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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불의 계승자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0 12:29:58

바람이 불었다.

거제의 새벽은 파도도 잠든 듯 고요했다.

그 고요 속에서, 수진은 손에 쥔 라이터를 천천히 켰다.

불꽃은 작고 약했지만, 그 불은 오래된 시간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照明, 빛을 잇는 사람…”

그 단어는 오랫동안 그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이름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과거를 지우려 했고, 그녀는 자신을 꽃으로,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감추었다.

하지만 이제, 그 감춤이 무너지고 있었다.

라이터 불빛에 그녀의 눈이 반사되었다.

그건 복수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결심이었다.

“이제… 나도, 누군가의 불이 돼야 해.”

그녀는 훈련소를 뒤로했다.

오래된 철문을 밀자, 먼지가 날렸다.

그 먼지 속으로 들어오는 새벽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울, 남영동. 강혁은 복도 끝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 맺힌 물방울들이 하나둘 흘러내렸다.

그는 손에 쥔 사진을 바라봤다.

수민과 수진. 그가 알았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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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3. 사랑이 진실이 된 새벽

    불길은 생각보다 오래 타올랐다.창고의 철골은 녹아내렸고,바다 쪽으로 피어오른 연기는 마치 한 시대의 마지막처럼 하늘을 뒤덮었다.강혁은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뛰어들었다.연기 속에서 시야가 번졌다.그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수진! 자오밍!”대답은 없었다.대신, 불길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 하나.그녀의 목걸이가 녹은 쇳조각 위에 걸려 있었다.‘S’가 새겨진, 수민의 이니셜이었다.그는 무릎을 꿇었다.바닥의 열기가 손바닥을 태웠다.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재 속에서 무언가를 찾았다.그녀가 남긴 USB였다.그는 그것을 품에 넣고, 다시 일어섰다.“살아있어야 해… 제발…”그의 목소리는 연기에 섞여 사라졌다.밖으로 나왔을 때, 소방차와 경찰차의 사이렌이 뒤섞여 있었다.그의 귓가로는 사람들의 함성보다 더 큰,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렸다.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그 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언가가 태어나고 있었다.서울, 국정원 임시지휘본부. 서여진은 심문실 안에 앉아 있었다.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문이 열렸다.배신구가 들어왔다.“서 요원, 당신답지 않군.”“그쪽답지는 않네요. 직접 오다니.”“넌 너무 감정에 휘둘렸어. 그게 네 실수야.”“감정이 없다면, 당신 같은 괴물이 되겠죠.”그녀는 피식 웃었다.“린자오밍이 죽었다는 보고, 받으셨죠?”그는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죽음이란 건… 증거가 있을 때만 유효하지.”“역시, 아직도 두려운가 봐요.”“누가?”“그 여자요. 당신이 만든 괴물.”배신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녀는 실패작이야.”“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죠?”“…….”“혹시, 당신도 그 여자를 사랑했나요?”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그녀의 손등에 떨어진 물방울이 떨렸다.“사랑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국장님. 그걸 몰라서 당신은 평생 괴물이었죠.”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귀 옆에 속삭였다.“린자오밍은 불꽃이었지.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2. 불의 계승자

