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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향기로운 재앙의 시작 #1

Author: 1727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8 22:07:37

혜연에게 ‘향기’란 평온한 일상의 다른 이름이었다.

공간 디자이너로서 그녀가 다루는 것은 물리적인 벽과 가구였지만, 

그 공간의 끝에 머무는 미세한 잔향들이야말로 혜연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완성이었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정갈한 햇살, 갓 내린 커피 향, 그리고 어젯밤 소영과 주고받은 다정한 통화 내용까지. 

혜연의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소영은 혜연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소영의 집에서 지내며 겪었던 따뜻한 온기. 

소영의 어머니가 차려주던 집밥과,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상수라는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울고 웃던 소영의 순애보를 곁에서 지켜본 혜연에게 소영은 지켜줘야 할 가족이자 분신과도 같았다.

5년 전, 상수의 8년 연애가 비극적으로 끝났을 때, 소영을 붙잡고 함께 밤새워 울어주었던 것도 혜연이었다. 

그 시절, 상수라는 남자는 혜연에게도 ‘지워버려야 할 나쁜 기억’ 그 자체였다.

그런 혜연에게 이제 막 출근한 아침부터 그 기억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 ‘블루밍 프로젝트’ 파트너, 최종 결정됐어. 강상수 작가야.”

팀장 김진우의 말은 맑게 개인 하늘에 떨어진 벼락이었다. 

혜연은 마시던 커피를 컵 째로 떨어뜨릴 뻔했다. 

강상수. 5년 반 전, 소영의 인생을 흔들어놓고 제 발로 떠나버린 그 무뚝뚝한 남자. 

혜연은 헛것을 들었다고 믿으며 팀장을 바라봤다.

“팀장님, 지금 뭐라고…?”

“강상수 작가. 왜, 혹시 아는 사람이야? 성수동에선 이미 감각 좋기로 정평이 난 조향사거든. 

이번 카페 컨셉이 ‘피어나는 기억’인데, 이 친구 향기가 아주 딱이야.”

혜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아는 사람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혜연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지우려 펜을 만지작거렸다.

“아, 그… 강상수요? 혹시 그 강상수 씨인가요?”

“어? 강상수? 유명한 조향사인데, 혜연 씨 그 사람 알아?”

팀장의 되물음에 혜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망했다. 아는 척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아뇨! 워낙 흔한 이름이잖아요. 제가 아는 사람이랑 이름이 같아서요. 동명이인이겠죠.”

“아, 그렇지? 하긴 강상수가 어디 한둘인가.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니까 잘해봐. 내일 오전 10시 미팅이니까 준비하고.”

팀장은 혜연의 당황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일 처리하듯 서류를 툭 던져두고는 제 할 일을 하러 가버렸다. 

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남겨졌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이건 사고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비유적인, 피할 길 없는 사고. 

혜연은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거울 속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주문을 외웠다.

‘박혜연, 침착해. 그는 너를 모를 수도 있어. 설령 안다고 해도 우린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야. 

절대로 소영이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혜연은 사무실 구석으로 돌아와 이 말도 안 되는 협업을 막기 위한 ‘방어전’을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동기 민지에게 속삭였다.

“민지야, 혹시 강상수라는 조향사 소문 들은 거 없어? 예술하는 사람들 그런 것 있잖아.

그 사람 성격이… 막 작업실 벽지를 다 뜯어버린다거나, 향료 병을 던지면서 작업을 한다거나 그러지 않아? 

내가 듣기로는 작업 중에 향기를 맡으면 미쳐서 창문을 다 열어젖힌다던데.”

“응? 아니? 상수 씨 되게 조용한 분이라던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민지의 순진한 대답에 혜연은 속이 탔다. 혜연은 참지 못하고 다시 팀장에게 달려갔다.

“팀장님, 아무래도 상수 씨는 우리 프로젝트랑 안 맞아요. 

조향학적으로 분석해 봤는데, 그 사람 향기는 분자 구조가 너무… 너무 둥글어서 우리 카페 환풍기를 다 막아버린대요! 

이건 공기 순환에 치명적이라고요! 공간 디자인의 핵심은 공기의 흐름인데, 그 흐름을 다 깨뜨릴 거예요! 

