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체 당신이 윤재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강수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윤제니는 기다렸다.
이번에는 어물쩍 넘어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말해.”
“네가 본 장면.”
수혁이 낮게 입을 열었다.
“틀린 건 아니야.”
“그럼 재희가 정말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네.”
“그래.”
“왜?”
수혁의 시선이 제니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붉은 표식은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
“또 모른다고?”
“재희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제니가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아는 게 뭐야?”
“재희가 나한테서 도망쳤다는 것.”
제니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한테서?”
“그래.”
“왜?”
수혁이 잠시 망설였다.
“내가 가뒀으니까.”
제니의 눈이 커졌다.
“뭐?”
“그때 재희를 찾는 놈들이 있었어.”
“그래서 사람을 가둬?”
“밖으로 나가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재희는 동의했고?”
대답이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안 했네.”
“……그래.”
제니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는.”
수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잃는 것보다 미움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결국 도망쳤고?”
“그래.”
“그리고 당신을 죽이려고 했고.”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던 여자.
그런데 나중에는 수혁을 죽이려고 했다.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재희가 죽은 건 그 뒤야?”
“응.”
“당신이 죽였어?”
수혁의 눈이 제니에게 향했다.
“아니.”
이번 대답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날 나는 재희 곁에 없었어.”
“그럼 누가 죽였는데?”
“몰라.”
“백이십 년 동안?”
수혁의 턱이 굳었다.
“찾았어.”
“누구를?”
“재희를 죽인 놈.”
제니가 멈칫했다.
“계속?”
“오랫동안.”
수혁은 사진 속 윤재희를 바라봤다.
“그런데 흔적이 사라졌어.”
“그래서 포기했어?”
수혁이 천천히 제니를 바라봤다.
“아니.”
“그럼?”
“기다렸어.”
“뭘.”
수혁의 시선이 제니의 얼굴에 머물렀다.
“너를.”
제니의 숨이 잠시 멎었다.
“……나?”
“정확히는 재희가 다시 나타나기를.”
“왜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혁이 대답하지 않았다.
“강수혁.”
“재희가 죽기 전에 말했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시 만날 거라고.”
제니의 손끝이 굳었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수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백이십 년 전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처럼.
“다음에도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면.”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때는 먼저 나를 찾지 말라고.”
제니의 머릿속에 자신이 봤던 기억이 스쳤다.
다음에는 나를 찾지 마.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찾았어?”
“처음에는 안 찾으려고 했어.”
“처음에는?”
수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십 년이 지나고.”
그의 시선이 제니에게 머물렀다.
“이십 년이 지나고.”
“…….”
“오십 년이 지나도 안 잊히더라.”
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도.”
수혁이 말했다.
“목소리도.”
잠깐의 침묵.
“마지막에 나를 보던 눈도.”
제니의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해졌다.
“그래서 계속 찾았어?”
“그래.”
“백이십 년 동안?”
“그래.”
제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미쳤네.”
“알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알아.”
“그런데도?”
수혁이 웃었다.
“백이십 년이면 약속 하나쯤 어겨도 되지 않나 싶었거든.”
“안 되지.”
“그래서 벌받았잖아.”
“무슨 벌.”
수혁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만나자마자 여기 찔렸는데.”
제니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건 당신이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왔으니까 그렇지.”
“그건 인정.”
잠깐.
처음으로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제니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
수혁의 웃음이 사라졌다.
“재희가 다시 나타날 거라는 말을 믿었다고 해도.”
제니가 물었다.
“어떻게 나인 줄 바로 알았어?”
“얼굴.”
“그것만?”
수혁이 침묵했다.
제니의 눈빛이 변했다.
“아니네.”
“…….”
“당신 아직도 뭔가 숨기고 있지?”
그 순간.
제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이번에는 주소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짧은 문장이 도착했다.
[윤재희가 죽은 곳으로 와.]
두 번째 메시지.
[강수혁 없이.]
제니가 화면을 바라봤다.
수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가지 마.”
“여기 어딘데?”
“제니야.”
“당신 아는 곳이지?”
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니는 그 반응만으로 알아차렸다.
“여기구나.”
“뭐가.”
제니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윤재희가 죽은 곳.”
