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새벽 여섯 시. 침대 머리맡의 스피커가 울렸다.
금속성의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상. 훈련생 전원은 5분 내 1층 집합.”
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공기에는 먼지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
수진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
방 안은 적막했지만, 바닥 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어제 밤 새벽 내내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
언니 수민이 무릎을 꿇은 채 양말을 신었다.
“빨리 움직이자. 늦으면 맞는다.”
수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밀려들었다.
긴 복도 끝에는 붉은 네온 불빛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줄지어 서 있었다.
남녀의 구분도, 나이의 차이도 희미했다.
모두 똑같은 회색 옷, 검은 머리, 그리고 말이 없었다.
흑거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소리는 힐이 아닌 군화의 소리를 닮아 있었다.
“좋은 아침이네, 애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목소리의 기술’을 배운다. 네가 가진 건 그거 하나뿐이니까.”
그녀가 손짓하자 조교들이 전화기와 헤드셋이 달린 기계를 책상마다 놓기 시작했다.
벽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었고,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없다.”
“이게 오늘 교실이다.”
그녀는 수민의 눈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누구든 처음엔 거짓말을 못한다. 하지만 굶어보면 배운다.
살기 위해선 진심을 버려야 한다.”
조교가 수진 앞에 헤드셋을 씌워주었다.
귀에 밀착된 차가운 금속 감촉이 낯설었다.
그녀는 작게 숨을 삼켰다.
옆자리 아이가 말했다.
“오늘 첫 수업이래. 목소리 평가부터 한대.”
“목소리… 평가?”
“응. 얼마나 믿기 쉬운가, 얼마나 따뜻한가, 얼마나 돈 냄새가 나는가.”
앞에 서 있던 여교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좋아. 각자 자기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수진의 귀에 자기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평소의 수진과는 달랐다.
어제 배운 발음 교정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맑고 낮게 들렸다.
그녀는 그 목소리에 낯선 매혹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가짜가 진짜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좋아, 다음.”
수민의 차례가 되었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그녀의 음성은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그러나 흑거미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착하네. 그게 문제야. 사람은 착한 목소리를 믿지 않는다.”
“왜요?”
“착한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하니까.”
그녀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고객이 듣고 싶은 건 ‘안심’이지, ‘진실’이 아니야.”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진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묘하게 저려왔다.
자신의 언니가 점점 이곳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고객이 듣고 싶은 건 안심이다.’
‘진심은 약점이다.’
훈련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전화기의 벨이 울릴 때마다 아이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고객님, 저희는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입니다.”
“계좌가 위험합니다.”
“지금 바로 안전계좌로 이체하세요.”
거짓말은 명령이었다.
진실을 말하면 밥을 빼앗겼다.
수진은 그 규칙을 너무 빨리 익혔다.
밤이 찾아왔다.
건물 전체가 잠들었지만, 몇몇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수민은 조용히 문을 열고 복도를 나섰다.
벽을 따라 걸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 끝난다.”
문득,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수민은 놀라서 몸을 돌렸다.
흑거미가 어둠 속에서 담배 불빛을 켰다.
“도망치려는 거야?”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바람?”
그녀가 다가왔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여기서 나가는 순간, 넌 죽는다.”
“여긴 감옥이에요.”
“아니, 여긴 기회야.”
“무슨 기회요?”
“세상을 속이는 법을 배울 기회.
진짜 세상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해.”
흑거미는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넌 머리가 좋아. 하지만 네 동생처럼은 못 돼.
그 애는 목소리에 ‘진심 없는 따뜻함’이 있어. 그게 세상을 움직이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내일은 첫 실전이야. 준비해.”
수민은 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이 떨렸다.
‘내 동생을 이용할 생각이야…’
다음 날, 교실엔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조교가 말했다.
“오늘은 실제로 전화를 건다.
스크립트는 정해져 있다. 실수하지 마라.”
화면에 숫자 하나가 표시됐다.
‘한국 국번.’
수진은 잠시 망설였다.
“이건… 한국 번호라니?”
“그래. 한국 사람들은 돈이 많거든.”
조교의 냉소가 이어졌다.
“여기서 성공하면, 내일 밥 두 번 준다.”
수진은 헤드셋을 쓰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가,
“고객님, 은행 보안팀입니다.
본인 확인을 위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남자의 말투는 약간 불안했다.
“무슨 일인가요?”
“최근 해외결제가 발생했습니다.
혹시 본인 사용이 맞으신가요?”
그녀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읽었지만,
자기 목소리가 점점 진짜 같아지는 걸 느꼈다.
뒤에서 흑거미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아. 그 목소리야. 믿음을 주면서, 의심을 심는 목소리.”
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잊었다.
그저 상대의 불안한 숨소리만 들렸다.
