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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한국병원 응급의료센터 로비의 형광등 불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굳어 달라붙은 이마, 찢겨 나간 소매 사이로 드러난 시퍼런 멍 자국. 3일간 갇혀 있던 고속도로 터널 붕괴 현장에서 살아 돌아와, 초기 처치를 마친 참이었다.
시야가 온통 흐릿하고 귓가에는 이명이 울렸지만, 가슴속에는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콘크리트 잔해 밑에서 깨진 스마트폰을 붙들고 남편에게 걸었던 마지막 통화의 음성이 생생했다. '지은아, 구조대 갈 테니까 배터리 아껴. 전화 끊는다.' 그 짤막하고 무미건조한 한마디가 남편 박도진과 나눈 마지막 통화였다. 그 뒤로는 몇 번을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어둠과 흙먼지로 뒤덮인 30m 지하 콘크리트 무덤. 차가운 지하수와 흙탕물을 핥으며 72시간을 버텼다.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바위를 긁어내며 호흡 하나하나를 필사적으로 이어갔다. 내가 그 생지옥에서 끝내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모든 청춘과 돈을 바쳐 뒷바라지했던 내 남편, 박도진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환자분! 추가 검사와 치료가 남았어요. 우선 침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간호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내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로비 안내 데스크를 가리켰다. "제 남편…… 남편에게 먼저 연락해야 해요. 박도진이라고……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내 메마른 음성에 간호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시선이 흔들리며 로비 벽면에 설치된 대형 장례식장 실시간 현황판으로 향했다. 기이한 침묵에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내 시선이 붉은색 자막에 멎었다. [특실 1호실 / 故 강지은 님 빈소 / 발인: 내일 오전 8시] [상주: 남편 박도진] 쿵.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바닥 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내 흑백 증명사진이 국화꽃 테두리에 둘러싸인 채 전광판 한가운데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어머, 저거 봐…… 저 환자분 이름이랑 똑같잖아?" "터널 사고 실종자라던데? 시신 수습도 안 끝났는데 남편이 벌써 빈소를 차렸다더니……." "살아 돌아온 거야? 세상에, 남편은 이미 초상 치르고 있는데!" 로비에 모여 있던 보호자들과 의료진의 웅성거림이 거대한 파도처럼 귓전을 때렸다. 내 이름이 붙은 빈소. 내가 지하 30m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던 그 시각, 남편은 내가 죽었다며 빈소를 차렸다. 수색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두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내밀었던 손이 굳었다. 차가운 바닥을 벗어나 병원까지 왔는데도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6년간의 연애와 2년간의 결혼 생활. 내 명의로 마련했던 3억짜리 신혼집 전세금과 내가 낮밤으로 일해 벌어다 준 돈으로 차려준 남편의 무역회사. 그 모든 헌신의 대가가 서늘한 악취를 풍기며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환자분, 어디 가세요!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저기요!"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거칠게 뽑아 던졌다. 툭 튀어나온 핏방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내민 검은색 롱코트를 받아 피 묻은 환자복 위에 걸쳤다. 손등은 휴지로 눌렀다. "사고 현장 가족 협의회에 변호사 있죠? 그분한테 연락해 주세요. 살아 돌아온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고요." 간호사가 내 이름을 확인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시퍼런 서릿발처럼 번뜩였다. 지하 1층 장례식장 버튼을 꾹 눌렀다. 승강기 문이 닫히는 순간, 내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묵직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남편 박도진. 네가 그렇게 서둘러 차려준 내 장례식에, 내가 직접 조문하러 가마.따스한 초가을 햇살이 서울가정법원의 맑은 유리창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내 손에는 이혼 확정 판결문과 그동안 따로 진행해 온 재산 정리 서류가 가지런히 들려 있었다. [원고 강지은과 피고 박도진은 이혼한다.] 