    바람이 불었다.거제의 새벽은 파도도 잠든 듯 고요했다.그 고요 속에서, 수진은 손에 쥔 라이터를 천천히 켰다.불꽃은 작고 약했지만, 그 불은 오래된 시간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그녀는 중얼거렸다.“照明, 빛을 잇는 사람…”그 단어는 오랫동안 그녀 안에서 잠들어 있던 이름이었다.누군가가 그녀의 과거를 지우려 했고, 그녀는 자신을 꽃으로,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감추었다.하지만 이제, 그 감춤이 무너지고 있었다.라이터 불빛에 그녀의 눈이 반사되었다.그건 복수의 눈빛이 아니었다.그건, 결심이었다.“이제… 나도, 누군가의 불이 돼야 해.”그녀는 훈련소를 뒤로했다.오래된 철문을 밀자, 먼지가 날렸다.그 먼지 속으로 들어오는 새벽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서울, 남영동. 강혁은 복도 끝 창문 앞에 서 있었다.비가 내리고 있었다.창문에 맺힌 물방울들이 하나둘 흘러내렸다.그는 손에 쥔 사진을 바라봤다.수민과 수진. 그가 알았던 두 사람, 그가 잃은 두 생명.하지만 이제 그 사진 속 웃음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었다.그건 사건의 시작이었다.그의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이젠, 선택해야 할 때예요.”여진이었다.그녀의 얼굴엔 피로와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무엇을.”“당신이 믿는 게 정의인지 그녀가 믿는 게 진실인지.”그는 고개를 들었다.“그게 다르다면?”“그럼, 세상이 잘못된 거죠.”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배신구가 움직이고 있어요. 흑거미랑 연결된 내부 라인을 통해 뭔가 운반 중이에요. 아마 ‘照明’ 프로젝트의 원본.”그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걸 찾아야겠군.”“그래서 연락했어요.”“누구에게?”“린자오밍.”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이름이 다시 입에 오르는 순간 공기까지 떨리는 듯했다.“그녀가 받아들였어요.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밤, 부산의 낡은 선착장. 빛이 거의 없는 곳.파도에 젖은 나무 계단 아래 수진이 서 있었다.그녀의 어깨 위엔 작은 비가 내리고 있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1. 가짜 기억 속의 진짜 심장

    거제 앞바다의 밤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바람조차 방향을 잃은 듯 멈춰 있었고,수진은 배에서 내리며 손에 쥔 라이터를 바라봤다.그건 오래전 연변의 훈련소에서 흑거미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첫 물건이었다.“불은 기억이다. 잊지 말거라.”그 말이 다시 귓속에 맴돌았다.그녀는 눈을 감았다.그날의 냄새가 되살아났다.훈련소의 축축한 흙, 피 섞인 연기,그리고 어린 자신이 울음을 삼키던 소리.‘그때의 나로 돌아가야 해.’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 그 훈련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철문은 녹슬었고, 벽엔 칠이 벗겨져 있었다.그러나 문틈 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그때와 똑같은 냄새였다.그녀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텅 빈 공간 안, 한쪽 벽에 누군가가 남긴 낙서가 있었다.“照明, 절대 잊지 말 것.”그녀의 심장이 멈칫했다.照明. 그건 그녀의 이름이었다.린자오밍. 그녀가 잃어버린 자신이었다.서울, 남영동. 강혁은 국정원 기록보관실에 있었다.불빛 하나 없는 좁은 방 안, 먼지 쌓인 서류들 사이를 뒤지고 있었다.그의 손끝이 닿은 파일 하나. 표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프로젝트 照明 - 실험체 #02 김수진’그는 숨을 멈췄다. 손끝이 떨렸다.안쪽 페이지를 펼치자 그녀의 사진이 있었다.17살의 수진. 눈빛은 차갑고, 표정은 비어 있었다.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음성 유도 실험 결과: 被験者 김수진 - 심리 저항도 94%, 기억 재편성 성공률 87%.'‘기억 재편성…?’그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인생이, 그녀의 이름이 실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서서히 그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 흩어졌다.바로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그 파일, 읽을 자격이 있나?”그는 고개를 돌렸다.배신구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당신이 한 짓이냐.”“그렇다.”“왜.”“국가는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10. 흑거미의 목소리