“고객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지자, 흑거미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첫 수업 합격. 린자오밍, 네 목소리는 이미 완성됐어.”
수민이 옆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엔 미묘한 기쁨이 떠 있었다.
그 미소가 낯설었다.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수진아, 네가 무너지고 있다…”
밤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수진만은 눈을 감지 못했다.
전화기의 수화기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문장은 이제 입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 위엔 작은 균열이 있었다.
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그 바람이 마치 누군가의 속삭임 같았다.
“살기 위해선 진실을 버려야 해.”
그녀는 이불을 덮으며 속삭였다.
“언니… 나 이제 잘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순간, 언니는 복도 끝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불빛은 꺼져 있었다.
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동생이… 점점 저 여자를 닮아간다.”
강혁이 앞을 막아선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더 낮아진 듯했다.그 차가움은 봉인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수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온,마치 심장이 잘못된 기억을 찾아 맥박을 얼려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수민의 얼굴을 한 그 존재는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는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았다.그저 ‘남겨진 껍질의 눈’처럼 조용히 흔들릴 뿐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 수진의 폐 안쪽을 파고들어 숨을 막았다.“자오밍.”그 존재는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수진은 무릎이 풀릴 것 같은 순간, 강혁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힘이 아니라 온기였다.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수진. 네가 알고 있는 건 기억이고, 지금 저기 있는 건… 흑거미가 만든 윤곽이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러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수진의 시야가 흔들렸다.눈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이 과거의 어느 겨울밤과 겹쳐졌다.눈 속에 묻혀 있던 자매. 언니의 손.“자오밍, 언니한테 와.”그 목소리. 그 부름. 그 따뜻함을 가장한 잔인한 모조품.수진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나갔다.그러나 강혁이 그녀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가지 마.”그는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은 명령 같았다.“저건 너를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야. 네가 언니를 잃은 그 순간을 다시 꺼내서, 네 마음을 갈라버리려는.”수진의 목 안에서 작은 숨이 튀어나왔다.“강혁… 내가… 언니 이름을… 들었어.”“그래. 너만 아는 거니까 흑거미가 더 노린 거야.”강혁이 수진의 눈을 바라보았다.“흑거미가 그걸 알아냈다는 건… 네 마음을 가장 아픈 데서 찌르려고 했다는 뜻이야.”그 존재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수민의 얼굴. 그러나 수민에게 단 한 번도 없었던 ‘감정의 공백’이 있었다.그 공백이 수진의 심장을 칼처럼 찔렀다.“자오밍.”이번엔 한발 더 다가와서 불렀다.수민의 입 모양, 수민의 톤, 수민의 미세한 호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진동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몸이 먼저 느끼는 종류의 진동’이었다.지하 흙층이 아닌, 철골이 흔들릴 때 나는 낯선 떨림.수진은 귀 아래까지 심장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내뱉으면, 그 순간 들이킨 숨의 떨림이 자신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낼 것 같아서였다.강혁은 바닥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위험한 집중의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수진 뒤에 서 있는 그 여자는 이미 손등에 핏기가 모두 빠져 있었다.수진이 어깨를 붙잡아 겨우 버티게 했지만봉인의 압박과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의 존재’가 그녀의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었다.바닥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사람 한 명의 무게보다 가볍게 하지만 분명히 눌렸다.수진이 숨을 멈췄다.강혁은 말을 잃었다.그리고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건 그림자도, 사람도, 발걸음도 아니었다.기척이었다.흑거미가 키운 자들은 절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기척을 먼저 내고, 다음에 발을 내딛는다.그 기척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들이 가진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이었다.바닥이 다시 눌렸다.그리고 세 번째 진동이 왔다.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하나가 아니야.”강혁이 미세하게 머리를 돌렸다.“뭐가?”“여긴 ‘한 명’만 내려오는 구조가 아니야.흑거미는 늘 첫 번째 자를 보낼 때 그녀와 짝을 이루는 ‘그림자’를 함께 붙여.”그 말은 흑거미의 방식에서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첫 번째 자는 정면을 맡고, 그림자는 뒤에서 심장을 노린다.강혁은 순간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그럼… 벌써 둘이 내려왔다는 건가.”수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 아주 작게, 금속판이 들리는 틈이 보였다.그리고 그 틈 사이로 ‘눈’이 있었다.사람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차갑고,짐승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그런 눈이었다.수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 눈은 과거의 자