서류철에는 위자료 1억 원, 회사에 돌아갈 손해배상금 4억 원, 내 명의 전세보증금 3억 원과 도진무역 지분 100%에 관한 정리 내역이 각각 끼워져 있었다. 6년간의 연애와 2년간의 결혼 생활. 내 이름 옆에 적혀 있던 박도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떼었다. 더는 부부가 아니었다.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던 무거운 족쇄가 풀려나가며, 폐부 깊숙이 맑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 찼다. 회수된 전세금과 위자료, 도진무역의 회수 자산까지 포함한 정리 내역에는 총 18억 원이 기재되어 있었다. 지급되지 않은 사망보험금은 그 안에 없었다. 회사 명의 자산은 내 개인 통장 잔액과 분리해 두었다. 남편처럼 그 경계를 지울 생각은 없었다. 도진 부모의 집과 선산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도진 일가가 더는 예전 집에 살지 않는다는 말까지였고, 나는 그 뒤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신서린은 별도의 민사소송에서 광고 브랜드 8개 사에 5억 4,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계약은 끊겼고, 그녀가 쓰던 SNS 계정도 사라졌다. 다시 모델 일을 시작한다는 소식은 없었다. 나는 사라진 계정을 더 찾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무너진 자리를 지키며 내 하루까지 소모할 이유는 없었다. 법원 앞 분수대 광장으로 걸어 나오자, 류태환 변호사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차콜 수트 차림의 태환은 묵직하고 신뢰감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강 과장님…… 이제 강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오늘은 서류에 더 서명하실 일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끝까지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혼자였다면 이 서류들 앞에서 몇 번은 돌아섰을 거예요." 우리는 가벼운 웃음을 나누며 투명
한 달 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 대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엄숙한 긴장감이 흐르는 법정 한가운데, 청색 수의를 입은 박도진이 포승줄이 풀린 뒤 피고인석에 앉았다. 한 달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 퀭하게 파인 볼과 핏발 선 눈동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그의 옆자리 피고인석에는 화려한 메이크업 대신 핼쑥하게 파인 얼굴의 신서린이 고개를 푹 떨군 채 앉아 있었다. 나는 피해자이자 고소인 자격으로, 류태환 변호사와 함께 방청석에 단정하고 차분하게 자리했다.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툼한 서류철을 펼치며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공소 사실을 낭독했다."피고인 박도진은 피해자가 고속도로 터널 붕괴 사고로 매몰되어 사투를 벌이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인지하고도, 구조 요청을 고의로 묵살하고 내연녀 피고인 신서린과 밀회를 즐기며 조기 사망 처리를 사주했습니다."법정 내 대형 스크린 위로 블랙박스 육성 녹음과 허위 사망진단서 매수 정황이 제시되었다. 법인카드와 회사 계좌에서 빠져나간 2억 원의 내역, 손해배상 청구액 4억 원을 산정한 자료도 구분해 제출됐다.'수색대가 늦게 갈수록 우리한테 유리해. 그 안에 묻혀서 산소 부족으로 질식해 죽으면 완벽한 자연재해 사망이거든.''꺄악! 오빠 최고! 나 오늘 밤 오빠한테 완전 봉사할래!'도진과 서린의 끔찍하고 잔인한 육성이 스피커를 통해 법정을 가득 메우자, 방청석에 모여 있던 시민들과 터널 참사 유가족들의 입에서 분노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방청석 곳곳에서 "인간도 아니다", "천벌을 받아라" 하는 거친 야유가 쏟아졌다. 재판장이 서늘한 눈빛으로 피고인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피고인 박도진,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합니까?"도진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양손을 깍지 껴 쥐었다가 풀며, 내 쪽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모…… 모두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제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다시 성실하게 빚을 갚으며 평생 속죄하고 살겠습니다……."그 비열하고 역겨운 마지막 희망을,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