“살아 있는 뱀파이어야.”낯선 남자의 말이 떨어진 순간.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제니는 수혁의 등을 바 라봤다.심장이 뛰고 있다.체온도 생겼다.그런데 붉은 눈도, 송곳니도 그대로였다.“그게 뭔데?”제니가 물었다.서도겸이 낮게 대답했다.“나도 처음 봐.”“처음?”“뱀파이어는 죽은 몸이야. 심장은 뛰지 않아.”도겸의 시선이 수혁에게 향했다.“그런데 저놈은 지금 살아 있어.”앞에 서 있던 뱀파이어가 웃었다.“그래서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군.”수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무슨 소문.”“백이십 년 전부터 있었어.”남자가 제니를 바라봤다.“특별한 피를 가진 인간이 있다고.”수혁이 즉시 시야를 가렸다.“보지 마.”“그 피를 마시면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지.”“닥쳐.”“다들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남자의 송곳니가 드러났다.“진짜였네.”그가 움직였다.순간 수혁도 사라졌다.쾅!두 사람이 벽에 처박혔다.제니가 숨을 삼켰다.수혁이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하지만—“……뭐야.”수혁의 표정이 굳었다.남자가 웃었다.“느려졌네?”수혁의 팔을 잡아 그대로 던졌다.쾅!“수혁!”제니가 달려가려 하자 도겸이 막았다.“가지 마.”“놔!”“지금 네가 움직이면 셋 다 너한테 붙어.”나머지 두 뱀파이어의 시선은 이미 제니에게 고정돼 있었다.수혁이 천천히 일어났다.입가에 피가 맺혔다.제니의 얼굴이 굳었다.수혁이 피를 흘리는 모습.처음이었다.“인간에 가까워진 만큼 약해진 건가?”남자가 비웃었다.수혁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한 번 이겼다고 신났네.”“강수혁.”“왜.”수혁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한 번 더 해봐.”남자가 달려들었다.수혁이 피하려 했다.그런데 이전만큼 빠르지 않았다.남자의 손이 수혁의 목을 움켜쥐었다.“수혁!”그 순간.제니의 손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붉은 표식이 빛났다.동시에 수혁의 가슴도 붉게 빛났다.쿵!수혁의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제니의 심장도 같은
쿵.쿵.제니의 손바닥 아래에서 분명한 박동이 느껴졌다.“진짜 뛰어.”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낯설 정도로 굳어 있었다.“이게 어떻게…….”서도겸이 빠르게 다가왔다.수혁의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탁.수혁이 그의 손을 쳐냈다.“건드리지 마.”도겸의 눈이 가늘어졌다.“힘은 남아 있네.”“뭐?”“심장이 뛰기 시작했다고 바로 인간이 된 건 아닌 것 같다고.”제니가 조금 전 본 기억을 떠올렸다.네 피는 강수혁을 인간으로 만드는 피야.“아니야.”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내가 본 기억에서는 분명히 그랬어.”“뭐라고?”“재희한테 어떤 여자가 말했어.”제니가 수혁을 바라봤다.“내 피가 당신을 인간으로 만든다고.”침묵이 흘렀다.수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여전히 창백한 피부.송곳니도 그대로였다.붉은 눈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별로 인간 같지는 않은데.”“시간이 필요한 거 아닐까?”제니가 말하자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왜?”“뱀파이어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피 같은 건 들어본 적 없어.”“그럼 방금 이건 뭔데?”“그러니까 문제지.”도겸이 제니를 바라봤다.“네 피가 정확히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니까.”그 순간 수혁의 몸이 휘청거렸다.“수혁!”제니가 급히 붙잡았다.수혁의 체온이 이상했다.차갑지 않았다.“당신 몸…….”제니가 그의 목에 손을 댔다.미약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느껴졌다.수혁의 표정도 변했다.“따뜻해?”“조금.”수혁이 자신의 목을 짚었다.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왜 그래?”“시끄러워.”“뭐가?”“네 심장 소리.”제니가 굳었다.“내 거?”“너무 크게 들려.”수혁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제니의 목.손목.그리고 손가락의 상처로 시선이 차례로 움직였다.“피 냄새도.”수혁이 이를 악물었다.“아까보다 더 심해.”제니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수혁도 동시에 뒤로 물러났