    새벽이 지나고도 바다는 여전히 잿빛이었다.수진은 조타실 한켠에 앉아 있었다.라디오를 꺼버렸는데도, 귀 안에는 여전히 그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린자오밍, 넌 아직 끝나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귓가를 막았다.하지만 그 소리는 머릿속 안쪽에서 반복됐다.누군가가 귓속에 대고 속삭이듯, 그녀의 기억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흑거미… 당신은 대체 뭐예요.”그녀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짙은 안개 사이, 바다가 잠들어 있었다.잔물결 사이에 검은 비닐 조각 하나가 떠다녔다.그건 언뜻 보면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였다.그녀는 손끝을 떨며 속삭였다.“이제 그만 끝내야지.”서울 남영동. 국정원 내부 브리핑룸. 강혁은 서류철을 내려놓았다.그 안엔 오래된 작전 보고서가 한 장 들어 있었다.'캄보디아 작전 / 코드명: 흑거미'그는 보고서를 훑었다.서명란에는 “배신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 밑엔 수민의 이름도 있었다.“……수민?”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페이지를 넘기자, 붉은 도장으로 ‘임무 중 사망’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그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끝에서 종이가 구겨졌다.그 순간, 뒷문이 열렸다.서여진이 조용히 들어왔다.얼굴엔 피로가, 손엔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그 파일, 당신도 봤군요.”“이게 뭐야, 여진 씨.”“진실이에요.”“이건 조작된 보고서야.”“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이 아는 게 거짓일지도 몰라요.”그녀는 테이블 위에 또 다른 문서를 올려놨다.“‘흑거미 프로젝트’. 그건 단순한 범죄조직이 아니었어요. 국정원 내부에서 만든 실험이었어요.”“무슨 소리야.”“목소리, 심리 조작, 피싱 기술… 사람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을 연구한 거예요. 그 실험체가 바로 린자오밍.”강혁의 눈이 커졌다.“그럴 리가…”“수민 언니가 그걸 알아챘어요. 그래서 배신구를 폭로하려 했고… 죽었죠.”공기 속이 얼었다.그녀는 낮게 속삭였다.“린자오밍은 피해자예요, 강혁 씨. 그 여자는 악인이 아니라, 당신 대신 살아남은 사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9. 바다에 새겨진 피의 냄새

    바다에 안개가 내려앉았다.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며, 바위 틈새에서 하얀 거품이 터졌다.새벽빛은 잿빛이었다.해가 뜨지 않은 하늘은 구름으로 눌려 있었고, 바다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잔잔하게 움직였다.강혁은 오래된 낚싯배 위에서 무전기를 켰다.“여보세요, 해남 해경인가요. 혹시 어제 새벽 시간대, 작은 여객선이 통과한 기록 있습니까?”노이즈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있긴 합니다만, 확인하려면 정식 조회가 필요합니다.”“그 배 이름이 뭐였죠?”“남해 27호요. 부산항으로 향했어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혁은 모터를 걸었다.바다가 낮은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항구로 향하는 길.그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이름만이 맴돌았다.린자오밍.그 이름이 입에 닿을 때마다,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식어갔다.사랑이었다가, 분노였다가, 이제는 단지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그는 속삭였다.“왜 하필… 나였을까.”바람이 얼굴을 스쳤다.그 바람 속엔 여전히 꽃 냄새가 묻어 있었다.부산항의 아침은 붐볐다.화물선이 짐을 내리고, 사람들은 검은 커피를 손에 들고 각자의 길을 갔다.그 틈에, 강혁은 낯선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항구 창고 뒤편, 검은 모자를 쓴 여자의 실루엣.그녀의 몸짓은 수진과 닮아 있었다.그는 숨을 멈췄다.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수진…”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심장이 미묘하게 멈췄다.그건 수진이 아니었다.비슷한 체형, 비슷한 머리결,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그 여자가 피식 웃었다.“그 이름, 이제 입에 올리지 말아요.”“당신은 누구지?”“그 여자의 흔적이에요.”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남겨진 건 작은 쪽지 한 장.“찾고 싶다면, 바다의 끝을 봐요.”그 문장은 마치 암호 같았다.강혁은 쪽지를 주먹에 쥐었다.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 시각, 서울 남영동. 국정원 본부 8층.서여진은 조사실 안에 앉아 있었다.조명은 밝았고, 공기는 냉랭했다.맞은편엔 배신구 국장이 앉아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8. 불 꺼진 꽃집

