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새벽 여섯 시. 침대 머리맡의 스피커가 울렸다.
금속성의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상. 훈련생 전원은 5분 내 1층 집합.”
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공기에는 먼지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
수진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
방 안은 적막했지만, 바닥 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어제 밤 새벽 내내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
언니 수민이 무릎을 꿇은 채 양말을 신었다.
“빨리 움직이자. 늦으면 맞는다.”
수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밀려들었다.
긴 복도 끝에는 붉은 네온 불빛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줄지어 서 있었다.
남녀의 구분도, 나이의 차이도 희미했다.
모두 똑같은 회색 옷, 검은 머리, 그리고 말이 없었다.
흑거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힐이 아닌 군화의 소리를 닮아 있었다.
“좋은 아침이네, 애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목소리의 기술’을 배운다. 네가 가진 건 그거 하나뿐이니까.”
그녀가 손짓하자 조교들이 전화기와 헤드셋이 달린 기계를 책상마다 놓기 시작했다.
벽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었고,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없다.”
“이게 오늘 교실이다.”
그녀는 수민의 눈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누구든 처음엔 거짓말을 못한다. 하지만 굶어보면 배운다.
살기 위해선 진심을 버려야 한다.”
조교가 수진 앞에 헤드셋을 씌워주었다.
귀에 밀착된 차가운 금속 감촉이 낯설었다.
그녀는 작게 숨을 삼켰다.
옆자리 아이가 말했다.
“오늘 첫 수업이래. 목소리 평가부터 한대.”
“목소리… 평가?”
“응. 얼마나 믿기 쉬운가, 얼마나 따뜻한가, 얼마나 돈 냄새가 나는가.”
앞에 서 있던 여교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좋아. 각자 자기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수진의 귀에 자기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평소의 수진과는 달랐다.
어제 배운 발음 교정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맑고 낮게 들렸다.
그녀는 그 목소리에 낯선 매혹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가짜가 진짜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좋아, 다음.”
수민의 차례가 되었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그러나 흑거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착하네. 그게 문제야. 사람은 착한 목소리를 믿지 않는다.”
“왜요?”
“착한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하니까.”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고객이 듣고 싶은 건 ‘안심’이지, ‘진실’이 아니야.”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진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묘하게 저려왔다.
자신의 언니가 점점 이곳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고객이 듣고 싶은 건 안심이다.’
‘진심은 약점이다.’
훈련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전화기의 벨이 울릴 때마다 아이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고객님, 저희는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입니다.”
“계좌가 위험합니다.”
“지금 바로 안전계좌로 이체하세요.”
거짓말은 명령이었다.
진실을 말하면 밥을 빼앗겼다.
수진은 그 규칙을 너무 빨리 익혔다.
밤이 찾아왔다.
건물 전체가 잠들었지만, 몇몇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수민은 조용히 문을 열고 복도를 나섰다.
벽을 따라 걸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 끝난다.”
문득,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수민은 놀라서 몸을 돌렸다.
흑거미가 어둠 속에서 담배 불빛을 켰다.
“도망치려는 거야?”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바람?”
그녀가 다가왔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여기서 나가는 순간, 넌 죽는다.”
“여긴 감옥이에요.”
“아니, 여긴 기회야.”
“무슨 기회요?”
“세상을 속이는 법을 배울 기회.
진짜 세상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해.”
흑거미는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넌 머리가 좋아. 하지만 네 동생처럼은 못 돼.
그 애는 목소리에 ‘진심 없는 따뜻함’이 있어. 그게 세상을 움직이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내일은 첫 실전이야. 준비해.”
수민은 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이 떨렸다.
‘내 동생을 이용할 생각이야…’
다음 날, 교실엔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조교가 말했다.
“오늘은 실제로 전화를 건다.
스크립트는 정해져 있다. 실수하지 마라.”
화면에 숫자 하나가 표시됐다.
‘한국 국번.’
수진은 잠시 망설였다.
“이건… 한국 번호라니?”
“그래. 한국 사람들은 돈이 많거든.”
조교의 냉소가 이어졌다.
“여기서 성공하면, 내일 밥 두 번 준다.”
수진은 헤드셋을 쓰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가,
“고객님, 은행 보안팀입니다.
본인 확인을 위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남자의 말투는 약간 불안했다.
“무슨 일인가요?”