나중에 태환이 전해 준 도주 경위는 이랬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도진은 결과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로 경찰관들의 구둣발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담당 경찰관이 옆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사이, 도진은 내려놓은 소지품 봉투를 낚아챘다. 부르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내달렸다.수갑 찬 손으로 봉투를 움켜쥔 채 난간에 어깨를 부딪쳤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엉켰다. 하지만 법원 1층 로비 유리 회전문 밖에는 이미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사채업자 강 실장 일당이 번뜩이는 눈으로 지키고 서 있었다."어이, 박도진! 저기 쥐새끼처럼 기어 나온다! 잡아라!"조폭들의 살벌하고 거친 고함이 로비 유리창을 쩌렁쩌렁 울리자, 도진은 사색이 되어 법원 지하 공중화장실 안으로 허겁지겁 기어 들어갔다.쿵-!가장 구석진 대변기 칸으로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간 도진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플라스틱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도진은 대변기 옆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발을 뒤로 뺄 곳이 없어 신발 끝이 벽에 부딪쳤다.뒤쫓아온 경찰관들의 구둣발 소리가 화장실 타일 바닥을 빠르게 두드렸다. 멀리 로비 쪽에서는 강 실장의 고함이 한 번 더 터졌지만, 곧 제지하는 목소리에 묻혔다.쾅! 쾅! 쾅!"박도진 씨,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지금 나오시면 됩니다!"문짝이 거칠게 흔들렸다. 도진은 대답 대신 잠금장치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도진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은 채 오물이 묻은 변기통 옆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양주를 들이켜며 15억 파티를 벌이던 그 오만하던 남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도진은 봉투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내가 번호를 차단한 뒤였다. 그는 대신 내 법률 대리인인 태환에게, 내게 전해 달라며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지, 지은아…… 나 도진이야…… 제발 나 좀 살려줘……."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비루하고
오후 2시, 마포구 (주)도진무역 본사 대회의실. 긴급 임시 주주총회 및 이사회가 소집된 회의실 안은 얼음장 같은 냉기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6년 차 회계팀 과장으로서 자료를 항목별로 나눠 놓고, 주주들의 시선이 쏠린 회의실 상석에 앉았다.내 앞에는 도진무역 설립 자금 추적 보고서와 류태환 변호사가 작성한 횡령 및 배임 고발 서류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임직원들과 사외이사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내 입술만을 주시하고 있었다."주주 및 임직원 여러분. 박도진 대표는 회사 창립 당시 제 개인 특유재산 3억 원을 편법 차입하여 지분을 형성했습니다."내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회의실 구석구석을 무겁게 울렸다."지난 2년간 법인카드 1억 2,000만 원을 신서린 씨와의 유흥비, 숙박비, 명품 구입비로 썼습니다. 회사 공금 8,000만 원은 개인 사채 이자를 막는 데 들어갔고요. 화면의 영수증과 송금 내역을 보십시오."빔프로젝터 대형 스크린 위로 도진의 법인카드 결제 내역과 룸살롱 영수증, 차명 계좌 송금 내역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사외이사들과 주요 주주들의 얼굴이 분노와 충격으로 시퍼렇게 일그러졌다."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회사 돈까지 빼돌린 겁니다. 대표 자리에 더 둘 수 없습니다!""전 국민 불매운동으로 회사가 부도 직전입니다! 즉시 대표이사 해임안을 가결합시다!"사내이사 해임안은 주주총회 의결권 67%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어진 이사회에서도 박도진의 대표이사 해임을 의결했다. 표결은 5분 만에 끝났다.탕, 탕, 탕-!의사봉이 세 번 단호하게 울려 퍼지며, 박도진이 내 돈과 내조를 딛고 올라섰던 모든 권력과 지위가 영원히 박탈당했다."박도진 전 대표를 상대로 회사가 입은 손해액 4억 원을 청구합니다. 개인 예금과 보유 주식은 가압류 절차를 밟고, 법인 차량과 사무실 임차보증금은 회사 자산으로 보전하겠습니다."류태환 변호사가 보전 신청 자료를 주주들 앞에 당당히 공표했다. 급여나 퇴직금도 법이 허용하는 범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대형 로펌 회의실의 대형 LED 모니터 화면이 환하게 켜졌다.