“내가 네 피를 마시는 순간.”수혁의 송곳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이번에는 정말 멈추지 못할 수도 있어.”제니는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봤다.[피를 나누면 기억이 열린다.]“그럼 안 하면?”“뭐?”“기억을 못 보는 거잖아.”“그게 낫지.”수혁은 단호했다.“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해.”“나는 아닌데.”“윤제니.”“백이십 년 전에 내가 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누가 재희를 죽였는지, 왜 내 피 때문에 뱀파이어들이 찾아오는지.”제니가 손목의 표식을 들어 보였다.“이것도 아직 제대로 모르잖아.”“그래도 네 피를 마시는 건 안 돼.”“조금만 마시면?”“양의 문제가 아니야.”수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네 피 앞에서는 내가 어디까지 망가질지 나도 몰라.”서도겸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수혁의 시선이 날카롭게 돌아갔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한 방울이면 될 수도 있어.”“닥쳐.”제니가 도겸을 바라봤다.“한 방울?”“메시지가 사실이라면 중요한 건 흡혈이 아니라 피를 나누는 행위야.”“확실해?”“확실한 건 없어.”도겸이 벽의 문양을 바라봤다.“하지만 표식이 반응하는 걸 보면 가능성은 있지.”제니는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의 밴드를 바라봤다.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해보자.”“안 돼.”“수혁.”“다른 방법 찾아.”“언제?”제니가 수혁을 똑바로 바라봤다.“또 누가 내 집에 들어오고, 또 뱀파이어가 찾아올 때까지?”수혁은 대답하지 못했다.“난 계속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고 싶지 않아.”제니가 밴드를 천천히 떼었다.희미하게 아물었던 상처가 벌어지며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순간.수혁의 눈이 새빨갛게 변했다.“제니.”“한 방울만.”“치워.”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당장.”제니는 물러서지 않았다.“나 믿어.”수혁이 헛웃음을 흘렸다.“지금 제일 믿으면 안 되는 게 나야.”“그래도.”제니가 손을 내밀었다.“당신은 지금까지 참았잖
“백이십 년 전에 윤재희가 만든 조건이 바뀌었다는 뜻이야.”서도겸의 말에 윤제니는 강수혁의 가슴을 바라봤다.자신의 손목과 똑같은 붉은 표식.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다.“조건이 바뀌었다고?”“그래.”“어떻게?”도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수혁이 셔츠를 여몄다.“네가 만든 거잖아. 설명해.”“내가 만든 건 원래 하나였어.”도겸이 제니의 손목을 가리켰다.“윤재희에게 남긴 표식.”“그런데 왜 나한테도 생겼는데?”수혁이 물었다.“그걸 모르겠다고.”도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백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어.”제니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잠깐.”그녀는 수혁을 바라봤다.“내가 처음 당신을 찔렀을 때.”“왜?”“심장을 찔렀잖아.”“그랬지.”“그때 정말 죽었던 거야?”수혁이 잠시 생각했다.“평소보다 오래 의식이 끊겼어.”“얼마나?”“정확히는 몰라.”도겸의 표정이 변했다.“심장을 찔렀다고?”“그래.”“그리고 살아났어?”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지금 보이잖아.”“그게 문제가 아니야.”도겸이 수혁에게 다가왔다.“그때부터 표식이 나타난 거라면.”그는 말을 멈췄다.제니가 재촉했다.“뭔데?”“원래 약속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죽여야 끝난다며.”“원래는.”도겸이 제니를 바라봤다.“그런데 네가 심장을 찔렀고, 강수혁은 다시 살아났어.”“그래서?”“죽음으로 끝내려던 약속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거지.”수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방향.”도겸은 대답 대신 벽의 문양을 바라봤다.붉은 선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마치 두 사람의 표식에 반응하는 것처럼.“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도겸이 말했다.“윤제니. 손을 대봐.”제니가 벽으로 다가갔다.수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위험해.”“가만히 있어도 위험하잖아.”“제니야.”“이번에는 내가 결정할게.”수혁은 결국 손을 놓았다.제니가 손바닥을 문양 위에 올렸다.순간.붉은빛이 방 전체로 번졌다.어두운