“최근 해외결제가 발생했습니다.
혹시 본인 사용이 맞으신가요?”
그녀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읽었지만,
자기 목소리가 점점 진짜 같아지는 걸 느꼈다.
뒤에서 흑거미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아. 그 목소리야. 믿음을 주면서, 의심을 심는 목소리.”
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잊었다.
그저 상대의 불안한 숨소리만 들렸다.
“고객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지자, 흑거미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첫 수업 합격. 린자오밍, 네 목소리는 이미 완성됐어.”
수민이 옆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엔 미묘한 기쁨이 떠 있었다.
그 미소가 낯설었다.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수진아, 네가 무너지고 있다…”
밤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수진만은 눈을 감지 못했다.
전화기의 수화기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문장은 이제 입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위엔 작은 균열이 있었다.
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그 바람이 마치 누군가의 속삭임 같았다.
“살기 위해선 진실을 버려야 해.”
그녀는 이불을 덮으며 속삭였다.
“언니… 나 이제 잘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순간, 언니는 복도 끝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불빛은 꺼져 있었다.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동생이… 점점 저 여자를 닮아간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공기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하늘은 맑았으나, 그 속에는 폭풍의 냄새가 숨어 있었다.강혁은 낚싯배의 노를 천천히 저으며 수평선을 바라봤다.바다는 언제나 진실을 감추는 장소였다.파도 위로 반짝이는 빛은 거짓처럼 아름다웠다.그는 잠시 낚싯대를 내려놓고 작은 상자를 꺼냈다.그 안에는 오래된 USB 하나가 들어 있었다.며칠 전, 서울 본부에서 우연히 받은 보고서에 포함돼 있던 물건이었다.파일명: [홍단 작전 / 보이스피싱 라인 C]‘폐기 예정’ 도장이 찍혀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노트북을 켜서 USB를 연결했다.화면에 오래된 사진들이 열렸다.훈련소, 전화기, 중국식 건물, 그리고…두 여자의 뒷모습. 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김수민.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소녀의 얼굴은 오래전 기억과 겹쳐졌다.강혁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이 얼굴…”사진 아래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린자오밍.순간, 그의 시야가 흔들렸다.그 이름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글자 하나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했다.린(林) - 나무.조(照) - 비추다.명(明) - 밝음.‘빛을 비추는 사람.’그 뜻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곧 떠올랐다.“조명아.”수민이 마지막으로 부르던 이름. 그는 숨을 내쉬었다.“설마…”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연변, 수민, 흑거미, 그리고…지금 내 옆의 그 여자.같은 시간, 수진은 바다 반대편 절벽 끝에 서 있었다.그녀는 작은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링크 연결 완료. 송신 시작.”장비의 불빛이 붉게 깜빡였다.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린자오밍, 확인 중. 네가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다.”그녀는 차갑게 대답했다.“흑거미를 찾고 있어.”“그녀를 찾는다고? 그건 네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야.”“누가 허락을 받아야 해?언니를 죽게 만든 놈들이 아직 숨 쉬고 있는데.”전파가 잠시 끊겼다.잡음 속에서 또 다른 음성이 섞여
밤이 유난히 길었다.해남의 공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간헐적인 파도소리가 들려왔다.수진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불 꺼진 방 안, 손끝으로 국화잎을 만지며 그녀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꽃잎이 찢어진 듯 손끝에 닿았다.작은 상처가 났지만,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무심히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다가,그 색이 오래된 기억의 붉은빛과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눈앞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녀의 시야는 낯선 공간으로 스며들었다.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시 연변의 훈련소 안에 서 있었다.겨울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눈발이 흩날렸고,하얀 눈 사이로 어린 자신이 보였다.열세 살, 아직은 이름 대신 ‘조명’이라 불리던 시절. 그녀는 언니와 함께 줄을 서 있었다.‘거짓은 미소로 시작한다.’그날 훈련 교관이 했던 말이 귀에 울렸다.“조명아.”언니 수민이 그녀를 불렀다.수진은 돌아보았다.