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진은 순간적으로 강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궜다. 그러나 그 눈동자의 움직임 속에는 도망치려는 기색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다짐하려는 듯한 자잘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자전거 바퀴 한쪽에 비스듬히 걸려 있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며 가볍게 흔들렸고, 그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방 안 공기의 긴장을 따라 흔들리는 듯 보였다. 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그 숨이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며 아주 얕게 흔들렸다.“여진… 그 사람은 죽을 자리에 다가가고 있었어요.”말 한마디 한마디가 바닥에 내려앉는 꽃잎처럼 조용히 떨어지되, 떨어지는 순간마다 작은 울림을 남겼다.“강혁 씨가 뭘 보고 느꼈는지… 나도 알아요. 그 사람은 마지막에 누군가를 따라갔어요. 그 누군가가, 여진 씨를… 그리고 당신을 동시에 노리고 있었어요.”강혁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그는 수진이 말하는 ‘누군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배신구.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목 뒤가 쓸릴 듯 서늘해졌다.여진은 그의 손에 이용된 사람이다.그녀의 감시, 그녀의 사랑, 그녀의 흔들림 수진의 말은 그 사실을 조용히 확인하고 있었다.“여진 씨가 남긴 건… 단순한 죽음이 아니에요.”수진은 손을 조심스레 합쳐 쥐었다.마치 쥐고 있는 그 두 손 사이에 여진이 남긴 조각 하나가 얇게 끼어 있는 듯한 손짓이었다.“그 사람은… 끝까지 강혁 씨를 의심하지 않았어요.”강혁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그 흔들림은 고통이자 위로였다.누군가 자신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동시에 그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맞닿아버렸기 때문이다.“수진… 너 지금 그걸 어떻게”“여진 씨가… 날 만났어요.”순간, 공기가 바람의 방향을 잃은 듯 정지했다.강혁의 들숨이 얇게 끊겼다.“언제.”그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말을 한다기보다 숨을 내뱉으며 내놓은 단어였다.“어제… 그리고 그저께. 여진 씨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
강혁은 여진의 방을 떠난 뒤에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한 채 건물 바깥 계단 아래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습기가 귓볼을 스쳐 지나갔고, 그 습기가 몸을 식히는 동안 그의 안쪽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과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번갈아가며 뒤섞여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여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그 눈동자 속에 무엇인가를 읽어내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작은 비수처럼 가슴에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갑작스레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이 전하기 위해 남긴 빈자리였고, 그 빈자리가 바로 강혁을 지금 이곳에 붙잡아두고 있었다.그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졸음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골목이 길게 뻗어 있었다.바람이 밀어낸 구름 사이로 달빛이 바닥을 희미하게 비추며 끊어진 그림자들을 이어 붙였다.그 그림자들이 마치 안내하듯 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고, 그는 생각보다 덜 망설이며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 끝에는 수진이 있었다. 여진이 남긴 흔적이 결국 향한 자리 역시 수진이었다. 그는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이 관계에서 도망칠 구석은 존재하지 않았다.걸음을 옮기며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숨이 막히는지 이해하려 했다.여진의 마지막 표정 때문일까,수진의 숨겨진 그림자를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일까,혹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온 감정 때문일까.정답을 찾기보다는 그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을 가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그 방향은 똑같이 수진을 향해 있었다.해남의 밤거리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어부들이 내일 출항을 준비하느라 희미한 불빛을 켜놓은 창고 앞에는 그릇들이 포개져 있었고, 바람에 부딪히는 철제 문이 덜컹거리며 고요를 흔드는 소리를 냈다.그 작은 소리마저도 강혁에겐 심장을 짓누르는 신호처럼 들렸다.여진의 죽음은
수진은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화면은 아직 잠금 해제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 화면 뒤편에 숨어 있는 무게가 손가락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강혁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가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조차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한 결심이 펼쳐지는 듯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잠금 화면을 밀어 올리려다 멈추었고, 그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강혁은 보았다. 그는 손을 뻗지도, 끌어안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그녀가 스스로 말의 문을 열 때까지, 그녀가 도망가지 않도록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로 시선을 유지했다.수진은 마침내 화면을 열었다. 메시지 앱 하나만이 새 알림을 가지고 있었고, 발신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그러나 번호의 패턴, 앞자리에 붙은 특수 회선, 접속 방식…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진.’ 그녀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불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미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던 사람.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었고, 여진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남겼던 것이다.수진이 메시지를 열자, 대화창에는 단 하나의 파일만이 남아 있었다. 파일 이름은 없다. 제목도 없다. 그저 날짜와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전송됨: 사망 추정 전 3시간.” 그 시간표는 여진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들에 무엇이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 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강혁이 낮게 말했다. “여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고, 부탁이 아닌 간청이었으며, 간청의 표면 아래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각오가 있었다.수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파일을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는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었다.