세 번째 봉인이 완전히 내려앉자, 방 안의 공기는 더 이상 ‘공기’가 아니었다.혀 끝에 닿는 맛조차 달라졌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금속이 아주 가늘게 갈린 가루가 폐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고,심장의 박동은 마치 누군가 손으로 조여 오듯 일정하게 느려졌다.흑거미의 봉인은 언제나 ‘심리’를 먼저 공격했다.몸을 옥죄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먼저 구속하는 방식.그걸 깨기 위해선 힘도, 기술도 쓸모없었다.마음이 버티지 못하면 몸은 알아서 무너졌다.수진은 오랫동안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그러나 잊는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흑거미가 아이들을 키우던 그 지하 훈련실‘감정은 약점이다’라는 말이 매일같이 울려 퍼지던 그 공간의 냄새가 지금 이 방 안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그녀는 일순간 숨을 멈췄다.숨을 들이키면, 그 시절의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서.강혁은 그녀를 살폈다.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수진을 향한 불안인지, 봉인의 압박 때문인지,아니면 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분명했다.그 여자는 수진과 닮아 있었지만 감정선이 훨씬 얇은 여자이미 봉인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아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손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을 짚는 손가락이 떨렸다.“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수진은 그녀 뒤에서 심장 쪽에 손바닥을 대고마치 어릴 적 엄마가 애를 재우듯, 아주 느린 박자로 등을 쓸어내렸다.흑거미에게서 배운 생존 기술 중 하나였다.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그녀의 호흡이 아주 조금씩 고르게 바뀌는 걸 확인한 뒤 수진은 손을 뗐다. 그리고 강혁을 바라봤다.강혁은 문틀 근처에서 자그마한 금속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있었다.그 조각은 문 아래에서 부스러지듯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손가락 끝으로 문질러본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소리 없는 폭약 성분. 흑거미는 이걸로 봉인을 ‘강화’했어.그녀의
문 아래로 스며들던 발자국의 ‘그림자’는 진짜 그림자가 아니라흑거미가 길러낸 자들이 이동할 때 바닥에 남기는 특유의 흔적이었다.살아 있는 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온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형태만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지는 것. 수진은 그걸 오랫동안 봐왔다.언니가 죽기 전날 밤, 그 그림자들이 처마 아래 길게 누워 있었고그 길었던 그림자가 언니의 뒷모습을 집어삼키듯하나둘 벽을 타고 올라가던 장면을 그녀는 그걸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었다.강혁은 문 앞까지 다가가더니 몸을 측면으로 살짝 돌렸다.그 자세는 공격적인 형태도, 방어하는 형태도 아니었다.그가 예전에 현장에서 자주 취하던 ‘누군가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되, 먼저 휘두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습관의 자세였다.그가 그런 자세를 취하는 걸 보는 순간 수진은 또다시 심장이 무너져내릴 듯 아팠다.그녀는 강혁의 등을 바라보며 한 번, 아주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 숨이 들숨인지, 울음인지, 스스로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뒤에 서 있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본 뒤 수진이 낮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나도, 언니도… 두려워한 적은 있어도 그러다 부서진 적은 없어.”그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수진은 그 흔들림을 보고 자신의 말투를 아주 미세하게 바꿨다.연변에서 쓰던 말투 중 가장 부드러운 억양을 꺼내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나도 겁났어.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면들 때문에. 근데… 넌 그거 아니야.너는 그냥, 잘못 길러진 불쌍한 사람일 뿐이야.”그 말이 닿자 그 여자는 고개를 내리깔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때 문 밖에서 첫 번째 금속음이 또 울렸다.아까 들렸던 세 번째 신호와는 달랐다.이번 건 더 묵직하고, 더 깊었다.마치 벽 한쪽이 안쪽으로 꺼지는 소리처럼 공기 자체를 낮은 음으로 흔들었다.강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작됐다.”“봉인이야?”수진이 물었다.강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단지 문틀을 바라보며“첫 번째 봉인.”그 한
문을 사이에 두고 서늘한 기척이 다가오는 동안, 강혁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그 기척은 사람 하나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흑거미가 오랫동안 길러온, 냄새도, 발소리도, 체온도 지워버린 무리들 ‘그녀의 손발’이라 불리던 존재들이 움직일 때 특유의 공기가 있었다.습기가 끼지도 않고, 먼지가 뜨지도 않는 마치 공간이 자체적으로 체온을 잃어가는 느낌.수진도 그걸 알아챘다.그녀는 강혁 뒤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내가 뭐라 말하든… 절대 뛰지 마. 혁 씨가 널 붙잡든, 내가 너를 끌고 가든,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상대는 그걸 먼저 노릴 거야.”그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나는… 너희 둘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야. 정말로… 살고 싶어서 온 거야.”“그걸 알아.”수진이 아주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러니까 나도 널 살리고 싶어.”그 말에 그 여자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흔들었고,그 흔들림은 감당하지 못한 체온처럼 금세 목끝까지 차올랐다.그때 문 손잡이가 한 칸 돌아갔다.강혁이 수진 쪽으로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그 작은 움직임 속에, 둘만이 공유하는 오래된 감각이 있었다.위험을 앞두고 서로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한쪽이 숨을 들이기 전에 다른 쪽이 호흡을 맞추는 버릇.둘 사이에 피어나던 사랑도, 잿빛처럼 드리워진 오해도,모두 그 오래된 감각 위에 놓여 있다.수진의 장미향이 들숨에 아주 옅게 스며왔고, 강혁은 그 향으로 마음을 묶었다.움직이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기 위해.문이 열렸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흑거미가 현장에서 종종 쓰던 방식이었다.전면에 사람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공간을 시험하듯 조용히 미끼를 던지는 것.문틈으로 들어온 건 새까맣게 말라붙은 종이 한 장이었다.‘종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두껍고, ‘장치’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낯선 기호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듯 새겨져 있었고그 기호들 사이로 극히 미세한