언니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괜찮아?”“이건 괜찮은 게 아니야.”언니는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여기서 벗어나야 해. 이곳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곳이야.”“그럼 우린 어디로 가?”“…살아남는 쪽으로.”그 말이 끝나자,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듯 흔들렸다.언니의 얼굴이 사라지고, 대신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거미줄 같은 문양이 바닥에 드리워졌고, 그 중심에서 흑거미의 목소리가 들렸다.“조명아, 넌 나를 배신했지.”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서늘했다.“언니의 목숨은 네 선택이었어.”“거짓말이야.”“거짓말은 너희가 배웠던 기술이잖니.”수진은 달아나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거미줄에 발이 붙어 있었다.그녀는 몸부림쳤다.거미줄이 목을 휘감았다.“그만!”비명을 지르는 순간, 현실의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숨이 가쁘게 들이켰다.방 안은 조용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전쟁처럼 뛰고 있었다.이마에 땀이 맺혔다.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언니…”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눌러왔다.창
밤바다엔 안개가 짙게 깔렸다.파도가 부두를 때릴 때마다 물보라가 흩어졌고,짙은 습기가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일정했다.수진은 창문을 닫으며 바깥을 바라봤다.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지쳐 보였다.그녀는 낮 동안 내내 웃고 있었지만,그 웃음은 이제 입가에 남아 있지 않았다.“흑거미…”그 이름을 내뱉자, 공기가 묘하게 흔들렸다.그녀는 손끝으로 유리창을 쓸었다.지문 자국이 하얗게 남았다.그 흔적이 마치 자신이 사라지지 못한 과거 같았다.컴퓨터 화면에는 ‘Voice Line B-17’이라는 글자가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버튼을 눌렀다.잠시 잡음이 섞인 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낮고, 거칠고, 무언가 웃고 있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오랜만이야, 조명아.”순간, 그녀의 몸이 굳었다.‘조명(照明).’그건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이었다.단 한 사람만이 그렇게 불렀다 - 흑거미.“이 목소리… 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살아야지. 너 같은 애들이 아직 돌아다니잖아.”“왜 연락했어?”“네가 나를 찾고 있잖니. 그래서 먼저 찾아왔지.”그녀의 목소리는 유연했고, 한 단어마다 독이 묻어 있었다.“너, 지금 어디야.”“너무 궁금해하지 마. 곧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통신이 끊겼다. 짧은 침묵 후, 수진은 화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금이 간 모니터 위로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찾아와? 좋아. 그럼 난 기다릴게.”그녀는 일어나 벽장 쪽으로 갔다.장미 포장지와 리본이 가득한 상자들 사이에 작은 철제 가방이 숨겨져 있었다.자물쇠를 열자 안에는 검은 권총과 탄창, 그리고 낡은 휴대용 송신기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권총을 꺼내 손끝으로 만졌다.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그 감각이 이상하게 그립게 느껴졌다.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였다.“이건 꽃보다 더 오래 남는 냄새라니.”그 시각, 강혁은 부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잔을 기울일 때마다 바다의 그
밤의 해남은 유리처럼 투명했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골목 끝마다 누군가의 불빛이 숨 쉬고 있었다.수진화방도 마찬가지였다.작은 간판의 전구가 깜빡이며, ‘수진화방 - 꽃으로 마음을 전합니다’ 라는 글자를 반쯤 비추고 있었다.가게 안은 고요했다.그녀는 긴 머리를 묶고 흰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탁자 위에는 백합, 장미, 그리고 작은 국화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꽃의 줄기를 다듬는 가위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다.하지만 그 평화는 겉모습뿐이었다.벽 한쪽의 거울을 밀자, 그 안쪽에는 숨겨진 철문이 있었다.그녀는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철문이 열리자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빛이 거의 없는 공간, 공기 속엔 금속과 습기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통로 끝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그곳이 진짜 ‘수진화방’의 심장이었다.벽에는 모니터 세 대가 붙어 있었고,그 앞에는 오래된 전신전화기와 회선 장비가 줄지어 있었다.작은 붉은 불빛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그 불빛들은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그녀는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썼다.화면에 여러 통신 로그가 흘러갔다.‘서울 내 국정원 내부망 접근 시도 감지’‘암호명 B.S.K_001 위치 추적 중’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했다.