어제 제가 꿈을 꿨는데, 그 사람이 우리 작업실에 오자마자 도면을 다 태워버리더라고요. 이건 예지몽이에요!”

팀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혜연을 빤히 쳐다봤다.

“혜연 씨, 환풍기랑 향기 분자 구조가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예지몽이라니, 지금 혜연 씨, 그 친구랑 무슨 악연 있어?”

혜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악연이라기보다… 내 제일 소중한 친구의 8년짜리 흉터라고요.’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 끝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혜연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혜연은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쥐어뜯었다. 

상수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소영의 우는 얼굴이 겹쳐 보여 숨이 막혔다.

다음 날 오전 10시, 미팅룸. 혜연은 마치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심정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강상수, 너는 그저 파트너다. 소영이를 울렸던 그 과거는 오늘 이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마.’

문을 열었다.

미팅룸 안에는 창밖을 보고 있던 상수가 있었다. 혜연의 발소리에 상수가 돌아봤다. 

소영과 종종 스쳐가면서 보았던 그 무뚝뚝하고 서늘하던 표정은 없었다. 

대신 그는 혜연을 보자마자 아주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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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에필로그

    한때는 이 이끌림이나를 지탱하던 모든 세계를 무너뜨려야만 닿을 수 있는잔인한 신기루인 줄 알았습니다.내 오랜 긍지였던 시간과서로의 거울이었던 유일한 동행과세상의 전부였던 뿌리마저모두 잃어야만 허락되는벼랑 끝의 성소(聖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사람들은 말했습니다.축복받지 못한 길은 결국 추락할 것이라고.우리의 머무름은 오직 하늘만이서글프게 허락한 짧은 유예일 뿐이라고.하지만 고도를 높여 구름 위로 솟구친 지금,나는 비로소 내가 버린 줄 알았던 것들의진짜 이름을 부릅니다.나를 숨 쉬게 했던 치열한 삶의 마디들은이 거대한 세상을 견디는 단단한 뼈대가 되어 남았고,누군가의 질투이자 뜨거웠던 나의 청춘은멀리서 흔드는 손짓 하나로우리가 여전히 하나임을 증명하며 남았으며,나의 허물을 기꺼이 덮어준 사랑의 거친 손등 위엔조건 없는 온기라는 가장 깊은 마음이 남았습니다.하늘만이 허락한 줄 알았던 이 지독한 만남은사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단 하나도 앗아가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좁은 틀 안에 갇혀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들을가장 아픈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찬란하게내 손바닥 위에 남겨주었을 뿐입니다.이제 우리는 이정표가 없는 곳으로 갑니다.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은우리만의 이끌림이 향하는 그곳으로.비록 우리가 다시 추락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내 곁엔 당신이라는 향기가 남았고,내 안엔 나라는 이름의 우주가비로소 숨 쉬기 시작했으니까요.안녕, 나의 작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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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215화: 중력의 고백, 궤도를 넘어서는 비행 #2

    상수의 목소리에 서린 전문가로서의 긍지가 혜연의 가슴을 울렸다.그는 단순히 로맨티시스트가 아니었다.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을 가장 단단하게 다질 줄 아는 남자였다."그래서 우리, 6개월 뒤에 결혼해요. 그 6개월 동안 나는 내 모든 역량을 쏟아 프로젝트를 끝내고, 혜연 씨는 10년 동안 못 했던 휴식을 가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내 옆에서 숨만 쉬어도 내가 다 채울 테니까. 그동안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설계해줘요. 혜연 씨는 그게 전공이잖아요."상수는 혜연의 두 손을 꼭 잡고, 강 너머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그리고 그 일들이 다 마무리되는 날, 우리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 가요. 비행기 표만 끊고,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10년 동안 차가운 도면 선 안에 갇혀 있던 혜연 씨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잠시 우리 둘만의 세상에서, 온전하게 우리를 찾고 오는 거예요. 어떤 향기와 어떤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같이 지도를 그려보는 거죠."혜연은 상수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6개월 뒤의 약속.그것은 단순히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었다.상수가 혜연을 위해 설계한, 가장 거대하고도 로맨틱한 '진짜 자유'의 시작이었다.혜연은 그의 품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완벽한 안전함을 느꼈다.태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두 사람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강물 위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바람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렸다. 혜연은 상수의 목을 팔로 감싸며 그를 깊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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