천장에서 울린 금속음은 처음엔 바람에 흔들린 전선 같은, 그저 미세한 떨림 정도였다.그러나 강혁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저런 소리는 실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누군가가 ‘그들 셋 모두’를 한 공간에 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수진은 문가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그 여자의 손목은 마치 오랫동안 스스로를 붙잡고 버텨온 사람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등엔 가늘게 새겨진 상처들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걷겠어?”수진이 조심스레 묻자 그 여자는 두 번이나 숨을 들이켠 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걷… 걸을 수 있어.”그 목소리는 부서질 만큼 약했지만, 그 약함 속에 오래 묵은 인내가 들어 있었다.강혁은 방 둘레를 천천히 훑었다.출입구, 천장, 벽 모서리.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이미 촘촘히 박혀 있는 듯했다.그는 수진 쪽으로 무겁게 말했다.“우릴 지켜보고 있어. 방금 온 그 소녀까지 포함해서.”‘소녀.’수진은 그 말에 문득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자신의 얼굴, 자신의 억양, 자신의 그림자로 살아온 존재를‘소녀’라고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오래된 진통처럼 다가왔다.그 낯선 여자는 강혁의 말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치려 했으나, 수진이 손목을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혁 씨는 네 적 아니야.”수진의 말은 낮고 조용한데 이상하게 힘이 있었다.그 말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조금 가라앉은 듯 숨을 눌러 뱉었다.“…나는, 너희 둘에게 폐만 끼치는 거 아니야?”그 목소리는 고백이라기보다 자기 혐오에 가까웠다.수진은 그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흑거미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지? 너를 감시하고, 너를 시켜서”그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야. 시켰다기보다… 난 그냥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존재였어.”수진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그 말은 곧 흑거미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너를… 나 대신하게 하
다음 날 아침, 해남의 공기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지붕 끝에 걸린 물방울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잠시 반짝였고, 그 빛은 오래 잠들었던 마을의 골목을 천천히 깨웠다. 그러나 강혁에게 그 아침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려진 채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깨어 난창 너머의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바다는 어제보다 조용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더 많은 소리가 겹치고 흘렀다.여진의 마지막 표정, 깊게 젖은 수진의 눈빛, 그리고 말하지 못한 비밀이 서로 엉켜 마치 조용한
밤이 깊을수록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도시의 불빛이 멀어지고,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길 위의 작은 굴곡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시선은 그 굴곡 위에 고여 있는 듯한 침묵을 따라 흔들렸다. 강혁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면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를 오래 바라보다가,묻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침묵은 단순한 생각의 깊이가 아니라, 다시는 닫히지 않을 문을 열어버린 사람의 조용한 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창문 너머로 스치는 공기는 그들의 얼굴을 식히며 바다 냄새를 실어왔다. 바다에 가까워졌다는
그림자가 빛에 서서히 잡히는 동안, 수진의 심장은 어느 한 지점에서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오랜 세월 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과거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라 눈앞의 인물과 겹쳤다. 아직 얼굴 전체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척과 움직임에는 그녀의 기억 속 어딘가를 찌르는 기묘한 친밀함이 있었다. 낯설어야 할 얼굴인데, 조금도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스쳤고, 그것이 오히려 더 큰 공포처럼 마음을 끌어당겼다. 강혁도 이미 경계를 끌어올린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오래전
강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누던 대화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했지만, 그 침묵조차도 어쩐지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그는 그 안에서 오히려 무언가 더 깊은 결을 찾으려는 듯 표정을 정리했다. 수진은 앞치마 끈을 느슨하게 매만지며, 마치 방금까지 나누었던 말들이 그녀의 손끝에 얽혀 남아 있는 것처럼 잠시 시선을 떨구다가도 다시금 강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전과 다르지 않게 차분했고, 낯설지만 기묘하게 가까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꽃 말이 참 이상해요.”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