배신구의 코드네임이 적힌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B.S.K – 내부 접속 경로 : 82-7-A그건 언니가 생전에 사용하던 채널이었다.“언니…”그녀는 작게 속삭였다.“당신이 죽던 날, 이 코드가 마지막으로 울렸지.”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이번엔 내가 끝을 봐야겠지.”그녀는 해킹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화면이 빠르게 전환되며 암호화된 파일이 열렸다.‘Voice File_2015_KSM’재생 버튼을 누르자,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김수민, 위치 노출됐다. 철수 명령. 반복한다, 철수 명령.’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명령 거부. 강혁이 남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다의 숨소리는 느려졌다.해남의 공기엔 비가 오기 전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꽃집 창문을 닫으며 수진은 창가에 남아 있던 흙냄새를 손끝으로 문질렀다.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줬다.‘이 흙은… 거짓이 아니야.’꽃병 속의 물을 갈아주던 그녀는 잠시 손을 멈췄다.물 위로 떠오른 하얀 국화 한 송이가 빙그르르 돌았다.그 꽃잎이 기묘하게 흔들렸다.‘언니, 나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이 사람, 보면 볼수록… 망설이게 돼.’그 시각, 서여진은 모텔방 안에서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디지털 포렌식 프로그램의 초록색 커서가 바쁘게 움직였다.화면 위에는 이름이 한 줄씩 떠올랐다.“김수진, 1998년 출생, 중국 연변 흑룡강성 출신, 귀화자 경력 없음.”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귀화 경력… 없음?”그녀는 마우스를 클릭했다.“그럼 여권은 어떻게?”다음 화면엔 위조된 여권 스캔본이 나타났다.서류 상 이름: ‘린자오밍’.그 아래엔 조그맣게 적힌 한글 번역: 김수진.서여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린자오밍…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그녀는 국정원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보안 인증을 세 번이나 통과한 뒤, 캄보디아 작전 관련 파일 하나를 불러왔다.파일명: 〈홍단 작전 / 수민-린자오밍 라인〉그녀는 스크롤을 내리다 손을 멈췄다.거기엔 오래된 기록 사진 한 장이 있었다.사진 속에는 두 여자가 있었다.한 명은 수민, 그리고 그 옆에는 어린 시절의 수진,아니, 린자오밍이 있었다.“설마…”여진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파일을 닫지도 못한 채 의자에 기대 앉았다.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그 여자… 강혁의 과거와 연결돼 있던 거야?”다음 날, 여진은 해남 부두 근처의 국밥집에서 강혁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언제나처럼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국밥 좋아하세요?”그녀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길래요.”그는 짧게 웃었다.“이 가게, 수민이 좋
밤의 해남은 낮보다 조용했다.조용하다는 말조차 사치일 만큼,파도와 바람, 그리고 개 짖는 소리 하나가 마을의 모든 소음이었다.서여진은 낡은 여관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커튼 틈 사이로 어두운 바다가 보였다.창문을 두드리는 습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뜨렸다.노트북 화면에는 ‘감시 대상 : 강혁’ 이라는 문장이 떠 있었다.“평범하게 산다. 술집 없음. 밤낚시 주 3회. 마을 사람들과 교류 적음.”그녀는 타이핑을 멈추고 화면을 내려다봤다.‘평범’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그의 이력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전직 국정원 요원이 이렇게까지 조용히 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평범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잠들지 않아.’그녀는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안에 있는 거울을 마주했다.거울 속의 자신은 평소보다 피곤해 보였다.“서여진, 넌 감시자야. 감정은 금지야.”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불안이 꿈틀거렸다.그 감정은 처음 그를 봤던 날,서울 본청에서 복도 끝을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과 닮아 있었다.묵직하고, 고요하고, 슬펐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일부러 부두 근처 카페에 앉았다.강혁이 매일 커피를 사가는 곳이었다.그는 같은 시간, 같은 걸음으로 나타났다.낡은 셔츠에 바다 소금기가 배어 있는 듯한 옷차림.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눈빛은 늘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었다.“아메리카노 한 잔.”그가 주문하고 잔을 기다리는 동안, 여진은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았다.“선장님 맞죠?”그가 고개를 들었다.“누구신가요?”“아, 저는 새로 온 사람이에요. 서울에서 내려왔어요. 기록용 사진 찍는 일 해요.”그녀는 거짓말을 태연히 했다.훈련된 요원의 얼굴이란 그런 것이다.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진이라… 이 동네엔 별거 없는데.”“없으니까 좋아요. 사람이 적어서.”“도시는 싫으세요?”“도시는… 너무 시끄럽잖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