나는 단정한 아이보리색 수트를 차려입었다. 소매 아래로 손등의 거즈가 보였다. 곁에는 류태환 변호사와 지상파 3사 방송 취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3일간의 조난으로 수척했던 내 얼굴에는, 이제 가해자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하겠다는 서늘한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눈부셨지만, 내 가슴속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강 과장님, 준비되셨습니까?""네. 제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저 사람들이 제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먼저 보이게 해 주세요."태환이 마우스를 클릭하자 준비한 영상이 재생됐다. 취재진의 카메라가 화면을 향했고, 기자회견을 중계하던 뉴스 라이브에도 같은 장면이 나갔다.[단독 보도: 터널 참사 실종 아내 둔 남편, 장례식장서 내연녀와 '15억 보험금 축배' 충격 실태]먼저 내가 문틈에서 찍은 빈소 파티 영상이 재생됐다. 뒤이어 조문객들이 찍은 생환 장면, 사고 당일 블랙박스 음성이 각각 출처를 달고 이어졌다.'15억짜리 로또가 제 발로 터널에 기어들어 갔는데.''수색대가 늦게 갈수록 우리한테 유리해. 그 안에 묻혀서 산소 부족으로 질식해 죽으면 완벽한 자연재해 사망이거든.''꺄악! 오빠 최고! 나 오늘 밤 오빠한테 완전 봉사할래!'화면이 빈소 영상으로 돌아왔다. 돈다발을 세며 양주를 들이켜던 두 사람의 얼굴과, 그 뒤에 걸린 내 영정사진이 한꺼번에 잡혔다.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나는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도진을 끝까지 봤다. 기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아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영상이 공개된 지 불과 10분 만에 주요 포털 사이트 뉴스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가 도진과 서린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뉴스 1위: 터널 참사 패륜 남편 박도진][뉴스 2위: 상복 입고 부의금 턴 인플루언서 신서린][뉴스 3위: (주)도진무역 불매운동 및 퇴출 청원][뉴스 4위: 15억 사망보험금 사기
두 사람의 대질 내용도 뒤에 확인할 수 있었다. 마포경찰서 제3조사실에서, 도진과 서린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양손에 차가운 은빛 수갑을 찬 박도진과 신서린이 긴 철제 취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서린의 얼굴은 더 이상 SNS에서 수십만 팔로워를 거느리던 화려한 뷰티 인플루언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급 마스카라는 눈물과 땀에 흉측하게 번져 있었고, 단정치 못한 검은 미니원피스는 유치장 바닥의 흙먼지로 뒤덮여 넝마주이 같았다.서린은 번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까맣게 묻어난 화장을 보고는 도진에게 손을 내보였다."도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변호사는 불렀어? 선임비는 냈냐고!"서린이 수갑 찬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시퍼렇게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도진은 퀭하게 파인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리는 손가락만 내려다볼 뿐이었다."돈이…… 없어, 서린아. 카드도 막혔어. 통장까지 묶이면 진짜 손쓸 방법이 없다고.""뭐? 돈이 없다고? 15억 보험금은 어떻게 된 건데!""강지은이 살아 돌아왔잖아. 보험사에서 돈 안 준다고…… 사망진단서 써 준 의사도 조사받고 있어."도진의 비루하고 웅얼거리는 고백에, 서린의 눈동자가 경악과 배신감으로 뒤틀려갔다."그럼 너…… 15억도 없고, 신혼집 전세금도 없고, 진짜 땡전 한 푼 없는 빚쟁이 알거지였어?""서린아, 그래도 난 널 호강시켜 주려고 사채까지 땡겨서 포르쉐 계약금 넣고 명품 사줬잖아…….""사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미친 사기꾼 새끼야!"서린이 이성을 완전히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수갑 찬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도진의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어 내렸다.짝-! 퍽-!"아악! 서린아, 왜 이래! 미쳤어? 이거 놔!""누가 사달래? 네가 15억 재벌 사모님 만들어준다고 내 인생 책임진다고 했잖아! 내 팔로워들, 내 모델 계약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네깟 놈이 뭔데 날 끌어들여!"서린이 도진의 머리채를 한 움큼 쥐어뜯으며 얼굴에 가래침을 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