는 마지막 줄을 지웠다.그리고 새로 적었다.상대가 말하고 싶은 것부터 듣기.시간이 가까워지자 7층으로 올라갔다.지원 창구 담당자가 먼저 나와 있었다.“윤서하 님 맞으시죠?”“네.”“상대 가족도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별도 대기실에 계세요.”심장이 세게 뛰었다.서하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췄다.“혹시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어요?”“네.”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상대방이 이미 와 있어도요?”“
“상대 가족도 최종적으로 만남에 동의했습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윤서하는 한동안 길가에 서 있었다.기뻐해야 하는지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상대가 동의했다.그 사실만 확인됐을 뿐인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강이준의 이름이 떠올랐다.서하는 곧바로 병원에 다시 전화했다.“아까 연락받은 윤서하인데요.”“네.”“최종 동의했다는 게 정확히 어디까지예요?”담당자가 기록을 확인했다.“직접 만남 절차를 진행하는 데 동의하셨다는 의미입니다.”“신원 공개도요?”“그건 아닙니다.”서하의 손가락이 가방끈을 놓았다.“그럼 아직 누군지는 모르는 거네요.”“네. 만남 진행과 신원 공개 범위는 별도로 다뤄집니다.”“가족도 제 이름 모르고요?”“현재 단계에서는 그렇습니다.”서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또 앞질러 갔다.상대가 만나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준의 가족이 자신을 만나겠다고 한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날짜는 정해졌어요?”“조율해서 다시 안내드리겠습니다.”“장소는요?”“그것도 함께 안내드릴 예정입니다.”서하는 더 묻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휴대폰 메모를 열었다.확인된 것 — 상대 가족이 만남 절차에 동의함.확인되지 않은 것 — 신원. 기증자와 강이준의 동일성.그 아래 한 줄을 추가했다.기대와 사실 분리.다음 날 아침, 서하는 평소 시간에 복원실로 출근했다.작업대에는 전날 마무리하지 못한 고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찢어진 부분을 보강한 종이는 밤새 안정돼 있었고, 눌러둔 자리를 풀자 형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재훈이 옆에서 확인했다.“괜찮네.”“응.”“오늘은 다음 장?”“그 전에 이쪽부터.”서하는 붓을 들었다.손상된 부분을 확대해 보고, 보강지를 얇게 잘랐다.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조각을 맞추고.풀을 바르고.눌렀다가 기다리고.마르면 다시 확인하는 것.몇 시간 동안 그 순서만 반복했다.휴대폰은 작업대에서 멀리 두었다.병원 연락을 기다리는 건 맞았지만, 5분마다 화면을 확인한다
동의서에 서명한 다음 날부터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상대 가족이 최종적으로 만남에 동의할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윤서하는 병원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휴대폰부터 확인했고, 모르는 번호가 뜨면 손끝이 먼저 굳었다.하지만 이틀 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다.셋째 날 아침, 서하는 복원실로 출근했다.오랜만에 앉은 작업대 위에는 자신이 비운 동안 밀린 자료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서재훈이 장갑 한 상자를 옆에 놓았다.“오늘부터 제대로 하는 거지?”“응.”“힘들면 바로 말하고.”“알았어.”재훈은 더 묻지 않았다.서하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뒤 자리에 앉았다.첫 작업은 오래된 고서 한 권이었다.본문 가운데 몇 장이 찢어져 있었고, 종이 가장자리는 손만 잘못 대도 더 갈라질 만큼 약해져 있었다.서하는 확대경 아래에 책장을 펼쳤다.찢어진 단면을 맞추고, 결을 확인했다.조금 어긋난 두 조각을 다시 떼어 위치를 조정했다.억지로 맞추면 흔적만 더 커졌다.손상된 종이는 손상되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할 수 있는 건 더 망가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일이었다.서하는 얇은 보강지를 잘라 찢어진 부분 아래에 받쳤다.집중해야 했다.손끝이 몇 밀리미터만 빗나가도 안 됐다.한 장.다음 장.또 한 장.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재훈이 옆에서 말했다.“밥 안 먹어?”서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벌써?”“1시 다 돼가.”휴대폰을 확인했다.부재중 전화는 없었다.병원 메시지도 없었다.서하는 약부터 챙겨 먹었다.예전 같으면 연락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릿속이 온통 상대 가족에게 가 있었을 것이다.누굴까.정말 이준의 가족일까.만나면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다시 작업대로 돌아오자 찢어진 책장이 먼저 보였다.오후에는 시간이 더 빨리 흘렀다.풀의 농도를 맞추고, 들뜬 부분을 눌렀다가 떼고, 수분이 빠지는 정도를 확인했다.재훈과는 작업 얘기만 했다.“여기 너무 당기지 않았어
윤서하는 병원에서 받은 안내문을 밤새 세 번 읽었다.기증자 가족·수혜자 상호 만남 요청 안내.제목은 단순했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문장이 많아졌다.익명 유지.개인정보 보호.신원 공개 범위 선택.쌍방 동의.한쪽이 중간에 철회하면 절차 종료.서하는 마지막 항목에서 오래 멈췄다.상대방에 대한 신원 확인 요청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진행되지 않음.자신은 몇 달 동안 기증자의 흔적을 쫓았다.편지의 문장 하나를 붙잡았고, 사진을 좋아했다는 말에 강이준을 떠올렸으며, 비가 오면 카메라부터 감쌌다는 습관까지 확인했다.그때는 진실을 아는 일이 자신의 권리처럼 느껴졌다.이 심장을 받아 살고 있으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상대에게도 숨길 권리가 있었다.누군가를 잃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이름과 얼굴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다음 날 윤서하는 다시 지원 창구를 찾아갔다.