여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배경이 어둡고 흔들려 있었다. 그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가게 안에 스며들었다.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수진의 어깨는 천천히 내려앉았고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어둠 속에서 혼자가 되면 가면은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서울말투로 겹겹이 꾹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바람 틈처럼, 아주 조금씩 새어나왔다.“…나 왜 이러는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연변 억양이 섞인 본래의 감정으로 돌아가 있었다.누구도 들을 수 없는 공간이어서 가능한 가장 진짜에 가까운 목소리.흑거미. 언니의 죽음.복수. 그리고 강혁.그 네 개의 단어는 서로 맞물릴 수 없는 모양인데,지금 그녀의 마음속에서는네 방향으로 동시에 끌어당겨지는 것처럼 아프게 요동치고 있었다.수진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뜨겁고 차가운 열이 동시에 느껴졌다.이상한 감정이었다.자신을 덮쳐오는 감정이 괜히 무서웠다.그리고 더 무서웠던 건 그 감정이 강혁에게서 온다는 사실이었다.한편, 강혁은 집으로 돌아가 거실 불빛 하나만 켠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그의 손에는 조심스럽게 접어 넣은 작은 메모장이 있었다.피싱 조직에서 수년 동안 추적해온 단서들,흑거미의 이름이 드문드문 등장하는 포스트잇들,그리고 가장 오래된 페이지에는 수민의 기록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오래전의 기억을 잔혹할 만큼 느린 속도로 떠올렸다.수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그 사람… 부탁해요. 내 동생… 평범하게 살게 해주세요.”그 목소리는 밤과 새벽 사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낮은 속삭임이었다.강혁은 손가락으로 오래된 글씨를 따라가며 미세하게 이를 악물었다.“수진 씨… 당신이 그런 사람들에게 쫓기는 거라면 난… 가만히 있을 수 없어.”그는 그 조용한 선언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약속과도 같았다.그리고 그 약속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앞으로 이 길이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다음 날 새벽. 해남의 공기는 밤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웠다.서늘한 수증기가 작은 골목길을 감싸고, 아직 누
해가 기울 무렵, 꽃집 안은 붉은 빛이 스며들며조용히, 아주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수진은 조명을 켜지 않은 채 탁자에 놓인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꽃다발 속 작은 쪽지는 손에 닿기만 해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묘하게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그 쪽지를 다시 꺼냈다.글씨는 짧고, 명확하고, 잔혹했다.잘하고 있다.흔들리지 마. 흑거미.이 글자들의 획 사이로 십여 년 동안 몸으로 새겨진 명령과 통제,절대적인 위계와 공포가 되살아났다.언니와 자신을 길렀던 보호자이자 감시자 그 여자의 냉정한 눈빛이 그대로 떠올랐다.“흔들리면 죽는다.”흑거미는 늘 그렇게 말했다.그 말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훈련의 경고가 아니다.지금은 직접적인 위협이었다.흑거미가 이곳 해남까지 손을 뻗었다는 의미였다.수진은 손등을 떨며 쪽지를 꾹 접어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하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문장이 폐 속을 까끌하게 긁어내렸다.‘흔들리지 마… 흔들리면 안 되는데…’그녀는 자기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강혁의 얼굴이 떠올랐다.그의 눈빛, 목소리, 꽃집 앞에서 기다려주던 따뜻한 기척.그 따뜻함이 지금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밤이 되어 해남의 좁은 골목에는밝고 작은 가로등 불빛만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강혁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손에 든 작은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안에는 간단한 약과 핫팩, 그리고 작은 캔커피 두 개가 들어 있었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준비했다.혹시 수진이 오늘처럼 지쳐 보인다면 잠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마음.하지만 자신이 이런 걸 준비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러면 안 돼. 감정 섞으면… 위험해진다.’그가 뼈에 새겨 넣다시피 배운 원칙이 머릿속에 다시 반복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그의 의지보다 먼저 수진을 향했다.수진은 꽃집 뒷편 작은 숙소에
그날 밤 해남의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 표면만.수진과 강혁의 그림자도 그렇게 고요해 보였지만,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파도가 흔들리며 부딪히고 있었다.강혁이 물끄러미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수진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휴대폰 화면을 켜놓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사진 속 수민은 또렷했고, 마치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처럼 생생했다.수진은 오래 전 버릇처럼 사진 속 언니의 눈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언니… 나 진짜 잘하고 있는 거 맞소?”낮게, 들리지 않게, 연변 사투리가 스며 나왔다.서울 말투로 감추고 숨겨왔던 부분이 강혁의 체온이 조금만 가까워져도감정의 균열 속으로 흘러나왔다.강혁은 모른 척했지만, 들었다.그의 심장이 오래 잠겨 있던 기억 속에서 조용히 뒤집혔다.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닮아 있었다.사라진 여자를 잊고 살기로 결심했던 뒤에도,그 목소리의 흔적이 남아 가끔씩 악몽처럼 되살아나던 그 음의 떨림.그는 자신을 다스리듯 숨을 긴 호흡으로 내쉬었다.“수진 씨.”부르기만 해도 진실의 모서리가 손에 닿는 것처럼 따가웠다.“예?”수진은 빠르게 휴대폰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순간 너무 빠르게 감추려 했다는 걸 스스로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강혁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래된 상처의 무게처럼 깊었고,그 깊이에 빠져들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가면이 무너질 것 같아 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오늘… 많이 지쳐 보이네요.”그는 질문도, 의심도 하지 않았다.단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은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대로 읽어내는 어조였다.수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웃었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사람 상대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 아입니까. 꽃도 사람도, 들여다보면 다 까다롭소.”말을 마치고 뒤돌았을 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요동치던 떨림이어떤 경고인지, 어떤 희망인지 구분되지 않았다.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조용한 밤공기에 수진은 마치 자신이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