    비가 그친 새벽이었다.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젖은 흙 냄새와 눅눅한 라벤더 향뿐이었다.해가 뜨기도 전에, 강혁은 린꽃방 앞에 서 있었다.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간판 아래 조명은 꺼져 있었다.유리문을 손바닥으로 밀어보았다.잠금 장치는 걸린 채였지만, 안쪽의 공기는 이미 오래 비워진 듯 차가웠다.“수진 씨…”그의 목소리가 유리문에 부딪혀 되돌아왔다.바람에 실린 라벤더 냄새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가게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리되어 있었다.테이블 위엔 반쯤 시든 백합이 있었다.물컵엔 물이 반쯤 차 있었고, 그 옆엔 접히다 만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꽃은 시들어도 향은 남아요.”그 아래, 익숙한 필체로 린자오밍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는 손끝으로 종이를 만졌다.잉크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아, 조심히 닿은 손끝에 파란 흔적이 묻었다.“…….”숨이 막혔다.그녀가 떠났다는 건 알았다.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떠날 줄은 몰랐다.가게 안의 공기는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흔적은 지독할 만큼 남아 있었다.꽃가위가 기울어진 채로 있었고,작은 라디오엔 건전지가 다한 듯 희미한 잡음만 흘렀다.그는 무릎을 꿇었다.바닥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손바닥 위에서 부서지는 꽃잎은 그녀의 마지막 인사처럼 가벼웠다.‘왜… 아무 말 없이…’머릿속에 울리는 건 어젯밤 그녀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이 바다가 우리 둘 다 삼켜버릴 거예요.”그녀는 이미 자신이 사라질 걸 알고 있었다.그때,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그는 고개를 들었다. 서여진이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초췌했고, 눈가엔 밤새 지운 듯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여기 있었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깨어진 유리처럼 불안정했다.“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강혁이 물었다.“모르겠어요.”“당신이 체포 명령을 내렸잖아요.”“명령은 내렸지만, 실행하지 않았어요.”“왜.”“그 여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3. 라벤더 향의 주인

    해남의 밤은 유난히 깊었다.낮 동안 내렸던 비가 그치고, 공기 속엔 바닷소금 냄새와 젖은 흙 향이 섞여 있었다.수진은 불 꺼진 꽃집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작은 전등 불빛 하나만 켜져 있었다.그 빛은 노랗게 흔들리며 책상 위 꽃잎들을 비췄다.꽃은 잠들지 않는다.그녀는 언젠가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꽃은 잠들지 않아. 단지, 숨을 고를 뿐이야.’그녀는 라벤더 잎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손끝에 묻은 향이 오래 남았다.그 향 속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그때, 창문 밖에서 조용한 발자국 소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2. 라벤더의 계절

    봄비가 내렸다.이른 아침의 해남은 흐린 하늘 아래 잠들어 있었다.비는 굵지도, 약하지도 않았다.그저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수진은 가게 앞 처마 밑에 서 있었다.꽃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라벤더, 장미, 수국, 튤립.그녀가 키워온 꽃들이 비를 맞으며 몸을 숙였다.그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우산을 접었다.손끝이 젖었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차갑지 않았다.‘라벤더의 계절이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언니가 가장 좋아하던 향이었다.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1. 시든 꽃잎에 남은 향기

    해남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조용했다.창문 너머로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노란 빛이 들판을 스쳐 지나며 모든 것을 금빛으로 덮었다.수진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손엔 언니의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종이 위에 묻은 그녀의 손자국이 어쩐지 아직 따뜻했다.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은 몇 시간 전 서울에서 떠날 때보다 달라져 있었다.눈 밑엔 피로가 번졌고, 눈동자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照明… 빛을 비춘다.”그건 더 이상 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이젠 자신의 목소리였다.버스가 멈췄다.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00. 기록되지 않은 유언

    밤기차는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창밖으로 흩어지는 불빛이 길게 이어졌다.철로 위를 미끄러지는 바퀴 소리만이, 그녀의 생각을 대신해주었다.좌석 위엔 봉투가 놓여 있었다.보라색 리본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그녀는 그 봉투를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천천히 매듭을 쓸었다.그 매듭 하나하나가 언니와의 마지막 기억처럼 느껴졌다.‘김수민.’그 이름이 마음속에서 잔잔히 울렸다.“언니, 당신은 왜 진실을 남기지 않았을까.”수진은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유리창엔 그녀의 얼굴과 달빛이 함께 비쳤다.그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열차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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