“백이십 년 전에 윤재희가 죽으면서 끝났어야 했거든.”제니는 손목을 내려다봤다.붉은 표식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끝났어야 했다는 게 무슨 뜻이야?”서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아까는 약속이라며.”제니가 그를 노려봤다.“제대로 설명해.”도겸이 벽에 드러난 문양으로 시선을 돌렸다.“재희가 원한 건 단순했어.”“뭔데?”“다음 생에서도 강수혁을 만나게 된다면.”그의 시선이 수혁에게 향했다.“이번에는 반드시 죽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수혁의 턱이 굳었다.“그래서 표식을 만든 거야?”“그래.”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건이 있었어.”“조건?”“첫 번째.”도겸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다시 태어난 재희가 강수혁을 만나면 표식이 깨어난다.”제니는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움켜쥐었다.수혁을 만난 바로 그날.이 표식이 생겼다.“두 번째는?”“강수혁의 피가 가까이 있으면 기억이 돌아온다.”제니의 표정이 굳었다.“그래서 내가 자꾸 그 여자 기억을 본 거야?”“아마도.”“아마도?”“나도 이런 식으로 깨어날 줄은 몰랐으니까.”제니가 미간을 찌푸렸다.“세 번째.”도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정해진 방법으로 강수혁을 죽이면 표식은 사라진다.”제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목.”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아니고.”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니가 그를 돌아봤다.“그래서 아까 대답 안 했구나.”“확실하지 않았어.”“당신 몸인데?”“백이십 년 동안 누가 내 목을 잘라본 적은 없거든.”제니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그걸 농담이라고 해?”“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당신 목 얘기 중이야.”“그러니까 더 살벌하지.”“둘 다 그만하지?”도겸이 끼어들었다.제니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그럼 재희는 왜 이런 걸 만든 거야?”“그건 네가 봐야 할 것 같은데.”도겸이 벽의 문양에 손을 댔다.순간.제니의 표식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잠깐—”시야가 어두워졌다.“정말 이 방법밖에
“네가 강수혁을 죽이도록 만든 사람이야.”제니의 얼굴이 굳었다.“당신이?”서도겸이 웃었다.“정확히 말하면 윤재희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지.”“거짓말하지 마.”수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재희는 너를 믿지 않았어.”“마지막에는 믿었지.”도겸이 제니의 손목을 가리켰다.“저게 증거야.”붉은 표식.제니가 손목을 감쌌다.“이게 뭔데?”“약속.”“무슨 약속?”“다시 태어나도 강수혁을 만나게 된다면.”도겸의 붉은 눈이 수혁을 향했다.“이번에는 반드시 끝내겠다는 약속.”“그만해.”수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도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이상하지 않았어?”그가 제니에게 물었다.“처음 보는 남자가 네 집에 있었는데, 넌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심장을 찔렀잖아.”제니의 손끝이 굳었다.그날이 떠올랐다.수혁을 처음 봤던 순간.두려웠다.분명 처음 보는 남자였다.그런데—칼을 드는 순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그게 이 표식 때문이라고?”“일부는.”“일부?”도겸이 다가오자 수혁이 곧바로 앞을 막았다.“거기서 말해.”“아직도 이러네.”도겸이 피식 웃었다.“백이십 년 전에도 재희를 네 뒤에 숨겼지.”수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래서 결국 도망쳤고.”“입 닥쳐.”“가두기까지 했잖아.”제니가 수혁을 바라봤다.“그건 들었어.”이번에는 도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그것까지 말했어?”“다 말한 건 아니겠지.”제니가 수혁을 보며 말했다.“항상 그러니까.”수혁은 반박하지 못했다.제니는 다시 도겸을 바라봤다.“표식부터 설명해.”도겸이 벽에 기대었다.“재희가 죽기 얼마 전 나를 찾아왔어.”“왜?”“부탁할 게 있다고.”“당신한테?”“강수혁과 관련된 부탁이었지.”도겸이 천천히 말했다.“다음 생이 있다면 자기가 수혁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어.”제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래서?”“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하게 해달라고 했지.”“뭘?”도겸의 시선이 수혁의 목으로