담당자가 서류를 꺼냈다.“결정하셨나요?”“아직요.”서하는 의자에 앉았다.“제가 만남을 신청하면 상대 가족 이름을 바로 알게 되는 건 아니죠?”“네. 먼저 양쪽 의사를 확인합니다.”“상대가 동의하면요?”“그다음에도 공개 범위는 따로 정합니다.”“이름만 알 수도 있고, 직접 만날 수도 있고?”“작품 내 절차상 그렇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각각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진행됩니다.”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병원에서 정한 절차는 분명했다.한쪽이 알고 싶다고 다른 쪽의 삶을 열어볼 수 없었다.“제가 특정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상관없어요?”“추측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죠.”“그 이름을 적으면요?”“그 이름이 맞는지 확인해드리지 않습니다.”“상대 가족에게도 제가 추측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고요?”“네.”서하는 손가락으로 안내문 모서리를 눌렀다.“그럼 만나는 날까지도 모를 수 있겠네요.”“그럴 수 있습니다.”“직접 만나고도요?”“양쪽이 신원 공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합니다.”이상한 일이었다.몇 달 전의 자신이라면 답답해
당신도 원한다면요.윤서하는 세 번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바로 답장을 쓰지는 않았다.기증자 가족이 직접 만나고 싶다는 뜻처럼 보였지만,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서하는 다음 날 병원의 기증자 가족 지원 창구를 찾았다.담당자는 편지를 확인한 뒤 말했다.“가족 측에서 만남 가능성을 먼저 열어둔 건 맞습니다.”“그럼 만나겠다고 한 거예요?”“아직 그렇게 확정해서 보시면 안 됩니다.”서하가 편지를 내려다봤다.“직접 만나고 싶다면 절차를 밟겠다고 썼는데요.”“수혜자가 원할 경우 정식 절차를 검토하겠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로 신원을 공개하거나 연락처를 전달하는 방식은 아닙니다.”“그럼 지금도 누군지는 못 알고요?”“네.”“저쪽은 제가 누군지 알아요?”“아닙니다.”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또 선이 있었다.편지가 세 번 오갔다고 해서 상대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가족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문장조차 그 선을 없애지는 못했다.“하나만 더 물어볼게요.”“말씀하세요.”“이 편지를 쓴 가족이 누구의 가족인지 제가 추측하고 있어도, 병원에서는 확인 안 해주는 거죠?”“그렇습니다.”“제가 이름을 말해도?”“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습니다.”서하는 준비했던 이름을 삼켰다.강이준.입 밖으로 꺼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이름이었다.병원을 나온 뒤 서하는 복원실로 가지 않고 근처 카페에 앉았다.가방에는 세 번째 편지가 있었고, 휴대폰에는 그 사진이 저장돼 있었다.가슴 위를 지나가던 빛.서하는 사진을 다시 열었다.처음 봤을 때는 운명 같았다.아주 오래전의 이준이 자신도 모르게 미래를 찍어둔 것처럼.하지만 같은 필름 전체를 확인한 뒤에는 알고 있었다.앞 사진의 빛은 어깨에 있었고, 뒤 사진에서는 가슴 아래로 내려갔다.단지 몇 초의 이동.그중 한 장이 지금의 흉터와 겹쳤을 뿐이었다.서하는 사진 아래 메모장에 적었다.사진은 과거의 기록이지 미래의 예언이 아니다.한 줄을 더 썼다.심장은 기
사진 한 장이 자꾸 사람을 속였다.윤서하는 책상 위에 올려둔 인화 사진을 몇 번이나 뒤집었다가 다시 펼쳤다.창가에 서 있는 과거의 자신.가슴 한쪽을 비껴 지나가는 빛.지금 수술 흉터가 남은 자리와 거의 겹치는 위치.그것만 떼어놓고 보면 지나치게 절묘했다.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강이준이 그 자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언젠가 자신의 심장이 멈추고, 다른 심장을 받아 살아남을 사람이라는 걸 사진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처럼.서하는 손끝으로 사진 모서리를 눌렀다.“미쳤네.”입 밖으로 나온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사진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같은 필름의 콘택트시트까지 확인했다.바로 앞 사진에서는 빛이 어깨에 있었고, 다음 사진에서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그 몇 초 사이 단 한 장.그 사진에서만 빛이 가슴 위에 머물렀다.증거는 오히려 명확했다.우연이었다.그런데 사람은 우연보다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서하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자꾸 한 문장을 만들고 싶어졌다.그때부터 이미 이어져 있었던 거야.그러고 나면 곧바로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이준의 심장이 정말 자신의 몸 안에 있다면, 이 사진도 무언가의 예고였던 건 아닐까.서하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그 순간 문이 열렸다.서재훈이 종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이거 어디 둘까?”대답이 없자 재훈이 책상 쪽을 봤다.사진을 발견했지만 묻지 않았다.서하는 그 침묵이 오히려 거슬렸다.“왜 아무 말도 안 해.”“뭘.”“사진.”재훈이 가까이 와서 다시 봤다.“어제 보여준 거네.”“이상하지 않아?”“뭐가.”“여기.”서하는 사진 속 자신의 가슴 부분을 가리켰다.“내 흉터 자리랑 겹쳐.”재훈은 몇 초 보더니 말했다.“그러네.”그게 전부였다.서하가 헛웃음을 냈다.“너는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들어?”“무슨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운명 같다거나.”재훈이 서하를 바라봤다.“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보이겠지.”그 말에 가슴이 찔렸다.“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